모든 정치는 회색 때時 일事 (Issues)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말이라고 한다. 80~90년대 사회과학 출판사 풀빛에서 펴낸 책들에는 속지 맨 앞에 저런 말이 새겨져 있었다. 잎이 풍성한 나무 그림과 함께.

모든 이론을 색으로 형상화한다면 정녕 회색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선거판을 색으로 형상화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회색이 될 것 같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정치인들은 자기 고유의 색을 버리고 흐리멍덩하고 엉거주춤한 무채색으로 퇴행한다. 그게 표를 얻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좌우 정치인들은 선거 때면 가운데로 몰린다. 이미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자기 지분에 더하여 자신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표까지 넘보다 보니 발생하는 현상이다.

혹은 정치인 개인의 모호했던 정체성이 선거판이라는 계기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선거에서 후보자와 유권자 간의 역동적 관계를 공간 개념으로 설명하려 한 시도는 오래된 일이다. 앤서니 다운스(Anthony Downs)의 설명(<An Economic Theory of Democracy>, 1957)에 따르면, 선거 때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변동시킴으로써 득표를 최대화하려고 꾀하게 된다. 여기에는 1) 자신과 정반대되는 쪽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모방하거나 2) 스스로의 이데올로기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이 포함된다.

제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박근혜가 제시한 복지 공약은 정치적으로 정반대에 선 야당들이 발표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복지에 관심이 큰 비보수적 유권자의 표를 긁어오기 위해 야당의 공약들을 베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복지 공약에서 좌우의 차이를 찾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졌다.

지금의 제19대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이 주요 정책과 쟁점에 대해 애매모호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같은 득표 셈법 때문이다. 분명한 태도를 보이면 그 태도를 지지하는 유권자의 표만 얻을 수 있지만, 모호하고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면 그런 태도에 자신을 투사하는 오도된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올 수 있다.

그 결과, 이 푸르고 좋은 계절에 인간 세상은 온통 회색 천지다. 회색 중에 유독 노랑색만 눈에 띈다.


--- ** --- ** ---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영문학자 이양하가 쓴 글 '신록예찬' 중 일부다. 딱 80년 전 이맘때 쓴 글이다.

'신록예찬'은 물론 정치 평론이 아니다. 그러나 꽃다운 계절에 치러져서 장미 대선이라는 이름까지 붙은 선거가 줏대도 강단도 없는 회색 잔치가 되어가는 꼴과 비교하면 시사하는 바 적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비록 가난하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개혁의 열풍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하는 희망과 낙관을 잠시라도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역시 현시창이다.

유약한 정치인들은 자신의 신념을 대중에게 설득하기보다 대중에게 설득당하기를 선택한다. 그 편이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대중의 요구에 응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라는 간과 지도자로서의 자존감이라는 쓸개를 빼놓고 표만 추구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은 거꾸로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심대한 훼손일 수도 있다. 이명박이 설파한 바, '선거 때면 무슨 말을 못하랴' 하는 식의 사기와 협잡을 내포하며, 모호함으로 희망을 준 뒤 당선되고 나서 뒤 본색을 드러내는 것 역시 표를 준 유권자에 대한 배신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신념과 자존감조차 없는 정치꾼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울긋불긋 꽃 앞다투어 피고 연두색 여린 잎 솟구치는 계절에 닥친 회색 선거. 촛불 민심으로 표출된 광장의 개혁 의지가 정치권의 권력 의지로 변질된 선거판. 대지는 언제나 뜨겁고 풍성하나 선수들은 언제나 무능하고 사악하므로 선거란 언제나 차선, 아니 차악을 골라야 한다는 위로도 이 선거에는 잘 통하지 않는다.

이 계절은 우울해하거나 낙심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화려한 희망의 신록을 키워왔던 것이다.



Advertisement


 

1 2 3 4 5 6 7 8 9 10 다음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