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모르고 있습니다 섞일雜 끓일湯 (Others)

일제 강점기 영화인 김인규(예명 김한)는, 원시적인 산업구조인 데다 이데올로기 갈등이 심했던 당시 영화판에서 좌충우돌하며 살았던 것 같다.

1909년생인 김인규는 1927년경, 나이 18세 즈음에 영화사 미술부에서 일하면서 영화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집안 반대로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공부를 했다고 한다. 5년 뒤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영화에 전념했다. 제작 과정에도 관여했으나 주로 연기자로 활동했다.

강점기 말기에 일본 군국주의 색채가 강한 영화들에 출연하였으며,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문화예술편에 김한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좌파쪽 영화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이 터지자 월북하여 북한으로 갔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음은 1937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인터뷰다. 제목 영역에 다양한 요소를 집어넣었다. 그중에 '늘 실패만 하니 환멸을 느낀다'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다. 이런 내용을 인터뷰 기사 제목으로 뽑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다른 제목에서 쓴 '기염(을 토하다)' '포부' '야심' 같은 단어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편집자는 제목을 만들어 내기가 무척 곤란했던 모양이다.

아래는 이 인터뷰의 시작 장면이다.


기자: 바쁘신데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주시니 도리어 미안합니다. 그런데 요새 스타들의 기염을 들어 싣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하여 몇 말씀 들려주셔야겠습니다.

김: 예, 매일 읽습니다. 우리들은 귀사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기자: 요새 무슨 촬영중에 계십니까?

김: 요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자: 영화계에 나서신 지 몇 해나 되십니까?

김: 햇수로 따지면 약 10년 가량 됩니다. 그러나 중간에 동경 가서 미술학교에 약 5년 가량 수학을 하였으니 실은 5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자: 그러면 그간 작품이 퍽 많으시겠습니다그려.

김: 숫자로는 열일곱인가 됩니다. 그러나 그중에 된 것은 하나도 없으니 오히려 영화인이란 말을 듣기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기자: 그 작품 중에서 득의의 작(만족스러운 작품)이라고 생각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이니 지금까지 꾸준히 하는 것뿐이지,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자: 그러면 어떤 역할이 마음으로 하고 싶으시며 성격에도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김: 그것도 역시 아직 모릅니다. 아직도 나는 나를 모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고 연구를 거듭하여서 나라는 것을 안 뒤에야 자신도 생길 것이며 욕망도 생길 것입니다.


김인규는 그의 생애만큼이나 성격도 무척 특이했던 것 같다. 한편 쿨하고 솔직하면서 한편 대담 기자를 당황하게 하는 대책 없는 대답들 속에서 그의 성격이 전해온다.

이때의 김인규는 이미 상당한 경력을 쌓은 중견 영화인이다. 활동 햇수는 짧지만, 그만큼 선수층이 엷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아직 모른다고 말한다. 자신을 알아야 희망이나 욕망이 생길 것이고 자신감도 생길 것이라고 한다. 섣부른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좌절에 빠뜨리지 않으려 경계하는 모습에서 지혜가 읽힌다.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얼마나 지내면 자신이 생길런지, 그것은 제 자신으로도 실로 괴롭습니다. 언제나 시사(試寫)를 볼 때엔 늘 실망을 느끼게 되니까요. ... 너무도 안 되니 환멸을 느낀 적은 많습니다만, 염증을 내본 적은 없었습니다.


환멸과 염증은 비슷한 정서인 것 같지만, 조금 다르다. 환멸은 환상이나 기대가 깨져 괴롭다는 것이고 염증은 싫증이 나는 것이다. 둘 다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전자는 긍정적인 부정이고 후자는 부정적인 부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자신이 가진 것에 실망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더욱 정진하고 연구를 거듭하여서'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가는 것, 이것이 27세 청년배우 김인규의 삶의 철학이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친일의 길까지 가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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