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더이상 안되긴 하지만

마이크로 필름실에서 제3세계의 사회 운동을 주로 다루는 정기간행물을 촬영하다가, 손을 멈추고 사진 한 장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인도의 어느 초등학교 학생들이 "No more Hiroshimas" (히로시마는 더이상 안돼요) 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이었다. 몇 해 전,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던 8월6일을 기념해 벌어진 캠페인 중 한 장면이던 모양이다.

내가 손을 멈추고 사진을 들여다본 것은, 저 커다랗고 맑은 눈을 가진 인도의 어린이들이 수천리 떨어진 일본의 지방 도시 히로시마를 무엇으로 기억할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하는 많은 서양인들이 그렇듯, 강대국(미국)의 무자비한 원폭 투하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상징적 도시 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닌게 아니라, 나가사키와 더불어,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자폭탄 폭격을 당한 일본의 히로시마는 반핵 운동의 상징으로 단골로 등장한다. 세계에서 반전 반핵 시위가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쉽게 No more Hiroshima 구호를 찾아볼 수 있다. NPT나 IAEA 회의가 벌어지는 곳 주변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8월 초의 원폭 투하 기념일이 되면 히로시마는 세계 곳곳에서 헌신적인 반전 활동가들의 단골 구호가 된다. 바야흐로 히로시마는 금단의 무기 원폭으로 인한 비인간적인 대량 살상의 희생양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히로시마에 평화의 색깔을 덧칠하기 위해 애써온 일본의 노력이 빛나는 장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원폭 투하로 희생된 히로시마의 시민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는 또 히로시마가 인류 역사상 마지막 원폭 피격 도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같은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고군분투하는 세계의 모든 반전 반핵 운동가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뜻에 1백% 공감한다. 반핵을 오로지 정략적으로만 써먹는 반핵반김 어쩌고 하는 유령단체의 머저리들은 빼고.

그러나 말이다. 그냥 "히로시마 같은 일은 더이상 안돼요!" 하고 외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히로시마보다, 원폭보다 더 앞선 일이 있지 않은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결과한 단초가 있지 않은가. 나는 전쟁, 그것도 침략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히로시마는 일본의 침략 전쟁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 중 하나다. 누가 일본보고 전쟁하라고 다그친 적 없다. 전쟁은 제국주의 일본의 야욕에 따라 시작됐다. 그리고 그 전쟁으로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다. 예컨대,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수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전쟁만으로 본다면 일본은 철저히 가해자이다. 아시아 나라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 않은가.

따라서, 일본인들은 "No more Hiroshima" 하고 외치면서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해자가 어느 순간 피해자로 둔갑하여 세상에 평화를 팔고 다닌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른 나라 운동가들도 "No more Hiroshima" 하고 외치면서 히로시마만을 생각할 게 아니라, 히로시마의 비극을 낳은 좀더 원초적인 죄악인 침략 전쟁까지 함께 돌아보아야 한다. No more Hiroshima 만큼 중요한 것이 No more Pearl Harbor, No more Nanking massacre (남경대학살) 아니던가.

시간은 흐르고 추억이 그렇듯 과거는 잊혀져 간다. 인간의 머리란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새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과거의 정보는 흘려 보낸다. 제한된 용량에서 그나마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새로 벌어진 일이거나 (recency) 자주 생각(말)되어지는 (frequency) 것이다. 일본의 침략 전쟁은 논의에서 밀려나고 원폭 피해자로서의 히로시마만 꾸준히 강조되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대체 왜 히로시마가 원폭을 떠안게 되었는지 잊어버리는 지경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첫번째 사진: 히로시마 현수막을 내세우고 행진하는 서양 운동가들.
두번째 사진: 올 5월 뉴욕에서 열린 NPT 회의장 주변의 반핵 퍼레이드.
두 사진 모두 웹 어디에선가.

덧글

  • Hikaru 2005/10/14 10:16 # 답글

    일본 작가들이 낸 수 많은 핵폭탄 피해를 다룬 이야기들, 다큐멘터리들이 완벽히 피해와 슬픔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죠.. 하마터면 잊을 뻔했어요!
  • 쉰바람 2005/10/14 11:11 # 삭제 답글

    지난 8.15에도 일본 TV에서는 원폭 다큐 해 주더군요. 몇몇 일본 문화 관련 블로그에서 어린 아이들이 그거 보면서 원폭은 나빠...라고 하든데, 그 이전에 일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거의도 아니고 아예 없더군요.

    일본 애들이라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지만 일본 문화에 완전히 물들어 똥오줌 못 가리게 된 아이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역사도 돈으로 살 수 있으니 돈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UN기조연설에서 땡깡부리는 것 정도밖에는 없겠지요.
  • 지아쿨 2005/10/14 12:11 # 답글

    히로시마를 대대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자신들이 마치 전쟁의 피해자인 양, 희생자인 척 하는 일본의 모습이 너무 싫습니다.
    히로시마 원폭의 진정한 피해자들은 죄없이 남의 나라로 끌려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원자폭탄에 죽거나 피폭을 당해, 평생 동안 그 힘겨운 질고를 짊어진 채 살아야 했던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질병을 천형처럼 대물림 받은 우리의 이웃인 2세, 3세들 말입니다.
    할말은 많지만 여기서 그만 하렵니다. 더 적다가는 제 더러운 성격에 분명 욕지거리가 나올 테니까요.^^;;
  • 명랑이 2005/10/14 16:02 # 답글

    "NO More Hiroshima" 일본인들 그들 스스로에게도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전쟁이 없었으면 원폭도 없었겠지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원폭을 맞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요. 20세기의 최대 과오는 전쟁이고, 그 전쟁의 상징적 장면은 버섯구름.. 이렇게 정리하고 그들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함을 역설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히로심아 2005/10/15 07:55 # 삭제 답글

    일제에게 수난 받았다며, 36년간 일제의 앞잡이를 한 죄값을 지우려하는 조선인들을 비난할 권리가 중국인에게 있습니다. 남경대학살 이후 중국의 중일전 사상자는 민관 합쳐 일천팔백만명입니다. 일본의 직접적인 수난자가 되었던 중국에 비하면 2차대전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대륙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괴뢰국에 불과합니다. 아 국가도 아니었구요. 물론 태평양전쟁의 전장이 되지 않은 운좋은 나라기도 하구요.
  • 히로심아 2005/10/15 07:56 # 삭제 답글

    태평양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중국을 구하려 했거나,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일어난 전쟁이 아닙니다. 일본이 원자재, 특히 석유생산지를 점령하기 위해 서유럽의 식민지였던,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빼앗아가면서 서양 연합군의 공적이 되어버렸으며, 미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 미일전쟁의 원인이었습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서양열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 대동아전쟁을 일으켯다는 것이 거짓이듯이, 이를 되찾으려 일본과 맞선 미국도 절대 동아시아 해방, 반파쇼 전쟁을 벌인게 아닙니다. 미국과 서양 열강들의 더러운 속셈은 종전을 앞둔 1945년 한반도를 반쪽으로 갈라먹겟다는 결과로 나타난 게 이상하지 않지요.
  • 히로심아 2005/10/15 07:56 # 삭제 답글

    1945년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한 이후 종전이 코앞에 닥친 일본내 상황에서, 당시 신무기 실험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인구 350,000의 히로시마와 인구 270,000명에 나카사키에 핵폭탄을 떨어트린 것은 전쟁범죄이외에 다른 명칭을 붙일 수 없습니다.

    이를 마치 36년 일제치하의 보복인 것인양, 천벌이 것인 양 가르친다면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를 용서하는 우스운 일이 됩니다. 님의 글은 한반도 아시아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아득히 태평양 건너 "미국의 소리"에서 낭랑한 성우의 목소리로나 들어 볼 만한 에세이인 것 같아 무척 씁슬하여 박하사탕을 하나 물어봅니다.
  • deulpul 2005/10/15 10:49 # 답글

    씁쓸하셔서 입에 문 박하사탕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만, 왜 입이 씁쓸한지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저는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졌으니 얼씨구 경사났다고 쓴 것도 아니고 조선 처지에서 신나는 보복이다 하고 쓴 것도 아니며 미국이 잘했네 하고 쓴 것도 아닙니다. 잘 읽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말씀대로 미국이 원폭을 쓴 것은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임은 명백하구요, 원폭으로 인해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애도해도 지나치지 않겠죠.

    제 글의 취지는 히로시마가 완연히 전쟁의 희생양으로만 덧칠되고 있는 것의 위험성을 돌아보고, 부분의 희생만이 강조되고 기억되면서 그 희생을 낳은 원초적인 배경은 흐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점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했던 겁니다. 일본이 전쟁 당사자로서 이웃을 유린하며 수많은 희생을 강요한 사실도 역시 중요하다는 뜻이죠. 히로시마에 원폭 처박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외국어만 죽어라 가르치고 배우는 탓인지, 정말 국문 독해를 제대로 교육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됩니다.
  • deulpul 2005/10/15 10:50 # 답글

    미국의 핵폭탄 투하를 전쟁 범죄라고 하셨는데, 그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아울러 합법적으로 인간을 도륙하는 장치인 전쟁은 그 모두가 그 자체로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핵폭탄이 아니어도 전쟁은 범죄입니다.

    몇 가지 사소한 점도 함께 지적해 드리자면, 첫 부분에 쓰신 중국쪽에서 나옴직한 시각은 중국넘들 처지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넘들 처지에서는 그렇게만 볼 수는 없을 것 같구요, (조선넘들이 모두 떨쳐나와서 일본을 반기며 자진해서 괴뢰국이 되었던가?) 두 번째 쓰신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이 조선이나 아시아 나라들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별로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네요. 또 '당시 신무기 실험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핵폭탄을 떨어트린 것은' 요건 잘못 아시는 것이구요.
  • deulpul 2005/10/15 10:57 # 답글

    태평양 건너 운운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미국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무슨 친미파 주구처럼 보이나보죠? 하하... '한반도 아시아' 에서 쓰여지면 뭐가 다른가요? 한반도 아시아에 발붙이고 있는 넘들이 다 똑같은 생각 하나요? 아시아까지는 가지도 말고, 한국만 봐도 별별 오만가지 잡넘들이 다 있구만요, 뭘. 광화문 대로에서 성조기 들고 방성대곡하는 넘이 없나, 미국과 미국말에게 나라를 바치자고 떠드는 넘이 없나...

    낭랑한 목소리라고 칭찬해 주시니 고맙긴 하되, '미국의 소리' 틱한 선전 홍보는 생리에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이야기의 내용과 직접 관계없는 개인적인 부분을 끄집어내 비판/비난하는 것은 제가 아주 혐오하는 유치한 이야기 방식이랍니다. 제가 미국의 대외 정책을 어떻게 보는지는 이 곳에 실린 글들을 두루 보시면 대충 아실 수 있습니다. 만, 그냥 스쳐지나가시는 분들에게 그런 것까지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르고 씹지는 말아주시기를 간곡히 비옵니다. 어쨌든 열심히 답글 써주신 정성에 감사드려요.
  • 지아쿨 2005/10/15 11:02 # 답글

    ㅉ! ㅉ! ㅉ! 들풀님께 박수를...
    아까부터 제가 한소리 하고픈 것을,
    남의 집에 와서 시끄럽게 굴면 예의가 아닌 듯하여 꾹 참고 있었습니다.
    암튼 달아주신 덧글에 제 속이 다 시원합니다.^^
  • deulpul 2005/10/15 16:59 # 답글

    애고... 쉰바람님 말씀은 너무 과격(?)하셔서, 제가 개인적으로 따로 잘 보관하고 여기서는 살짝 안보이게 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시겠죠?
  • 쉰바람 2005/10/15 23:47 # 삭제 답글

    제가 좀 글을 과격하게 씁니다. 눈이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인터넷 실명제라는 파쇼적인 발상에 끌리는 이유도 이런 것 때문이죠...
  • happyalo 2005/10/20 22:46 # 답글

    일본은 참 머리가 잘 돌아가는 나라지 싶습니다.
  • deulpul 2005/10/27 05:28 # 답글

    쉰바람: 그것도 스타일이죠. 부러운 스타일이네요, 화끈한 거, 하하-. 열 확 받을 때 할 말 제대로 못하면 병이 된다나요.

    happyalo: 그러게 말입니다. 누가 그랬던가요. 일본은 다 모아놓으면 대단한데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보들이라고. 모두 바보인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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