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한반도

한반도의 최근 현대사에서 1994년만큼 극적이었던 시기도 없을 것 같다. 핵개발을 천명한 북한은 미국과 국제 기구의 핵사찰 압력에 완강히 저항하였고, 미국은 북한 공격 계획으로 응답하였다. 6.25 전쟁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질뻔한 순간이었다.

미국 정부가 대북 공격 직전까지 움직였다는 사실은 모두 사후에 알려졌다. 당시 김영삼 정부와 클린턴 행정부 사이의 외교적 긴장 때문에, 이같은 미국의 움직임은 한국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많은 한국 사람이 위험천만한 순간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쳤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4년 미국의 북한 공격 계획이 대중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윌리엄 페리가 1999년 이같은 사실을 공개하면서부터였다.

며칠 전 몇몇 친구와의 방담 중에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던 부분을 뒤적여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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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북핵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갈등이 최고조를 향해 치달릴 즈음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완강히 거부하던 북한에 대해 미국은 유엔을 통해 강력한 경제 봉쇄를 가하려 하였고, 이에 대해 북한은 다시, 이같은 봉쇄는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개전 선언으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가히 긴장과 위기가 점증하는 국면이었다.

군사 시위로 북한의 핵사찰 수용을 강제하려던 미국의 의도에 따라, 한국과 미군의 군사적 움직임이 대폭 강화되었다. 한국은, 북한이 계속 사찰을 거부하면 한미 연례 군사훈련 (팀 스피리트) 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군사훈련은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그동안 잠정 중단되어 왔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미군 전력을 대폭 증강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3~4월에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아파치 공격 헬기를 비롯한 미군 병력과 장비가 남한으로 공수되어 전진 배치되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이러한 한국과 미국의 무력 증강은 즉각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책동이라고 비난하며 이에 단호히 대응할 것을 선언했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많은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개전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즉 미국이 계획하는대로, 미국이 북한의 핵 시설을 직접 타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될 가능성이 컸지만, 이같은 분위기에 자극된 북한이 선제 공격을 해올 가능성도 있었다.

미국의 북한 공격 계획은 매우 구체적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순항 미사일과 F-117 스텔스 전투기로 영변 지역의 핵 시설 추정 목표를 타격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국방부는 이 공격으로 인한 방사능 물질 유출은 걱정할만한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문제는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었다. 한반도의 특수성상, 제한적 공격이라는 말이 잘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준전시 상태에 있는 한반도에서는 작은 군사 행동이라도 곧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로버트 갈루치를 비롯한 미국 행정부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모두, 영변에 대한 미국의 폭격이 바로 한반도에서의 전면전 시작을 의미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 즈음, 백악관은 주한미군 지휘부를 통해,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벌어질 희생이 어느 정도일지 추산하여 보고케 하였다. 이 보고에 따르면,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남북한 사람 1백만명 정도가 사망할 것이며, 미국인(미군)도 8만명에서 10만명 가량 사망할 것으로 추산되었다.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6.25 전쟁에서 발생한 남북한 희생자는 모두 450만명이다.) 미국이 부담해야 할 전쟁 경비는 1천억 달러 (1백조원) 를 넘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산업 손실액은 1조 달러 (1천조원)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물론 이러한 추산은 핵전쟁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계산된 것이다.

6월에 주한미군사령관 개리 럭 장군은 제임스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를 비밀리에 만나,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들의 소개 계획을 곧 실행하기로 합의했다. 전쟁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6월15일, 백악관의 긴급 회의에서 페리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은 임박한 군사 행동을 실행하기 위한 세 가지 옵션을 클린턴에게 제시했다. 국방부가 추천한 것은 1만명의 미군 병력과 F-117 스텔스 전투기, 장거리 폭격기를 한반도에 긴급 배치하고, 또다른 전력을 주변국에 이동하는 방안이었다. 이러한 군사력은 단 하루만에 한반도로 이동할 수 있었으며,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의 소개 작전도 신속히 이루어질 것으로 판단됐다.

백악관에서 한반도의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벌이고 있던 바로 그 때, 평양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평양에서 김일성과 만나고 있던 전 대통령 지미 카터로부터 온 전화였다. 같은 날, 6월15일이었다.

전쟁의 비극으로 치닫던 한반도의 긴장은 지미 카터가 급히 평양으로 날아가 김일성과 만나면서 극적인 전기를 맞았다. 김일성은 카터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북한이 추진하고 있던 모든 핵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그동안 미국이 끊임없이 요구해 왔던 것, 전쟁까지 불사하며 얻어내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백악관에서 텔레비전으로 이 소식을 지켜보던 백악관 참모와 군사 지도자들은 모두 크게 허탈해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나중에 공개된 백악관 회의실의 사진 장면으로 잘 전달되었다.) 이 상황은 마치 다음과 같은 우스개 소리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빵 하나를 놓고 다투었다. 결국 서로 있는 힘껏 한 대씩 때려 쓰러지는 사람이 빵을 포기하기로 했다. 갑이 을을 먼저 있는 힘껏 쳤다. 을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거의 쓰러질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을은 주먹을 우두둑 꺾으며 말했다. "이제 너 대!" 갑은 씩 웃으며 말했다. "빵, 너 묵어라..."


CNN 으로 중계되는 카터의 평양 소식을 듣고 있는 백악관 관리들.


물론 북한은 빵만 던져준 것이 아니라, 그 대가로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 콘소시엄인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 (KEDO) 가 그것이다.

김일성은 또 한국 대통령 (당시 김영삼) 과의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남북 분단사에서 처음으로 양쪽의 지도자가 직접 만나기 위한 날짜가 잡혔다. 한반도는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에서 대화와 화해 분위기로 갑자기 돌변했다.

카터와 김일성이 만난 지 3주 뒤에, 그리고 남북한 정치 지도자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던 날로부터 17일 전에 김일성은 82세의 나이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정상회담은 취소되었다. 미국은 김일성이 죽음으로써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겠다는 그의 약속이 공수표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했으나, 이는 북한 사회를 잘 모르는 미국의 또 한 가지 기우였다. 북한핵을 둘러싼 미북 협상은 급진전되어, 마침내 10월21일 양국 대표들은 제네바에서 일괄 타협안에 서명했다.


사진: Don Oberdorfer,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 2nd Ed (New York: Basic Books, 2001).

 

덧글

  • 메르키제데크 2005/10/16 16:54 # 답글

    당시에 불바다 발언으로 다큐멘터리도 제작 됬었지요. 다시 들어보니 당시의 위험이 느껴졌습니다. 사진이 참 현장감을 잘 살려주고 있군요
  • happyalo 2005/10/20 22:43 # 답글

    한바탕 난리였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네요.
  • deulpul 2005/10/27 06:02 # 답글

    메르키제데크: 달아주신 덧글 덕분에, 혼자 가만히 생각할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고맙습니다.

    happyalo: 625만 난리가 아니라 수시로 크고작은 난리군요. 불안해서 못살겠다고 해야 하나요, 스릴 넘쳐서 신난다고 해야 하나요... 한반도에서의 삶.
  • 잠곰 2005/11/15 16:10 # 답글

    - 내용이 인상깊어 트랙백해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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