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라힘 페레르, 깨우지 마라 섞일雜 끓일湯 (Others)

한 달 넘게 계속, 거의 매일 다큐멘터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을 보고 있다. 1백분짜리 영화를 매일 보고 앉았다면 미친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미친 건 아니다. 매일 들여다 보는 것은 저 영화에 나오는 노래 딱 한 장면이니까. 물론 시간이 넉넉하고 '삘' 받으면 그냥 내리 다 보기도 하지만.

이브라힘 페레르. 무슨 노인네가 이렇게 멋지단 말인가. 겉멋으로 멋진 게 아니라, 그 노인네의 풍상 깊은 얼굴과 목소리에 담겨 있는 그 말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멋지다. 같은 가수라도 수만기획형 가수에게서는 죽었다 깨도 찾아볼 수 없는 멋.




그 멋진 노인네가 똑같이 멋진 아줌마 오마라 포르투온도와 함께 노래한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내 뜰에는 꽃이 잠들어 있네
감송꽃과 장미, 백합
깊은 슬픔에 잠긴 내 영혼
내 아픔, 꽃들에게는 숨기고 싶네

인생의 괴로움, 삶이 내게 준 고통
꽃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내 슬픔을 알게 되면
꽃들도 함께 울 테니까

깨우지 마라, 모두 잠들었네
감송꽃과 백합
내 슬픔 꽃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내 눈물 보면 죽어버릴 테니까


('Silencio' 전문)

아아, 진정한 멋이란 몸뚱이에 걸친 한 켜 옷쪼가리나 금붙이, 혹은 무슨무슨 명품 같은 데서 나오는 게 아니다. 새카만 얼굴, 소박한 입성, 희끗하고 지저분한 콧수염, 이런 걸 다 가지고도 페레르는 멋지다. 윗도리 호주머니에 빨간 펜을 꼽고 녹음실 마이크 앞에서 삶의 고통을 노래하는 그의 목에 핏대가 은근히 내돋친다. 노래를 하며 주억거리는 그이의 얼굴은 온갖 노래와 이야기로 빽빽하게 차 있는 것 같다. 그는 목소리로가 아니라 얼굴로, 그 얼굴 뒤에 감추인 삶의 무게로 노래하는 것 같다.

노래 장면은 하바나의 허름한 녹음실과 암스테르담 공연장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공연장에서 노래가 끝나고 페레르와 포르투온도가 나란히 서서 관객에게 깊이 허리 굽혀 인사하는데, 페레르의 등에 얹힌 포르투온도의 손이 움직인다. 페레르의 등을 다독이고 있다. 아, 저 손짓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 존경과 감사와 조용한 격정과 자부심과 그리고 또.

고개를 숙인 포르투온도의 얼굴로 페레르의 손이 간다. 그 늙고 거친 손은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서툴게 닦는다. 아, 눈물, 그리고 그 눈물을 훔치는 손짓.

삶의 깊이와 무게는 이렇게 노래 한 자락에서도 울려 나오는 것인가. 꽃들이 시들까봐 고통을 애써 감추려 한다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얼굴과 몸짓에서 딱 가사 만큼의 고통과 억제가 배어나온다.

이런 게 노래다.


※ 사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중에서.

 

덧글

  • yaalll 2005/10/28 18:49 # 답글

    영화는 한 번 봤지만 그들의 음악은 자주 듣고 있습니다. 노래를 들어며 '깊이'를 배웁니다.
  • 비단풀 2005/10/28 23:04 # 답글


    언젠가 그사람하고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이 영화를 봄시롱 코끝이 시큰하고 눈꼬리가 척척해 오는데, 옆에 들키지 않으려고 두세두세거리던 기억이 있군요.

    가지고 있는 씨디에는 위에서 말한 노래가 없는 게 유감. 해도 이 포스트로 충분합니다. 옛말에 이야기는 거짓이 있어도 노래는 거짓이 없다는 말, 이런 경우를 말함인지 모르겠습니다

  • 이플 2005/10/28 23:46 # 삭제 답글

    저 장면, 저 노래
    눈물나게 멋지지요.
    아름답도록 멋진 그들!
    진짜를 만나면 영혼이 울립니다.
    들풀님 덕분에 지금 음악 찾아 듣고 있습니다.^^
  • Hikaru 2005/11/04 10:18 # 답글

    이름만 많이 들어보고 아직도 보지 못했지만.. 꼭 보고 싶어요.
    하지만 이미 감동을 느껴요.
  • 마라 2006/10/10 00:02 # 답글

    덕분에 다시 시디 꺼내 들었습니다. 어느곡부터 들을까요..
    노인네 돌아가시고 어느 채널에선가 다시 영화를 해주었는데
    볼때 마다 울고말아서 말이지요..
  • 에드립인생 2015/01/25 11:00 # 삭제 답글

    들풀님의 한글자 한글자 모두 동감하고 갑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쿠바의 넷킹콜을 생각하면서....
  • deulpul 2015/01/26 11:07 #

    덕분에 오랜만에 이브라힘 페레르 노래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은 힘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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