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우는 즐거움 섞일雜 끓일湯 (Others)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를 돌이켜 보면, 희한하게도 언제나 반에 좀 특이한 친구가 하나씩 있었다. 오대 독자로, 어릴 때 할아버지가 녹용을 너무 많이 먹인 나머지 몸은 청년이요 정신은 유치원생인 친구도 있었고, 체육시간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 꼭 옆으로 3박4일을 뛰어서 체육 선생까지 뒤집어지게 하던 친구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에는 시험 보면 꼴찌는 맡아놓고 하는 친구가 있었다. 담임 선생은 그 친구가 시험지에 자기 이름을 적어 놓는 것이 희한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평소 말도 없고 조용해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사는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가 반의 누구보다 탁월하게 잘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외우는 것이었다.

과목 중에는 암기 과목도 있으므로, 잘 외우면 그런 과목은 시험도 괜찮게 보련만, 이 친구가 외우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이 친구는 지하철 2호선 역들을 좔좔좔 외우고 나서, 다시 순서를 거꾸로 하여 좔좔좔 숨도 쉬지 않고 외웠다. 또 서울 시내의 모든 버스 노선을, 번호와 시발점-종점은 물론 회사 이름까지 붙여서 줄줄 외웠다. 예컨대 '84번, 우이동-흑석동, 동아운수' 같은 형식이었다. 정말 경이로운 기억력이었다.

자라면서 많은 것을 외워야 했다. 아마 내 생애 처음으로 죽어라 외워야 했던 것은 구구단이었을 것이다. 시골 교실의 나무 바닥에 초를 칠해 마른걸레로 문질러가며 합창하듯 외우던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삼 육, 이사 팔..." 의 그 인토네이션은 지금도 바로 재현이 될 만큼 생생하다. 이 구구단은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 때 나의 머리가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급히 자가진단하는 잣대가 되었다. 나는 어쩌다 의자가 뒤로 넘어져 뒷머리를 찧거나 무엇에 세게 부딪치거나 하면 무의식적으로 구구단의 7단을 외우는 버릇이 있다. 잘 외워지면 '아, 머리를 크게 다치지는 않았구나' 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하필 7단인 이유는 내가 구구단을 배울 때 가장 어려워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도 얼마나 맞아가며 열심히 외웠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줄줄 나온다. 애국가 4절은 물론이요, "흘러흘러 흘러서..." 로 시작하는 고등학교 교가 3절, "수헤리베비씨노오프네..." 로 시작하는 화학 주기율표나 "데아 데스 뎀 덴, 디 데아 데아 디..." 로 이어지는 독일어 정관사 변화 따위도 다 기억이 난다. 위대할손, 전체주의 주입식 교육이여!

그러고 보면, 버스 노선을 줄줄 외우는 그 친구처럼, 나 역시 암기 과목은 싫어하면서도 외우는 것을 은밀히 즐긴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노래 가사가 참 잘 외워지는데, 나는 노래가 좋아 '학이시습지' 를 수시로 하다보니 안외워질 도리가 없다고 자평하고 있다. 양희은의 '일곱송이 수선화' 에서 브라더스 포 의 'Seven Daffodils'로 나아가, 결국 국문 2절, 영문 3절을 함께 외우게 된 것은 노래가, 특히 가사가 좋았기 때문이었노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학교 입학 직전, 학과 선배가 될 장정들 손에 이끌려 따라갔던 비공식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배운 '농민가'에서 시작한 나의 노래 가사 외우기는 '삼태기 메들리'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전설의 그룹 강병철과 삼태기가 부른 '삼태기 메들리'는 메들리 인트로와 자신들의 곡 '행운을 드립니다'로 시작해 가요와 팝송과 샹송과 민요와 동요와 캐럴을 아우르다 'Bye Bye Love'로 대미를 장식하기까지 장장 21분에 걸쳐 연주되는 대곡 중의 대곡이다. 메들리에 동원된 노래는 모두 101곡. 그저 노래 부르는 사람들만 신나서 지지고볶고 떠드는 노래같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각 노래의 핵심 파트가 기막히게 절묘하게 이어져 있고 가사도 줄거리가 통하도록 연결되어 있다. 가히 천재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내가 이 노래를 외우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 처음 와서 좀 심심한 나날을 보낼 때였다. 처음엔 아무런 생각없이 입에서 떠돌았는데, 외롭고 쓸쓸한 길을 걷는 동안 이 노래는 어느새 나의 친구가 되었다. 깜빡깜빡 막히는 부분에서는 오기도 생겨서, 그예 누가 시키지도 않은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한 군데도 막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웅얼거리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래, 안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지금 '삼태기 메들리'는 내게는 말하자면 실용음악 같은 것이 되었는데, 달리기를 할 때 참 요긴하게 쓰이는 점에서 그렇다. 처음에 아주 천천히 달리며 몸을 풀 때, 이 노래를 입 속으로 조용히 부른다. 노래가 끝나는 시점에서 몸은 꼭 적당할 만큼 달아올라 있게 마련이고, 이제 제대로 운동을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삼태기를 마스터한 뒤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에 도전해봤으나, 싱거워서 재미가 없었다. 사연 많이 들어가고 가사 길기로 유명한 돈 맥클린의 'American Pie' 같은 노래는 정서가 와닿지 않아서 그런지, 잘 외워지지 않았다. 역시 '좋아져야 외워지고 외워지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로다'인 모양이다. 아니면, 매를 맞으며 외우지 않아서 그런지도.

무엇을 외운다는 것은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무언가를 자꾸 재생해 낸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잡다한 정보 속에 묻혀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다시 꺼내 맨 앞으로 내놓는 짓을 자꾸 하다보면 저절로 외워지는 것이다. 구구단이나 주기율표야 이젠 머리로가 아니라 입으로 외우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자꾸 외우려 했던 때는 생활이 나름대로 좀 괴롭거나 외롭거나 힘든 때였던 것 같다. 머리 속에 고민과 외로움이 퍼져나가기 전에 얼른얼른 '삼태기 메들리'로 공간을 채움으로써 잠시나마 위안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외우는 허무맹랑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 마약류에서나 볼 수 있는 환각 물질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겐 그런 것 같다. 외우면 어려움을 잠시 잊고 즐거워지니 말이다. 어린 시절, 버스 노선을 줄줄 외우던 그 있으나마나한 친구의 놀라운 능력이, 사실은 외롭고 힘든 생활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삼태기를 중얼거리며 홀로 길을 걷던 어느 날 뒤늦게 깨닫게 된 생각이었다.

 

덧글

  • 앨리 2006/01/10 04:44 # 답글

    길을 걸으시면서 중얼거릴 정도로 쓸쓸하신 겁니까? 놀러오셔요.
    반갑습니다. 앨리라고 합니다. 링크타고 놀러왔어요. 같은 땅위에 살고 계시는군요. 링크군 납치해 가려는데 괜찮을까요?
  • 윤사장 2006/01/10 10:13 # 답글

    중간에 독어 정관사 부분에서는 등골이 오싹- 정말 외우기 싫어하면서 외웠는데도 아직까지도 기억이 나요. 저는 구구단의 3단이 제일 어려워서 아부지께 엄청 혼났어요. 그래서 그 뒤는 좔좔- 금방 외우게 되었죠. 두려움 때문에.
  • anes 2006/01/10 11:28 # 답글

    '84번, 우이동-흑석동, 동아운수' ㅎㅎ
    글을 읽다 이부분에서 번뜩.. 했습니다.. ;;
    84번 자주이용했던 버스라.. 히히~ 지금은 같은노선, 동아운수지만
    152번으로 바뀌었죠..쌩뚱~!("")(..)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링크는 예전에 걸었고요..;;
  • 마른미역 2006/01/10 12:07 # 답글

    전 어째 외우는걸 너무 못해서;; 끄응;
  • ryan 2006/01/10 12:39 # 답글

    저도 외우는걸 좋아하는 편인데.. 암기과목도 강했고 중학교때부턴 베토벤 교향곡들을 외워서 휘파람으로 불고 다니곤하죠.. 첫 악장부터 끝까지.. ^ㅅ^;;
    대신 신은 공평한건지 어려서부터 수학이라면 질색.. ㅡㅗㅜ
  • 밤의여왕 2006/01/10 12:39 # 답글

    7단은 어려워요 정말. ㅎ
    저도 무언가를 외우는 걸 좋아하는데 친구들은 이해를 못하더군요.
    학창시절에도 주요과목보단 암기과목이 잘 나왔던;;
  • Initial_H 2006/01/10 13:12 # 답글

    외우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로군요. 글 잘봤습니다.'ㅂ'
  • 라엘 2006/01/10 13:27 # 답글

    외우기가 선척적으로 안되는 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구구단도 가물가물합니다. *-ㅅ-* 아하하. 부끄부끄.
  • Sprihc 2006/01/10 14:19 # 답글

    2호선은 저도 어렸을때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사람들이 다 신기해했었던..
    뭐 요즘은 심심하면 신용카드번호 외우기, 통장계좌번호 외우기 같은걸 하곤 해요;(이런거 외우다 보면 전화번호는 진짜 쉽게 외워지더군요;)
  • 시아 2006/01/10 14:39 # 답글

    후후; 구구단의 그 외우기 억양은 다들 비슷하군요!
  • 리드 2006/01/10 18:32 # 답글

    전 주로 무언가의 스펙(spec)을 외우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세가새턴의 CPU는 총 5개인데 메인 CPU인 SH-2가 2개고 CD-ROM 드라이브 제어용 SH-1이 1개, 그리고 다용도 사용이 가능하지만 프로그래밍이 어려워 새턴용 게임 개발의 난재로서 작용했던 DSP가 2개...라던가요;
  • 연어 2006/01/10 20:18 # 답글

    노래가 끝내주는데요? 어찌 다 외우셨답니까.....; 전 집전화부터 시작해서 영단어까지 다 못 외우고 살았는데 말이죠 ㅠㅠ
  • dudadadaV 2006/01/10 22:00 # 답글

    우리는 주기율표를 '수헤리베붕탄질산플레나마알규인황염아칼칼'로 외웠답니다. 중3때 담임이 과학선생님이었는데, 두 달 맞아가면서 빡시게; 외우고 아직도 안 까먹었음. -_-;;
  • iamsheep 2006/01/10 22:20 # 답글

    즐겁게 외울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에 반해, 즐거움 없이 강제로 외워야 하는 것도 있죠. 특히 후자도 해야 한다는 것은 '비극'일지도요 (...)
  • rumic71 2006/01/10 22:49 # 답글

    빌리조엘의 모 노래가 생각나는군요. 본인도 종종 가사를 까먹었더라는.
  • 2006/01/10 23:3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웃삽맨 2006/01/11 00:40 # 답글

    한국을 조진 백인의 개색히 들...버전으로 외워보세요..김구라 황봉알이 부른거에요..
  • 고주연 2006/01/11 00:50 # 답글

    저는 몇 년째 양희은의 <백구> 를 외우고 있어요.
  • akakn 2006/01/11 04:13 # 답글

    저도 뇌세포 확인할때 구구단을 외운기억이 있네요 하하..
  • deulpul 2006/01/11 07:24 # 답글

    앨리: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납치하신 링크군을 인질로 하여 보상을 요구하셔도 협상에는 응하지 않겠습니다. 데려가신 이상 앨리님 거에요, 하하-

    윤사장: 3단도 어렵습니다, 정말. 독일어, 부정관사도 있었는데요... 아인, 아이네스, 아이넴, 아이넨... 크흐흑.

    anes: 그 84번을 자주 타셨군요. 저는 가끔 탔는데, 혹시 버스에서 뵈었을지도...

    마른미역: 창의력이 뛰어나셔서 그래요...

    ryan: 헙... 삼태기보다 훨씬 엘레강스하시네요... 저도 도전해볼까부다...

    밤의여왕: 7단에 좌절한 동지여, 반갑습니다, 하하-

    Initial_H: 고맙습니다.

    라엘: 역시, 창의력이 뛰어나신 거에요...

    Sprihc: 아, 전 전화번호처럼 쓸데 있는 것은 죽어라 안외워져요. 가끔, 누군가 제 전화번호를 물어보면, 멍- 해집니다. 무척 바보같아지는 순간.

    시아: 네.. 진양조로 시작해서 중모리, 중중모리를 거쳐 "구구 팔십일!" 의 휘모리로 마감하는 희대의 명작 악장가사, 구구별곡.
  • deulpul 2006/01/11 07:25 # 답글

    리드: 허이구, 외우긴 고사하고, 써 두신 걸 읽는데도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하하-

    연어: 역시, "안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 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끄응... 전화/영단어 안되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인데... 노력을 안해서 그런 것이 들통났군요.

    dudadadaV: 역시 아름다운 기억의 꽃은 눈물과 빳다 속에서 피는 것일까요. 제가 외운 "수헤 리베 비씨노오프네 나마알시피 황염아 가카가게 에세브로크" 는 그 속에 나름대로 스토리가 있답니다. 띄어쓰기를 주목해 주세요, 하하-

    iamsheep: 정말 그래요. 싫은데 맞아 가면서 외운 것과 좋아서 자발적으로 외운 것 중 어느 게 오래 가나도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rumic71:아참, 빌리 조엘도 가사가 좋아서 쓰러지는 가수 중 하나인데, 그의 <Piano Man> 도 맨 마지막 가사가 너무 좋아서 한때 시도해본 작품이어요. <New York State of Mine> 은 성공하고 피아노 사나이는 실패. 설마 그건 아니겠죠?

    비공개님: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누구셩? 짐작이 맞는 건가...) 건강하시죠?
  • deulpul 2006/01/11 07:26 # 답글

    웃삽맨: 하하하- 그건 도대체 김양 이양 최양이 너무 많이 나와서 도무지 외울 엄두가 안났어요. 제가 들었던 건 실명 안나온 맛뵈기 버전이었거든요...

    고주연: 아, 것도 가사가 만만치 않네요. 막 다음 과제를 주시는군요...

    akakn: 네, 같은 방법을 쓰시는군요. 이 방법의 한 가지 단점은 머리를 크게 다쳐도 그냥 괜찮은 것으로 오진할 수 있다는 것... 하하-
  • 여행자 2006/01/11 07:26 # 답글

    전 노래가사를 진짜 못 외웁니다. 근데 생각해보니 못 외우는게 아니라 한번도 외워본 적이 없더군요. 너무 많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외우게 된 김광석 노래를 제외하고는 노래를 듣지도 외우지도 않으니 노래가사를 알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올해는 쓸만한 노래 몇 개는 가사외우기를 해봐야겠습니다.
  • deulpul 2006/01/11 07:31 # 답글

    추천~ 시처럼 좋은 가사를 가진 곡을 골라 보세요. 시를 외워도 좋겠죠? 귀여운 분이 쓴 시 말구요...
  • 가즈파쵸 2006/01/11 10:30 # 답글

    삼태기 메들리..아버지가 좋아하셔서 테입으로 주구장창 들었던..하하하
  • 날아라바비 2006/01/11 22:34 # 답글

    외우기를 잘한다고 반드시 "머리가 좋은"것은 아니죠.
    (보통은 머리나쁜 사람이 외우는 것도 잘 못하지만...)

    "외운다"는 것.
    꽤 철학적인 행위였군요 ^^
  • deulpul 2006/01/13 11:52 # 답글

    가즈파쵸: 높은 예술성을 지니신 아버님을 두셨군요...

    날아라바비: 아앗 그렇죠. 잘 외운다고 머리 좋은 것도 아니고, 잘 못 외운다고 머리 나쁜 것도 아니고. 외우다와 머리와는 별로 관련이 없나봐요... 그냥 한 기능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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