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하트 가치관 지도 갈硏 궁구할究 (Study)

지구 위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은 기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물론 가장 보편적인 것은 지리 생김새에 따라 구획을 나눈 지형도가 되겠다. 경제력을 기준으로 하여 지도를 만든다면 섬나라 일본은 실제보다 크기가 무척 커질 것이고, 인구 수를 기준으로 하여 지도를 만들어도 지형 생김새와는 꽤 다른 지도가 나올 것이다. 옛날 지도에는 자기가 사는 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한 당시 사람의 가치관이 잘 나타난다.

2002년에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와 웨인 E. 베이커(Wayne E. Baker)는 지구상의 여러 사회와 문화권을 그 구성원이 가지는 가치관에 따라 표시한 지도를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지도가 나왔다. 이른바 '잉글하트 가치관 지도'다. (원 논문 pdf는 이곳)




이 지도에서 세로축은 해당 사회가 얼마나 전통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있나를 나타낸다. 지도에서, '전통적 가치'라고 되어 있는 아랫쪽으로 갈수록 종교와 같은 전통 가치의 영향이 큰 사회이며, '비종교적이고 이성적 가치'라고 되어 있는 윗쪽으로 이와는 반대다. 아랫쪽 사회에는 종교의 영향이 크고 전통 가치가 보존되어 있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강조되며, 권위에 복종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혼, 낙태, 안락사, 자살 같은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높으며, 국수주의적인 성격도 있다. 위로 갈수록 '비종교적이고 이성적 가치' 사회인데, 이 사회는 모든 것이 전통적 가치 사회와는 반대다.

가로축은 해당 사회 구성원의 삶에 대한 태도를 수치화하여 나타냈다. 이 기준을 만든 주요한 배경 요인은 경제 발전 정도. 아직도 먹고 살기에 허덕대는 나라들은 지도 왼쪽의 '생존 가치' 쪽에 가깝게 된다. 반면 산업화가 진전되어 먹고 살 만해진 결과, 당장 끼니보다는 웰빙, 자기 표현 같은 것에 더 치중하면 오른쪽의 '자기 표현 가치'에 가깝게 된다.

통계적으로 분석해보니 이들 두 가치 기준은 국가간 차이의 70% 이상을 설명해 주었으며, 다른 측정 항목과도 높은 상관관계를 나타냈다고 한다.

이 지도에서 몇 가지 시사점을 볼 수 있다. 어떤 사회가 먹고 살 만해졌다는 것은 단순히 배가 부르게 됐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가치까지 크게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혹은, 먹고 살게 되면서 생각도 크게 바뀌게 된다. 산업화가 진전되면 해당 사회는 지도 아랫쪽에서 윗쪽으로 이동한다. 잉글하트와 베이커에 따르면, 산업화된 나라 거의 모두가 '전통 가치'에서 '비종교적이고 이성적 가치'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고 한다.

이런 차원의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어떤 사회가 산업화를 마치고 지식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방향, 그러니까 지도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기 표현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자기 표현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라고 해서, 남을 짓밟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기를 쓰거나,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아야 자신의 가치가 표현되고 인정된다고 생각하는 사회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같은 행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처절한 '저요, 저요' 의식은 차라리 왼쪽 끝인 '생존 가치'에 더 가깝다. 이 기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물질주의적 가치관과 후물질주의적(postmaterialistic) 가치관을 구분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 사회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삶을 옥죄는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 높은 가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자기 삶에만 매몰돼 살던 구성원들은 자신 말고 이웃과 주변에 눈을 돌리게 된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시작한다. 사회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려는 욕구도 늘어나게 된다. 외국인이나 동성애자처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해도 늘어난다.

교육에서 강조하는 가치도 '무조건 죽어라 외어!' 식에서 상상력과 상대방을 포용하는 능력이 중시되는 식으로 바뀐다. 물론 이런 사회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도도 높다고 한다. 서로 믿고 사는 사회인 것이다. 결국 이런 것들이 종합되어, 오른쪽 사회는 신뢰와 관용을 근간으로 하고 개인의 자유와 표현을 중시하며 활발한 정치, 사회 참여가 벌어지는, 말하자면 현대 정치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의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이다.

지도를 보면, 밝은 노랑색으로 표현된 위-오른쪽 지역에는 북유럽 국가들이 모여 있다. 부러운 놈들이다. 맨 끝에는 스웨덴이 있다. 그 아래 진노랑색은 그보다 좀 종교색이 강하고 전통 가치에 지배받는 나라 그룹이다. 영어권 국가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뉴질랜드와 호주의 위치가 좋다. 미국은 꼴통들이 있어서인지, 좀 아래로 내려갔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사회적으로 불안과 혼돈을 겪는 곳은 좌상의 '가치관 공백' 지역과 우하의 '가치관 충돌' 지역인 것 같다. 공백 지역은 전통 가치가 사라진 뒤 이를 대체할 근대적 가치관이 아직 자리잡지 않은 상황이고, 충돌 지역은 두 가지가 공존하면서 갈등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백 지역에는 주로 동유럽 출신 구 공산 국가들이 있고, 충돌 지역에는 남미 국가들이 존재한다.

그림을 보면 사회과학적 지표를 종합하여 만든 지도이기 때문에 꽤 설득력이 있다. 기준 자체에 대한 규범적 질문이 있을 수 있고, 비슷한 나라들을 범주화하여 묶는 데서 좀 무리한 모습도 보이지만, 여하튼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지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어디에 있나? 한국은 세로축에서는 정상급 위치를 차지하지만, 가로축에서는 중간에도 못간다. 다시 말하면, 전통 가치는 내다 버린 지 오래지만, 아직 물질주의적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는, 허우대만 자라난 가출 청소년 같은 모양이다. 같은 구역으로 묶이긴 했으되, 오른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과 좋은 대조가 된다. 아마 한국은 아래에서 위로는 초고속으로 급상승했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는 도무지 요지부동하고 움직이지 않는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나라는 그렇다 치고, 그 속에 사는 당신과 나는 또 어디쯤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 그림: World Values Survey

 

덧글

  • 덧말제이 2006/08/29 10:56 # 답글

    정말 꽤 설득력이 있네요. 눈으로 보기만 해도.
    이 여름 두 나라를 다니면서 느낀 느낌이 마지막 문단에 요약되어 있는 듯합니다.
    일본에 가서는 우리가 일본을 따라 잡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멀었구나 했습니다.
    반면 러시아에 다녀와서는 우리가 전통은 많이 버렸지만 경제적으로는 훨씬 나아졌구나 했지요.
  • sivvy 2006/08/29 10:58 # 답글

    스웨덴에서 남녀 불평등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IKEA광고에 여자가 더 적게 나온다는 거였다는 말을 듣고 웃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랐지요. ㅡㅡ;;
  • deulpul 2006/08/29 13:59 # 답글

    덧말제이: 잘 다녀오셨으리라 믿습니다. 가까이에 러시아 친구가 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이 분 어머니가 한 때 한국 주재원 집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 들었을 때 가슴이 덜컹 했는데, 다행히 좋은 사람들이었던지 한국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신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 러시아로 밀려가던 초창기에 벌어진 일을 러시아 사람 시각에서 본 박노자 글은 정말 뼈아팠습니다. 먼먼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라고 믿고 싶습니다.

    sivvy: 그렇게 사회 전체가 일상적 불평등에 예민하게 되고 서로 조심하게 되는 경지가 바로 그 쪽 동네의 저력인 모양입니다. 어떤 나라나 모든 점에서 다 잘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말이 되는 사회는 그런 모양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어찌 살겠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익숙해지면 오히려 그 전엔 어찌 살았나 싶게 될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가 그렇듯이.
  • capcold 2006/08/30 16:29 # 삭제 답글

    !@#... 서두에 경제력 기준 지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이트 하나 소개합니다. 월드매퍼(http://www.sasi.group.shef.ac.uk/worldmapper/index.html)라고 하는데, 경제력이라든지 하는 각종 주제에 따라서 국가들의 영토 크기를 변형시킨 지도 제작 프로젝트죠... 특히 toy 수입과 수출 지도 두개를 놓고 비교해보면 안습.
  • Hikaru 2006/08/31 23:40 # 답글

    재미있는 도표네요. 이런 것도 있군요. 개인적인 나는 어디쯤에 있을지...-.-
  • R_H_Ryu 2006/09/01 00:05 # 답글

    한국인들은 벌써 다 망각해 버려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이 '전쟁과 데모'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스스로도 잘 모르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살아남기'게임.... 그런데 위 지도에 '유태인'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네요..
  • Cynicienne 2006/09/01 04:32 # 답글

    제 눈에는 카톨릭 유럽, 프로테스탄 유럽으로 나뉜게 참 신기해 보이네요. 이게 구교, 신교 그거 맞죠?
  • 2006/09/04 16:5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6/09/06 06:03 # 답글

    capcold: 정말 경제력이나 인구를 기준으로 만든 지도가 있네요. 재미있는 사이트 알려주셔서 감사-.

    Hikaru: 음... 저 점수를 산출하는 설문 항목 알려드려요? 하하-.

    R_H_Ryu: 그런 것 같습니다. 역시 현재는 과거의 결과겠죠. 지도는 종교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기보다, 나라들을 배열해 놓은 뒤 비슷한 넘들끼리 묶다 보니 저렇게 된 것 같습니다.

    Cynicienne: 네, 이것도 그 나라들이 카돌릭 국가라거나 프로테스탄트 국가라기보다, 이 나라들을 관통하는 특징을 그러한 묶음으로 묶은 것 같습니다. 여하튼 특이하게 보이네요, 정말.
  • deulpul 2006/09/07 17:08 # 답글

    비공개님: 다시 보실지 모르겠습니다. 뜻은 고맙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응하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답이 늦어 미안합니다.
  • 코운 2015/06/19 05:06 # 삭제 답글

    한밤중에 우연히 돌린 채널에서 bbc다큐를 보다가 '스턱스넷'이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이게 뭘까 이렇게 저렇게 검색해 보던 중에 블로그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결국 밤을 새고야 말았네요. ㅎㅎ
  • deulpul 2015/06/20 00:23 #

    이렇게 스턱스넷은 이란의 핵시설뿐만 아니라 한국의 듣보잡 블로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하하. 부디 귀한 시간을 낭비하게 해 드리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 코운 2015/06/20 01:10 # 삭제 답글

    밤이 새는지도 모를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 deulpul 2015/06/20 23:21 #

    (사람마다 취향이 다양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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