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조(返照) 섞일雜 끓일湯 (Others)

봄병이 은근히 불어오는 남풍에 수줍은 듯 터지는 꽃망울에서 비롯된다면, 가을병은 찬 바람 드나드는 휑한 가슴에 울긋불긋한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시작하는 것 같다. 대지를 뚫고 솟아나는 생명의 힘도 놀라운 것이지만, 땅에서 올린 것을 다시 땅으로 돌리며 삼라만상을 겸허하게 만드는 스러짐의 힘도 만만치 않다. 낙엽(落葉), 쇠락(衰落), 조락(凋落), 영락(零落)... 가을의 대기를 온통 채우는 온갖 떨어짐[落]의 이미지에 요요히 항거하기란 쉽지 않다. 하는 수 없다. 또 잠깐 가을병을 앓아줘야 할 때인 것이다.

갑자기 다가온 서늘한 바람은 온몸 구석구석의 터럭을 일으켜 세우듯 온몸 구석구석에서 센티멘털리즘을 끌어낸다. 계제에 잠깐 염세도 했다가 실존도 했다가 회의도 했다가 하며 오랜만에 자기 안을 몇 바퀴 돌아보게 된다. 봄꽃보다 붉은, 서리 내린 이파리를 들여다보며 열두 달 세월 중에 잠깐 감상에 몰입할 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계절의 변화가 주는 아픈 선물이 아닐까 싶다.




열 시간 가까이 북쪽을 흘러 다녔다. 탐하는 눈 때문에 발이 바빴다. 사실은 차가 바빴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그저 길을 밟아다니는 여행에 점점 익숙해져 간다. 덕분에 엉덩이는 점점 iron butt이 되어 간다. 다른 때는 몰라도, 가을엔 그 수밖에 없는 듯도 하다.

한해살이 녹음(綠陰)의 황혼기에 남에서 북으로 적당한 거리를 올라가자면, 장년의 원숙한 푸르름에서부터 한 해 동안 자신을 키웠던 가지를 떠나 한낱 풍진으로 돌아가는 종멸의 순간까지 모두 목격하게 된다. 개중에는 서둘러 붉어진 놈도 있고, 제대로 색을 피우지 못하고 누렇게 뜬 채 늙어가는 놈도 있으며, 이미 소멸할 때가 지났는데도 기어코 가지를 붙들고 있는 놈도 있다. 삶은 다양했으나, 바람 한 점 소소히 불어오고 그 끝에 찬 비라도 한 줄기 내린 다음이면 모두 같은 곳에서 같은 모양으로 죽음을 살고 있게 될 것이다.

뱀허리 같은 숲길 끝에 갑자기 나타난 조용한 마을은 꼭 속리산 초입의 그 마을을 닮았다. 도시 사람에게는 낯설게만 보이는 턱없이 너른 길도, 한적한 분위기도, 지나치는 사람의 미소도 아주 흡사하다. 대체로 산이나 숲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산이나 숲을 닮아가고, 그로써 서로서로도 닮아가는 모양이다. 아주 먼 곳에서 아주 오래 전을 갑자기 회상시키는 이 닮음은 또 새로운 통증을 잠깐 안겨주고 냉큼 사라진다.

서늘한 달을 등지고 들어와 자리에 누우니, 달 크기만큼으로 동그랗게 휑한 마음 속으로 낮에 보았던 붉고 노란 잎들이 날아든다. 가을을 심하게 앓던 청소년 때에는 낮에만 많이 아프고 잠은 정신없이 잤건만, 이제는 낮이나 밤이나 비슷하게 아주 은근히 아프다. 참 이상하다. 눈은 행복하되 마음은 아픈 계절이다. 저녁빛에 스스로를 한없이 비추어보다, 결국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지고 마는 낙엽 탓인지. 아서라, 이렇게 부끄럽게도 잘 살고 있는데.

 

덧글

  • 덧말제이 2006/10/08 21:17 # 답글

    어찌 이리 글을 잘 쓰시는지...
  • 연필광대 2006/10/08 22:08 # 답글

    deulpul님이 따로 출처표시가 없는 것을 보니, 직접 촬영하신 사진인가 보네요?
    눈은 즐겁되 마음은 아픈 계절....정말 맞고요~
    한가지 덧붙이자면 마음은 바쁘되 실은 없는 계절이기도 하죠. ^^
    먼 곳에서 한가위는 잘 보내셨나요? 콩넣은 우리집표 송편이라도 날려드리고 싶네요.
  • 이플 2006/10/09 01:21 # 삭제 답글

    아, 가을이군요.^^
    가을이 오면 아니 정확히 11월이 오면 이따시만하게 구멍 뚫린 가슴
    시리게 안고 살지만 역시 난 봄이 더 아프다오.
    가을병을 지대로 전염시키는 듯한 들풀님 글을 읽다보니
    저도 어째 슬슬 가을병을 앓아줘야할듯..^^
  • deulpul 2006/10/09 08:56 # 답글

    덧말제이: 성은이 망극하여 소녀 몸둘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연필광대: 정말, 마음만 바쁘면서도 실이 없기도 합니다. 이번 10월 다 가기 전에 실 하나 찾아야 할텐데 말이죠... 흑, 콩송편... 주소 적습니다? 하하-.

    이플: 일부러 그러실 필요는 없고, 살살 넘어갈 수 있으면 그게 최고죠. 하지만 별루년년첨홍파, 해마다 적당하게 아플 일이 새로 생기니 그게 그냥 그렇습니다.
  • wenzday 2006/10/09 13:22 # 답글

    너무나 좋은 글..사진 역시. 문득 그리움이 물이 솟습니다. 가을은 가을이네요.
  • deulpul 2006/10/09 16:11 # 답글

    금방 겨울 올테니 마음 여미기도 일찌감치 준비하시구요.
  • 안수호 2006/10/09 16:27 # 삭제 답글

    다녀 오셨군요. 혹 캠핑까지 하신건가요? 그럼 정말 부러운데... 유독 짧은 북쪽의 가을 잘 보내세요.
  • alto 2006/10/09 16:40 # 삭제 답글

    슈피리어 호인가요? 정말 가셨군요.
  • deulpul 2006/10/09 17:01 # 답글

    안수호: 음... 얼어 죽을까봐서 냉큼 돌아왔습니다. 안수호?님도 든든하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alto: 이름에 수퍼자를 달고 있는 물은 물결도 더 크지 않으려오? 그 좀 못 미쳐, 그냥 이름 없는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 본 그림이우.
  • 달속토끼 2006/10/15 15:24 # 답글

    정말 예쁜 사진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확대인화해서 벽에 걸어놓고 싶군요.
    도저히 그냥 떠날 수가 없어서...
    좋은 사진을 보여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을 이렇게 짤막하게나 전해봅니다.
  • deulpul 2006/10/16 13:52 # 답글

    발로 찍은 걸 예쁘게 봐주시니 창피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릴까봐요...
  • susanna 2006/10/16 18:15 # 삭제 답글

    이 멋진 사진을 '발로 찍었다'하시면....멀쩡한 두손으로 엉망진창 사진이나 만들어내는 숱한 블로거들은 어찌 살아가란 말입니까....어흑~ㅠ.ㅠ 글도 정말 좋습니다. 잘 봤다는 말 남기고 싶어 부러 들어왔다 갑니다~~~
  • deulpul 2006/10/17 03:29 # 답글

    흡... 숱한 블로거님들이 박장대소하거나 비웃으십니다. 돌도 날아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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