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소년사 4: 문지르며 싸우는 어른들 연결連 이을續 (Series)

자라면서 이런 장면은 언젠가 한 번은 목격하게 된다. 시간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경우는 지나치게 일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년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닌 것은 전에 밝힌 바와 같다. 그 중 인천 부평에 잠시 살았을 때다. 부평 시절은 삼 개월 정도였으며, 따라서 선생님하고도, 급우하고도, 교정의 플라타너스 나무하고도 친해지기 전에 다시 떠나야 했다.

학교에서 벌어진 일로 소년이 기억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껏해야 방과 후 몇몇 아이들을 따라, 높은 송전탑이 줄지어 늘어선 야산에 놀러갔던 기억 정도다. 송전탑에 귀를 대면 아득한 곳으로부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건너 편 산등성이에서 아롱아롱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송전탑의 윙윙 소리와 박자를 맞추었다. 아롱아롱 윙윙, 아롱아롱 윙윙.

아마 소년은 부평의 학교를 조금 재미없어 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여학생 중에서 기억나는 여학생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삼 개월이면 친한 동무를 사귀기에는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착하고 예쁜 여학생을 하나 점찍고 저 혼자 좋아하며 신나게 학교 다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무언가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렇듯 심심했던 학교 생활과는 달리, 적당히 번화한 부심지에서 벌어지는 동네 생활은 긴장과 흥분의 연속이었다. 집 근처에서는 재미있는 어른들이 벌이는 재미있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바야흐로 산 교육의 현장이라 할 수 있었다.

소년이 살던 집은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길에 있었는데, 바로 옆집은 여인숙이었다. 소년의 가족은 원산에서 월남했다고 하던 주인 할머니랑 친하게 되었으며, 덕분에 소년은 이 원산여인숙을 자기 집 드나들듯 오가며 놀 수 있었다. 이 집에는 방들이 오밀조밀 많았으며, 이 방들에 손님히 빼곡히 차는 날은 거의 없었다. 소년이 밤에 이 집에서 놀아본 적은 없었으므로, 낮에만 그런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낮에는 언제나 빈 방들이 많았고 구조도 복잡하게 되어 있어서 들어가 놀기 딱 좋았다. 이 집에는 휴학중인 대학생 아들이 있었는데, 이 형이 소년과 잘 놀아주었다.

그 날도 소년은 언제나처럼 이 집에서 대학생 형과 무엇인가를 하며 놀고 있었다. 갑자기 후둑후둑 비가 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 해도 하늘이 맑았는데, 소나기였을까. 형은 빨래를 걷으러 나가면서, 집 가운데 광으로 쓰던 조그만 건축물 옥상에 올라가 작은 화분들을 내려놓으라고 부탁했다.

이 여인숙은 마당이 좁은, 전형적인 도시 뒷골목형 숙박 시설이었다. 촘촘히 붙은 방들이 작은 광을 둘러싸고 ㄷ자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 광의 나즈막한 옥상에는 장독이며 화분 따위가 올라 있었다. 여인숙 방의 창문 대부분은 이 옥상을 향하여 나 있었다. 시멘트 계단을 밟고 이 옥상에 올라가 작은 화분들을 내려놓는 것이 대학생 형이 소년에게 부탁한 일이었다.

분꽃이 피어 있는 화분을 하나 내려오고 두 번째를 가지러 올라갔을 때다. 어떤 방의 나무 창틀 가까이 놓인 화분을 들고 일어서려던 소년은, 웬 어른 남녀 둘이서 옷을 벗고 싸우고 있는 장면을 창 안으로 목격하였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두 어른이 소리도 지르지 않고 한창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소년은 창 안으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기도 했고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이야 온갖 시청각 교재가 발달한 터라, 초등 1년이라도 알 것 다 아는 세상이지만, 당시 티없이 순진하던 소년의 눈에는 참으로 낯설고 흥미로우며 일견 의아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장면을 목격한 소년이 제일 처음 떠올린 단어는 '문지른다' 였다. 왜 싸우는데 때리지 않고 문지르지? 옷은 왜 다 벗고 싸우지? 뭔가 이상하다... 뭔가 이상해.

그러는 와중에도 소년은 예닐곱 개나 되던 작은 화분들을 모두 차례차례 갖고 내려와 지붕 안쪽으로 옮겨 놓았다. 화분을 가지러 갈 때마다 확인해 봤는데, 어른들은 여전히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무척 화가 났는지, 화해할 생각은 도무지 없는 것 같았다.

소년은 화분을 모두 옮기고 나서 다시 안채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대학생 형이 먼저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냐? 어... 형, 저기 방에서 두 사람이 싸워. 막 문지르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기껏 스무 살 안팎 대학생이었는데도, 그는 상황을 매우 잘 처리했다. 그는 소년에게, 네가 방금 본 것은 어른들이 아기를 낳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취지의 설명을 간단히 해 주었는데,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소년은 즉각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뒤 상당 기간 소년을 지배한 '어른들은 아기를 낳으려면 문지르며 싸워야 한다'는 갈등주의적 세계관은 이렇게 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초등학교 4학년에 이르러, 동무와 치열한 논쟁 끝에 '어른들은 아기를 낳지 않으려 해도 문지르며 싸워야 한다'로 확장되었다. 동시에, 무엇을 하지 않으려 하는 무작위를 위해 어떠한 인위적 노력을 수반해야 하는 모순이 왜 성립하는 것일까 하는 철학적 의문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가족은 곧 부평을 떠났다. 소년의 어머니가 맹모삼천지교의 덕을 발휘하여서인지, 아니면 마침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이어서인지는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소년은 부평을 떠났지만, 초여름 어느 날 빗방울을 맞으며 본, 액자 같은 작은 창틀 안에서 벌어지던 어른들의 치열한 싸움 장면은 그 뒤 꽤 오랫동안 소년을 따라 다녔다. 혹자는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맞닥뜨린 충격적 장면이 소년의 의식과 무의식에 길게 꼬리를 드리우고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그저 누구나 겪는 성장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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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기불이 2007/02/17 00:34 # 답글

    다음 편에는 소년이 문지르며 싸우는 장면이 나올 것만 같습....;;;
  • 끼야오 2007/02/17 00:38 # 답글

    제가 어렸을 때는 '자기 방'을 갖고 있는 친구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남매인 경우에는 누군가가 부모님과 함께 잠을 자야했는데요, 가끔은 소년과 비슷한 경험을 한 친구들이 나오곤 했지요. 무덤덤하다는 애들도 있고, 징그러워 부모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는 애들도 있었지만, 어쨌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듯 하더군요.

    아, 처음 덧글 쓰는데 인사드립니다. ^^ 링크 추가 괜찮죠?
  • deulpul 2007/02/17 05:32 # 답글

    기불이: 하하하-. 명랑소년사 3649 편에 나오게 되겠습니다...

    끼야오: 반갑습니다. 어린이들 처지에서도 참 난감하죠. 언젠가 알긴 알아야 하는 일인데, 타이밍이 어렵습니다. 모르는 척해도 다 아는 어린이를 만드는 한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링크, 트랙백, 덧글은 방문하시는 분의 권리~.
  • 노아 2007/02/20 02:52 # 답글

    앗~ 저 부평 살아요~ 3개월 밖에 안 계셨다는데도 괜히 반갑네요~

    덧글은 처음 다는데, 사실 자주 들러보고 있습니다. 명랑소년사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 Miren 2007/02/20 03:12 # 답글

    다들 문지르며 싸우는 것을 한번 쯤 보신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전 여전히 가장 정석적이고 무난한 영상 매체로 통해서 봤었죠;
    ...사실 처음 볼땐 무서워(?)서 못봤지만...
  • deulpul 2007/02/20 13:36 # 답글

    노아: 오, 잠깐이지만 소년과 거의 동향이시군요. 소년도 두 배로 반가워할 것 같습니다, 하하-.

    Miren: 맞아요. 무서워요, 무섭습니다. 옛말에도 이르기를 "띠띠띠띠띠 띠띠띠띠띠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 MCtheMad 2007/02/20 15:37 # 답글

    그렇지만 사실, 소년의 친구들은 소년을 부러워 했을것 같습니다 :D
  • deulpul 2007/02/21 04:47 # 답글

    동심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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