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토론이나 논쟁이 사람 간의 의견 차이를 해소해 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많은 경우, 토론은 서로의 의견 차이를 확인해 주는 정도의 결과밖에 거두지 못한다. 토론의 주제가 되는 문제에 대해 토론 당사자가 강한 주장을 갖고 있을수록 그렇다. 생각해 보면, 토론이나 논쟁이란 대부분 강한 주장끼리 만날 때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장이 강할수록 토론을 통해 의견을 모으는 일은 힘들다. 결국, 토론이나 논쟁은 본질적으로 이견을 좁히고 견해를 일치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예컨대, 나와 다른 강한 주장을 갖고 있는 친구와 술자리에서 논쟁하여, 그를 설복시켜 본 적이 있는가? 거꾸로 내가 그의 주장에 설복되어 본 적이 있는가? 혹은 트랙백과 덧글을 총동원하여 벌어진 온라인 논쟁에서 결국 의견이 일치하는 형태로 논쟁이 마무리된 적이 있는가? 혹은 이보다는 조금 점잖은 형태로, 신문이나 잡지 같은 출판물에서 종종 벌어지는 논쟁 역시, 양측이 공방전을 벌이다 결국 당신 말이 옳소! 하고 논쟁이 마무리되는 경우가 있는가? 없진 않아도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다른 사람이 이를 이해하여 주거나 수용해 주거나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표현하는 사람이 갖게 되는 당연한 기대지만, 토론과 논쟁을 통해 나와는 다른 주장을 갖고 있는 상대방이 내 의견을 접수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라 할 수 있다. 오히려, 토론의 가치는 이견을 일치시키기보다, 이처럼 서로의 주장과 의견을 명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토론이 주는 가치와 효용의 극대점일지도 모른다.
에셔의 판화를 다시 보자. 그림에서 한 남자, 즉 에셔는 도서관이나 서재처럼 보이는 곳에 앉아, 거울처럼 반사되는 공을 들고 있다. 구의 특성상, 에셔의 주변 상황이 마치 어안렌즈에 찍힌 것처럼 압축되어 공 속에 들어 있다. 네 벽과 천장, 바닥까지 모두 투영된다. 공을 들고 있는 손 뒤의 회색 배경은 말하자면 이 서재의 한쪽 벽일 것이다. 지금 에셔는 서재의 한쪽 벽 가까이 딱 달라붙어서, 이 벽을 마주보며 반사형 공을 들고 있는 것이다.
에셔는 공을 보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혹은 자기 자신의 뒤에 있는 배경이다. 자신의 앞에는 이처럼 반사하는 공이 있고, 그 뒤로 벽이 있다. 에셔가 벽을 마주대하여 아무리 공을 자세히 들여다봐도, 보이는 것은 공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에셔의 눈은 그 반사형 공의 중심에 정확히 놓이게 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에셔의 양미간의 중심과 공의 중심이 일치하게 되어 있다.
이 그림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한 가지 이치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 준다. 우리는 세상을 보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어떠한 쟁점에 대해 다양한 근거와 증거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드러내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에셔의 그림에서 공을 든 손 뒤로 보이는 배경에까지 주목하고 싶다. 이것은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다. 그는 벽처럼 견고한 의견을 갖고 있다. 그를 마주하여 어떤 이슈(공)을 놓고 토론을 벌인다면, 그 공을 중심으로 하여 그가 보는 것은 그 자신 쪽의 절반일테고(결국 그 자신) 내가 보는 것은 내 쪽의 절반이다(결국 내 자신). 서로의 옆으로 와서 나란히 앉지 않는 한, 다시 말하여 애초부터 이견의 정도가 크지 않는 한, 두 사람이 같은 쪽을 보기는 불가능하다.
같은 영화, 정반대의 평가
다음과 같은 경험이 있으실 것이다. 어떤 영화를 보고 났는데,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을 만났다. 나는 별 다섯 중에 네 개 반을 주고 싶은데, 그는 형편없는 쓰레기 영화라고 주장한다. 그와 나는 정말 같은 영화를 본 것일까.
이것은 같은 영화를 본 것은 틀림없지만(동일한 객체), 본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다른 주체). 마치, 같은 공을 쳐다보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반사되는 내용물이 달라 보이는 것과 같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조금 오래 된 영화 하나. 스파이크 리 감독이 만든 명작 <똑바로 살아라> (Do the Right Thing)는 미국 사회에 깔려 있는 예민한 인종 문제를 다룬다. 영화는 흑인과 유럽계 백인, 한국인 같은 동양인까지 어울려 빚어내는 인종적 갈등과 비극을 그리고 있다. 브렌다 쿠퍼라는 커뮤니케이션 학자는, 이 영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흑인과 백인 사이에 차이가 있지 않을까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와 경험, 선지식에 근거해 똑같은 대중 문화(여기서는 영화)를 서로 다르게 해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준 뒤 영화에 대한 해석을 제출하게 하였다. 이 해석을 백인 그룹과 흑인 그룹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꼭같은 영화를 보았는데도, 두 그룹은 영화의 해석에서 정반대 방향을 보였다. 백인들은 피자집 주인인 살(백인)이 무키(흑인 종업원)를 가족같이 대우해 주었으며, 공동체에 이바지하며 똑바로 살려고 노력했으며(tried to do the right thing), 만일 흑인이 피자집을 소유했다면 훨씬 더 문제가 많았을 것이며, 비극의 발단은 흑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흑인들은 살이 냉혈한이고 흑인들을 경멸하는 인종주의자였으며, 이웃에서 돈을 벌면서 공동체에 기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영화 마지막에 살의 가게가 박살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the right thing was done).
두 그룹이 영화를 해석하며 지적한 인상적인 장면도 서로 달랐다. 서로 같은 영화를 본 것일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것은 결국, 두 그룹이 영화를 보면서 실제로 본 것은 그들 자신이었기 때문이거나, 적어도 영화와 그들 자신의 상호작용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뜨거운 사회적 이슈 대부분에 잘 적용된다. 예컨대 한미 FTA. 이 문제에 대해 찬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주장은 어떻더라도 결국 한미 FTA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평소 소신, 문화, 배경, 이념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서로 다른 근거가 보이게 마련이다.
'사회적 판단 이론' (social judgment theory)은 사람들이 갖게 마련인 이같은 경향을 잘 설명해 준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보면서, 그것을 투명하게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정한 주관에서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인간 전여옥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말 잘하고 똑똑하고 생각이 바르고 예쁘기까지 한 여성 정치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기적이고 머리는 텅 비었으며 식언을 식은 죽 먹기로 생각하는 후안무치에다 생긴 것까치 흉물스런 쓰레기 정치꾼의 전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 전여옥, 혹은 정치인 전여옥은 같은 사람이지만, 그를 어떻게 보는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르다. '보는 사람에 따라'라는 것은, 보는 사람의 주관적 태도와 배경에 따라 사회 이슈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며, 이는 사회적 판단 이론의 핵심이다.

오른쪽 그림은 어떤 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이다. 역시 한미 FTA를 예로 들어 보자. 0부터 100까지는 한미 FTA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의 정도라고 하자. 0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한국에게 오로지 득만 되는 경우이고, 100은 아무런 이득은 없고 한국이 완전히 말아먹히는 경우다. A, B 두 사람의 판단 범주를 보자. A는 '거부 범위'가 넓은 반면 '중립 범위'와 '수용 범위'가 좁다. 다시 말하여, A는 한미 FTA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범위가 넓으며, 부정적인 근거(증거)가 80% 정도까지 나와야 한미 FTA에 반대하게 된다. 결국 A는 한미 FTA에 찬성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B는 정반대다. 그는 거부 범위가 좁은 대신, 수용 범위가 넓다. 다시 말해, B는 한미 FTA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지적을 덜 거부하며, 20~40% 정도의 구간에서는 판단을 유보하지만, 40%가 넘어가면 부정적 정보들을 수용하게 된다. 결국 B는 한미 FTA에 반대하는 태도를 갖게 될 가능성이 A에 비해 훨씬 높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는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나의 지지 후보가 당선 뒤 '변하는' 이유
둘째 개념은 동화(assimilation)과 대조(contrast). 자신과 비슷한 것(익숙한 것)은 실제보다 훨씬 더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는 반면, 자신과 다른 것(낯선 것)은 실제보다 훨씬 더 다른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같은 회색이라도 흰색 옆에 있으면 실제보다 더 검어 보이고, 검은색 옆에 있으면 실제보다 더 희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판단을 내리는 데에도 주관적인 지각 오류가 비슷하게 작용한다. 예컨대, 한미 FTA 찬성론자는 자신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다른 찬성론에 대하여, 그 근거는 자신과 전혀 다르더라도 자신과 매우 유사하다고 인식하거나 우호적으로 판단하게 되며, 반면에 반대론자에 대해서는 자신과 실제로 비슷한 부분이 있더라도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르다는 인식을 먼저 하거나 적대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반대론자도 똑같다.
사회적 판단 이론의 동화와 대조 개념은 특히 문제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모호한 경우 특히 잘 적용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사실 그 자체를 제대로 볼 수 없으므로, 사실보다는 자신의 주관에 의지해 판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미 FTA처럼 구체적인 협상 과정과 결과가 잘 공개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사실에 근거해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개인의 판단에 의지해 호, 불호를 증폭하게 된다.
정치인들이 한미 FTA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는 것도 이 이론으로 잘 설명된다. 이들은 한미 FTA 자체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주관적 판단을 내린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정치인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내놓으면 그와는 다른 태도를 지닌 지지 세력이 뭉텅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높다. 정치인 대부분은 원칙이나 주장에 관계 없이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 싶어하므로,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 모호하게 하여 찬성쪽과 반대쪽 모두 동화(assimilation)되도록 물타기도 하고 줄타기도 하게 된다. 실제로 '정치쇼'를 하는 정치인들은 이렇게 줄타기, 물타기를 하는 이들이다.
정치나 선거와 관련하여 사회적 판단 이론이 매우 설득력이 높은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동화와 대조 개념은, 자신이 지지하여 당선된 정치인이, 실제로 알고 보니 자신과 전혀 다른 지향점을 갖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 황당한 사태를 잘 설명하여 준다. 많은 유권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자가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과 비슷한 입장을 가질 것으로 쉽게 예단하며, 반대쪽 후보는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를 것으로 추정한다. 그 결과, 선거 뒤에 보니 자기가 지지한 후보가 실제로는 자기 생각과 영 딴판이었음을 깨닫는 경우가 자주 벌어지는 것이다.
그럼, 거부 범위나 수용 범위가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든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실과는 달리 왜곡된 동화나 대조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회심리학이 제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아 관여(ego-involvement)이며, 이것은 사회적 판단 이론의 세 번째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자아 관여는 자기가 해당 문제에 직접 연루되어 있음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해당 문제가 자신의 주요한 가치관과 관계 있는 일이라고 믿는 정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컨대, 한미 FTA로 직접 피해를 보게 된 농민뿐 아니라, 한미 FTA 문제가 우리 사회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거나 자신의 가치관과 깊숙히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 강한 반대 태도를 갖게 된다. 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미 FTA로 직접 이득을 보게 된 사람은 강한 찬성 의견을 가지겠지만, 이들뿐 아니라 시장과 경쟁 체제를 굳게 믿는 사람 역시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강한 찬성 태도를 갖게 된다. 직접 관련성뿐 아니라, 중요성에 대한 믿음도 관여(involvement)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self-involvement가 아니라 ego-involvement다.
與民由之 혹은 獨行其道
자아 관여가 높은 사람들은 선택적 지각을 한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강한 주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주장에 가까운 것을 중립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방향의 주장은 선입관에 물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인을 상대로 한 실험이다. 비교적 중립적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화해안(가짜)을 보여주며 팔레스타인에서 제안한 것이라고 하면, 응답자 대부분이 이 화해안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팔레스타인에 유리하게 작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면, 똑같은 화해안을 놓고 이스라엘이 제안한 것이라고 하면 이들은 공정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우리 편이 반칙을 하며 지저분하게 엉겨붙으면 투혼을 불사른다고 하고, 상대편이 그러면 스포츠맨쉽도 모르는 천하의 깡패 새끼덜이라고 욕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회적 판단 이론은 결국 어떤 문제를 판단하는 데 있어 사람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해당 문제에 대한 판단일 뿐만 아니라(라기보다, 해당 문제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 태도이며, 이런 주관적 태도를 만드는 것은 개인의 배경, 경험, 소신, 이념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예컨대 나는 한미 FTA를 열심히 찬성하는 사람과 별로 논쟁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 반대하는 것에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그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보는 증거를 그들은 보지 않고,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를 나는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전망이 정확한 것으로 믿으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존재가 내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가 그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국 한미 FTA의 문제가 아니라, 배경, 경험, 소신, 이념의 문제다. 이것을 놓고 100분 토론이 아니라 10,000,000분 토론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한편으로는 슬퍼지기도 한다. 토론을 통해 이성적인 합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오래된 믿음이기도 하다. 친구와 밤새 이야기하다, 서로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논란을 중동무이할 때면 언제나 생나무 가지를 확 꺾는 것처럼, 혹은 절교를 하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이러한 논쟁이 무의미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소모적임을 깨닫게 됐으며, 강한 주장을 갖고 있는 사람 간의 토론과 논쟁은 본질적으로 소모적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도 나는 여전히 말하고 있지만, 이제 내가 떠드는 것은 나와는 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여 태도를 바꾸려는 것이라기보다, 내 스스로 그것을 좋아하고 즐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사실에 가깝다.
그럼, 주장이란 궁극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맨 처음에도 말했듯이, 토론과 논쟁을 하면서 서로의 차이가 분명해진다는 점도 의미가 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이 모두 벽처럼 강한 주장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에셔의 그림 속에서 보이듯, 양쪽 벽 사이에는 수많은 가구와 집기가 존재하며, 중간 영역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은 두 벽의 주장을 통해 정보를 얻고 학습하고 생각의 가름을 정하게 된다. 사회적 판단 이론이 설득이나 태도 변화와 관련된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 그래서 결국 뜻과 주장을 펴는 궁극의 길은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라 할 것이다. 생각 다르다고 싸우지 말고 자기 생각이나 열심히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반사체 구를 든 손' 그림: 위키
[update] 물론 어떤 경우, 싸우는 것이 자기 생각을 실천하는 중요한 수단일 때도 있다. 상대가 부조리할 때, 이를 견해의 상대성으로 치부하고 접기란 어렵다. 조금 규범적인 잣대로 보면, 사회적 판단 이론은 현실을 잘 설명하여 주는 반면, 사회의 여러 주장을 무차별적인 상대성의 결과인 것으로 파악할 위험도 포함하고 있다.
덧글
사은 2007/04/19 09:03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deulpul 2007/04/19 09:40 # 답글
kirrie 2007/04/19 11:44 # 삭제 답글
제 후배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은데, 학과 클럽에 옮겨도 될른지요?
달속토끼 2007/04/19 12:25 # 답글
무엇인가를 주장한다는 건 피곤한 일입니다.
가끔 회의를 느끼고 한발짝 물러서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정반합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개미처럼 작은 자아가 보입니다.
허무하고 무기력하지만...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으니 더더욱 피곤합니다.
deulpul 2007/04/19 12:43 # 답글
달속토끼: '피곤하다'가 정답이겠네요. 좀 거창하게 말해서, 難作人間識字人이란 어느 시대나 그러지 않은 적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식자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그렇구요. 그래서, 잔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 같은 분들을 보면 존경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거목이 아닌 우리는 열심히 '여럿이 한 발'에 정진하는 것이 수라면 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홍민희 2007/04/20 00:09 # 삭제 답글
deulpul 2007/04/27 05:40 # 답글
결국, 다른 생각이 잘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자신의 주장이 강하지 않을 때라고 할 수 있고, 거꾸로 말하면,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견이 쉽게 수용되는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섣불리 고정된 생각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다고 한 것은, 모호한 중간지역에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용호씨 2007/04/27 17:37 # 답글
Hikaru 2007/04/29 12:45 # 답글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이 아니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서로 다른 의견들이라도 외롭진 않을 것 같아요. 정말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건 진만 빠지고 별 효과 없는 듯 해요.
남모 2007/05/04 22:54 # 답글
deulpul 2007/05/08 09:32 # 답글
Hikaru: 그래서 자꾸 같은 색 깃털을 찾게 되는 거겠죠?
남모: 고맙습니다. 남모님 댁을 가보니, "이 바닥 무섭거든?"의 대사가 다시 생각나는군요... 하하-.
지나가는이 2007/07/07 11:57 # 삭제 답글
기억해두고 싶은 내용이라서요-
2012/09/12 11:44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