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ulo cum libro 짧을短 생각想 (Piece)

이 세상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볼 수 있다면, 틀림없이 이런 기준도 포함될 것이다. 뻥 뚫린 넓은 공간에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막히고 갇히고 은폐된 공간에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개방형과 폐쇄형 두 종류의 사람을 위해, 어느 도서관이나 서로 다른 시설을 함께 구비해 둔다. 예컨대, 환하고 널찍한 방에 칸막이 없는 책상이 주르륵 나열된 공부방이 있는가 하면, 앞과 옆의 칸막이로 주변과 최대한 단절된 공간을 제공하는 공부방도 있다.

나는 옛날부터 폐쇄형으로 자랐으며,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졌다. 널찍한 공간에서는 집중이 되질 않는다. 눈 앞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야 한다. 자리가 조금 불편할지언정, 최대한 은폐되고 엄폐된 곳이 훨씬 편하고 능률도 오른다. 그래서 그런지, 둘이 정답게 손 잡고 도서관에 함께 공부하러 다닌 기억은 전혀 없구나.

내가 잘 가는 도서관의 서고실에는 빽빽히 들어찬 서가 주변으로 자그마한 독서 공간이 죽 둘러쳐져 있다. 작은 책상 하나와 책꽂이, 의자가 놓여 있는 공간들, 이른바 캐럴(carrel)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책을 보관하는 방이므로 워낙 사람 왕래가 없는 곳인데다, 각각의 캐럴 공간도 철제 벽과 철망으로 된 문으로 이웃과 최대한 분리시켜 놓았다. 벽이며 문이 모두 철제로 되어 있어서, 꼭 감옥의 방 한 칸 같다. 감방 치고도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좁은 독방 정도나 될까.

이 곳이 내가 가장 애용하는 곳이다. 책으로 가득찬 서가, 약간 텁텁한 공기, 좀 무서울 정도로 사람의 그림자를 찾기 어려운 분위기, 그 한 구석에 조용히 열린 좁은 공간. 이 곳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 곳은 언제나 나를, 그리고 나만을 기다려주는 것 같다.

이런 취향인지라,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라는 말을 보았을 때, 주제넘게 좋아하였다. 손때 묻은 책들로 가득 차 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그만한 공간, 이 곳보다 더 큰 평안을 줄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세상과 사람은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책이 그러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책이 있는 작은 구석방에서 안식을 느끼는 많은 사람은 곧 나의 도반이요, 사형, 사제들이다.

아래는 한 동료가 보내온 메일. Thanks, F.

주말에 이책 저책 넘겨보다가, 예전부터 함께 궁금해 하던 인용문의 출처를 발견했습니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장미의 이름>이었는지 <푸코의 진자>였는지 궁금했는데, 소설 본문이 아니라 에코가 <장미의 이름> 서문에서 신학자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네요.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

이윤기씨의 맛깔스런 번역이 마음에 들긴 합니다만, 가능한 다른 번역을 생각해 보면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Everywhere I have sought rest and found it nowhere, except in a little nook with books."

한국어 번역이 낯선 곳에서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정든 서재로 돌아온 노수도사의 안도와 반가움을 표현하는 듯하다면, 영어 번역은 '서재 이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다'는, 학자의 좀더 절실한 고백으로 들린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덧붙임]

몇 해 뒤에 쓴 비슷한 글.


 

덧글

  • Charlie 2007/05/08 09:02 # 답글

    꼭 어디 멀리 다녀오신 듯한 말씀이세요. :)
  • 덧말제이 2007/05/08 10:08 # 답글

    전 책방만 가면 이걸 통째로 내 집 삼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죠. 서점 주인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지금은 그런 맘은 없지만 갈수록 집에서 혼자 일하는 게 좋네요. 전에는 늘 나가서 학교나 도서관 같은 데서 하는 게 좋았는데, 요즘은 완전한 혼자일 때가 가장 능률이 좋은 거 같아요.
  • deulpul 2007/05/08 11:36 # 답글

    Charlie: 마음만 열심히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꿈에서는 금성까지 갔다옵니다... 하하.

    덧말제이: 아하, 사실 할 수만 있으면 집에서 일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참고할 자료들도 옆에 언제나 있고, 커피 마음대로 끓여 먹을 수 있고, 피곤하면 잠깐 쓰러질 수도 있고... 다만 제 경우 집에 아무도 없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긴 저처럼 종종 일상의 목적의식을 놓치는 사람은, 집에 있으면 얼른 학교 가야 할 것 같고, 학교 가면 얼른 집에 가야 할 것 같고... 한다는.
  • 용호씨 2007/05/08 12:43 # 답글

    정말로 영어번역과 한글번역의 뉘앙스가 다르군요. 한글번역도 좋지만, 영어번역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드네요. 책상에 써 붙여 놔야 겠습니다 ^^
  • capcold 2007/05/08 15:52 # 답글

    !@#... 책은 미세먼지를 잘 흡수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책으로 둘러쌓여 있다보면 천식과 기관지염의 위험이... :-)
  • 시노조스 2007/05/08 23:55 # 답글

    저도 집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끔 회의를 느끼죠. 머리아프면 잠깐 인터넷을 하면 2시간이 흘러가있고. 잠깐 누워있으면 갑자기 3시간이 지나가 있고 말이죠. ^^; 이런이런
  • deulpul 2007/05/09 16:33 # 답글

    용호씨: 고전적 손글씨체면 더욱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용호씨님의 책상 주변도 책이 있는 평안한 공간이리라 믿습니다.

    capcold: 아닌게 아니라 저 골방에 처박혀서 한나절 있다가 나오면, 스러지는 저녁 햇살에 눈이 부신 것이야 그렇다치고, 목이 퍽 잠기곤 합니다. 그 탓이었던 모양이네요. 방독면 쓰고 들어가야 할까...

    시노조스: 아무래도 시노조스님은 방문을 잠그고 공부시킨다는 스파르타식 기숙학원 체질이 아니실까... 하하. 정말 실감나는 말씀입니다. 어째서 시간도둑들은 휴식할 때의 시간만 훔쳐가는 것일까요.
  • Jinny 2007/05/10 01:13 # 삭제 답글

    전 밝고 따스하고 넓은 공간에서 공부하는 게 좋더라구요. 가로막힌 곳에 앉아있다보면 어느새 졸려서. 그나저나 도서관들은 왜 그렇게 에어컨을 세게 트는지 밝고 넓은 건 좋은데 너무 추워요.
  • 자그니 2007/05/11 08:35 # 답글

    저는 개방형이랍니다....;;; 옆에 사람들이 없으면 공부를 못하는..OTZ
  • 저는... 2007/05/11 13:31 # 삭제 답글

    개방-폐쇄형으로는 잘 규정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방형-폐쇄형 장소를 가리지는 않지만,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해야 뭔가 일에 집중을 하게되는 유형입니다. 엉덩이가 가벼워서인지, 변덕이 심해서인지... 한참 발등에 불이 떨어져 바쁠때가 있었는데, 하루에 대략 4-5군데를 돌아다니며 일을 한 기억이 납니다 (이를테면, 도서관 2층 -> 같은 도서관 1층 -> 카페 -> 오피스 -> 다른 도서관 2층...) . 요즘은 그 정도가 좀 더 심해져서 여기저기 다른 도시들에 가서 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 kristy 2007/05/11 14:28 # 답글

    전 개방형이네요. 공기가 신선, 분위기가 산뜻, 커피나 물을 마시면서, 에어콘도 빠방하게 나오고, 공부를 하거나 책 읽는 사람들도 적당이 눈에 띄고... 일단 몰입되면 금방 시간이 지나니깐 좀 시끄러워도 괜찮아요. 아님 제 방에서 이 책 저 책 다 책상위에 올려 놓고 뒤적뒤적.... 전 캐럴 같은 곳에 가면 책들에 압도 당해 호흡 곤란.... 화장실도 가고 싶고.... 심리적인 압박감이라고 할까요... 적응이 안되요..
  • deulpul 2007/05/13 02:04 # 답글

    Jinny: 책은 보통 온도 상태에서 보관되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정말 추울 정도로 온도를 낮게 유지하는 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 궁금합니다. 한여름에 긴팔 남방이나 쉐터들 입고 앉은 걸 보면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죠. 지금도 벌벌 떨고 있다는...

    자그니: 이 블로그에 자주 등장하는 말에 따르면 여민유지(與民由之)형이시군요, 하하-.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도 옆에 사람들이 없는 감옥 속에 들어가면,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딴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바로 지금처럼 말입니다...

    저는...: 유목민형의 전형을 보여주시는... 무언가 막혔을 때, 예컨대 writer's block 같은 데 맞닥뜨리면 하릴없이 떠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우는 장소를 옮기며 분위기를 바꿔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죠? 아니면 강가에서 비 줄줄 맞으며 담배를 피운다든가... 하하. 문제는 짐이 많을 때 이 넘들을 다 싸짊어지고 다녀야 한다는 것. 낙타에 실어 나를 수도 없구요...

    kristy: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뭐랄까 죽어라 싸매고 외우고 이런 공부가 아니라, 편안하게 추리소설 읽는 것처럼 공부(일) 자체가 홀딱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경우라면 저도 와글와글하는 길거리 카페에서도 잘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개방형 도서관 옆자리에서 애정 전선 확인에 여념 없는 닭살 커플의 압박까지 이겨낼 수 있을지는 의문...
  • 노천환 2017/09/29 09:27 # 삭제 답글

    돌아가신분을 그리워하며... 당신의 아름다운 글, 신비로운 발자취를 기억합니다...
  • deulpul 2017/10/08 12:29 #

    움베르토 에코를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자기 뒤에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란... 참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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