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를 날니면서 튀여나는 매화포 섞일雜 끓일湯 (Others)

여름 밤 하늘을 수놓을 불꽃놀이를 보러 삼삼오오 행렬을 따라 들어간다. 한 청년이 손을 내민다. "내년 불꽃놀이를 위해서 도네이션을 하셔요." 이럴 때 쓰는 전가의 보도, "저,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를 꺼내 한번 휘둘러주고 지나는데 뒷꼭지에 대고 "오케이, 구경 잘 하세요" 한다. 기특하다.

붉게 노을이 지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사람들이 즐거이 자리를 잡는 모양을 보니 주요한의 '불놀이' 서두가 자연스레 생각난다.




아아, 날이 저믄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江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빗놀 . 아아 해가 저믈면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七月이라 사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만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업는고? (원시에는 '사월이라 파일날')


웨 그럴까는 나중에 집에 가서 보고, 지금은 미국판 흥성스러운 불꽃놀이나 보자. 아니나 다를까, 거이부정(巨而不精), 무엇이든 덩치는 크지만 세밀하지는 못한 미국의 면모가 다시 나타난다. 행사는 시작 안내 방송을 하고 국가를 부른 뒤 아무 말 없이 한참 쉬었다가 폭죽 한 발을 쏘고 또 꿀 먹은 벙어리로 한참 쉬었다가 또 한 발 쏜다. 한국 같으면 행사 진행자가 당장 감봉 처분되었을 일이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이 박자를 맞추어 손뼉을 쳤다. 쇼 시작도 하기 전에 커튼콜 하는 것은 처음 본다.

국가를 합창하는 순서에서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왁자하던 사위가 일순 조용해지고 제각각의 목소리로 합창이 시작되었다. 나도 엉거주춤 일어섰는데, 이런 장면이 벌어질 때마다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예컨대,

  1. 이건 방문자, 외국인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예의겠지? 존중해 줘야겠지?
  2. 그런데 한국에서도 나는, 예컨대 극장에서 애국가가 나오면 코딱지를 후비고 있지 않았던가. 하늘하늘한 베드신으로 가득찬 영화를 보기 위해 자기 돈 내고 들어와서, 애국가 들으며 부동자세 하고 있으면 갑자기 애국 의식이 높아지려나.
  3.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퍼질러 앉아 코딱지를 파고 있으면, 남들이 보기에 테러나 하러 온 무슬림으로 비치지 않을까.
  4. 그래도 내가 신현준처럼 생긴 건 아닌데. 혹시 크레이지 킴의 졸개로 볼지도 모르겠군.
  5. 그러고 보면, 모든 애국 의식과 집체 행사의 본질은 동료의 압박(peer pressure)이라는 폭력 장치인지도.
  6. 그런데 이 국가를 만든 넘은 왜 중간에 갑자기 저렇게 옥타브의 급상승을 꾀했을까. 야구 중계 때 7회초 끝나고 나서 저 부분 부르다 목소리 뒤집혀진 사람 여럿 봤지.
  7. 캄보디아 출신 불법 이민자들을 다룬 PBS 다큐에서도 이런 장면 있었지. 리틀 야구단을 데리고 시합에 참가한 캄보디아 청년도 행사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자 참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
...

따위의 생각이 휘리릭 명멸하는 것이다. 노래는 자욱한 포연을 뚫고 휘날리는 성조기를 우러르며 종결로 달리고, 나는 엉거주춤 서서 이렇게 에로 영화에서부터 시사 다큐까지 몇 편을 썼다 지웠다 한다. 이럴 때 나의 마음자세는 항상 엉거주춤인데, 이 날은 잡은 자리가 마침 언덕배기 경사여서 심신이 모두 엉거주춤이 되었다.

이윽고 하늘과 땅을 울리며 불꽃이 터져 올랐다. 강력한 폭음과 화려한 빛의 군무는 잡다한 생각을 순식간에 밀어냈다.






퉁, 탕, 불티를 날니면서 튀여나는 매화포, 펄덕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强烈한 熱情에 살고 십다. 저긔 저 횃불처럼 엉긔는 煙氣, 숨맥히는 불꽃의 苦痛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십다고 뜯밖게 가슴 두근거리는 거슨 나의 마음. (역시 주요한의 '불놀이'에서)


먼저 떠난 님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아팠으면, 매화포 보러 와서도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을 하시는고. 감정이 정제되지 않고 꾸역꾸역 나오는 옛날 시의 유치함을 뛰어넘어, 요한의 고통과 애절함이 가슴을 저린다. 날마다 해가 저물면 살구나무 그늘 아래서 혼자 울며 밤을 맞는 청년이 정말 안스럽지 않은가.

9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물질 문명이 번성하고 대신 사람의 성정이 모질어진 이 세상에서도 불꽃을 보며 호수에 몸을 던지고 싶어하는 청춘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불꽃의 화려함이 고금 동일한 것처럼 만남과 이별에서 비롯되는 아픔 역시 세대를 꿰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르지, 자본이 사랑보다 승한 이 시대에, 매화포 밑에서 강이나 호수로 뛰어드는 사람이란 기부금 수납 실적이 저조한 저 청년 정도인지도.

어쨌거나 남의 나라 독립기념일에 불꽃 구경을 하고 돌아오면 나는 조금 불안해진다. 펑펑 폭죽 소리로 추임새를 넣어 가며 여름은 바야흐로 성하(盛夏), 화려한 불꽃처럼 그 클라이맥스에 오르고 있다. 이제, 여리디 여린 새싹이 짙푸른 녹음으로 자라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여 왔나, 앞으로 찬 바람 불기 전까지 무엇을 해야 하나를 고통스레 둘러봐야 할 때. 즉슨, 해가 저물면 저널 가득 쌓인 서가 그늘 아래에서 혼자 울며 밤을 맞아야 할 때인 것이다. 아아, 옰 여르미 본댄 또 디나가나니.

 

덧글

  • 2007/07/07 04:4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7/07/07 05:40 # 답글

    네, 걱정마시고 힘 내셔요. 백만학도...가 함께 합니다.
  • isanghee 2007/07/07 07:17 # 삭제 답글

    그래도 동네 불꽃놀이에 안내방송이 있으면 꽤 좋은 것 아닌가요?
    서울 여의도에서 세계불꽃놀이 축제만 보던 사람은 웬만해서 어디 눈길이나 가겠습니까..^^
  • deulpul 2007/07/08 15:05 # 답글

    에또... 사실 안내 방송이라기보다 메가폰 들고 떠드는 정도랄까요, 하하. 눈이나 귀가 고급이 되면 바로 그게 피곤하죠? 불만족의 정도가 갈수록 커지는... 저는 되도록 눈과 귀를 고급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만...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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