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타>: 내 열심히 할께! 비칠映 그림畵 (Movies)

어느 해인가, 아마 추석 무렵이었을 것이다. 연휴를 며칠 앞두고 당시 영월에 살고 있던 친구를 찾아 갔다. 당시 친구는 KBS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의무적으로 지방 순회 근무를 시키는 KBS 정책 때문에 영월에 잠시 내려가 있었다. 영월에 도착해 전화를 하니 사무실로 오란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영월 KBS였다. 방송국에 들어선 나는 얼떨결에 친구의 동료나 상사와 인사까지 나누었다.

직원들은 졸병의 친구에 불과한데도 멀리서 찾아왔다고 반겨주셨다. 마침 점심 때여서, 함께 우르르 몰려 나와 청령포 옆의 한식집에서 밥까지 잘 얻어 먹었다. 유서 깊은 고장을 휘돌아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으며 밥은 달았고 사람들은 참 좋았다. <라디오 스타>를 보면서 자꾸 그 때 생각이 났다. 마지막 자막 올라갈 때 나온 장소 협찬 리스트에서 '영월 KBS'라는 글자를 본 뒤, 그래서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느낀 이유 중 하나는 영월이라는 공간적 배경이다.




왕년의 가수왕 최곤. 인기도 한물 간데다 사고까지 쳐대는 바람에 연예계 변방을 떠돌다, 강원도 영월의 지역 라디오 방송 디제이로 내려왔다. 매니저 박민수. 영원히 철들지 않는 최곤을 따라다니며 챙기느라 개인 생활과 가정이 모두 망가진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좌충우돌하던 라디오 방송이 조금 자리를 잡은 뒤, 팀원 네 명에 매니저까지 어울려 소주를 마셨다. 술에 취한 피디를 업고 숙소로 걸어가며 두 사람이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 모두 심신이 피곤하다. 항상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낮은 데서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잠깐이라도 높은 데 살아본 사람은 낮은 데서 살기가 쉽지 않다.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살기란 지옥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과거와 현재의 괴리에 일상의 곤궁함이 더해 두 사람을 짓누르고 있다. 게다가 지금 박민수는 피디까지 업고 있는 중이다. 무거운 다리, 피곤한 삶.

박민수의 자그마한 가방을 넘겨 받고 땅을 보며 걷던 최곤이 우울하게 말한다. "형, 힘들지?"

물론 이 말은 중의적이다. 지금도 힘들지만, 최곤 자신을 건사하느라 박민수의 삶은 예전부터 힘들었으며, 최곤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덧붙인다. "형, 우리 그냥... 찢어질까?"

피디를 업고 힘들게 걷고 있던 박민수는 한 마디만 한다. "내 열심히 할께."

그는 지금까지 충분히 열심히 해왔다. 그런 박민수가 안되어서 최곤은 찢어지자고 한다. 이를 들은 박민수는 "그래, 이 자식아, 이제 좀 찢어져서 나도 좀 살자!" 하는 대신, 다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대답을 내놓는다.

살면서, 가족을 빼고, 누가 나를 이렇게 극진히 돌보고 보살펴 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또 내가 누군가를 저렇게 극진히 돌보고 보살펴 준 적이 있었던가.

영원한 인기는 없다고 한다. 영원한 인기인도 드물다. 그러나 영원한 우정은 존재할 수도 있겠다 싶다. 박민수와 최곤의 우정을 보면서, 누군가가 저렇게 모든 것을 던져 돌보아 주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고, 또 거꾸로, 저렇게 나를 바쳐 극진히 돌볼 대상이 있는 삶도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에서 입증되듯, 이러한 관계에서 진정한 주인은 사실 노예일 수도 있는 것이다.

국민 배우 안성기는 연기를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간혹 헷갈릴 때가 있다. 후기 추사의 필치가 아이의 낙서와 비슷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무위의 경지에 도달해서 그런 것일까. <안녕하세요,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렇게 믿고 싶다.

박중훈에 대해서는 무조건 30점 더 얹어 준다. 좀 오바스러운 연기 때문에, 옥타브 변화가 큰 성악곡을 듣는 것처럼 불안정한 느낌이 드는데, 박중훈은 자기 역할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한다.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라디오 스타>의 힘은 영월의 힘만큼이나 박중훈의 힘이기도 하다.

 

덧글

  • Lette 2007/07/23 01:16 # 답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
  • deulpul 2007/07/23 04:56 # 답글

    영화 나온 지 한참 되어서, 그야말로 re-view가 됐네요. 그래도 가끔씩 re-view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 윤군 2007/08/15 21:30 # 답글

    미술이나 작가 계통에서의 대가들도 무위의 경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드신 이후에는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힘든 필력들을 보여주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진리의 길라는 것은 알고보면 정말 가까이 있는건지도 모르겠어요.
  • deulpul 2007/08/16 06:40 # 답글

    비슷한 말씀일지 모르지만, 젊을 때는 어깨에 힘 빡 들어가서 근엄한 역할만 하거나 뭇 여성(남성)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멜러 스타들이 이윽고 망가지는 연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 이후보님 말씀대로 몸값이 떨어져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깨 힘 빡 들어간 연기보다 망가지는 연기가 여러 모로 훨씬 더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까불지마> 보면서, 영화의 '서사'와는 관계없이 참 좋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말씀대로, 어디 연기 뿐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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