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소년사 6: 몰표 사건과 서기 소녀 연결連 이을續 (Series)

소녀들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으나 정작 더 당황한 것은 소년들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다섯 소녀의 얼굴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그레해지기 시작했다. 네 소년의 얼굴은 각기 다른 이유로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여자와 남자를 따로 내셨으니, 그 차이는 자못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맹숭맹숭한 소년의 신경을 자극한 것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보들보들한 아이들이었던 것으로 보아도, 두 종류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였음에 틀림없었다. 소년은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이 다르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지만, 어떻게 다른 것인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물론 화장실을 다르게 간다거나 하는 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년들이 소녀들에 관심을 가지고 소녀들이 소년들을 의식하는 것이, 각기 다른 화장실 건물로 들어가기 때문(만)이 아님은 명백했다.

초등학교 5학년의 소년이 이해할 수 있는 남녀의 차이란 크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이해나 깨달음이란 어느 날 벼락 같이 뇌수에 꽂히고 심장을 찌르는 형태로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80평생 장미 전쟁이나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날은 소년이 이렇게 돈오(頓悟)를 한 날로 기록되었다. 하긴, 그 뒤에도 이같은 깨달음은 계속되었으니 점오(漸悟)라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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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이 된 소년에게는 같이 살다시피 하던 동무가 셋 있었다. 소년과 동무1, 동무2, 동무3 네 명은 학교에서도 함께 놀고, 학교가 끝나고 나서도 학교에서 함께 놀고, 일요일에도 학교에 와서 함께 놀았다. 얼추 4총사처럼 되어 갔는데, 특이한 것은 네 명의 스펙이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동무1은 좀 껄렁껄렁한 반항아 스타일이었으며 약간의 날라리 끼도 있었고, 따라서 넷 중에서 가장 쾌남형이었다. 자연스럽게 담임 선생님에게 곧잘 얻어터지는 멤버이기도 했다. 동무2는 우수에 찬 고독남형이었는데, 그래서 예술가나 시인의 어린 시절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 친구다. 희한하게도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 명성이 자자한 시인 겸 평론가가 이놈과 똑같은 이름을 가졌고 연배도 비슷하여, 소년과 헤어진 이후 문학을 전공하여 시인이 된 게 아닌가 싶어 여러 차례 눈여겨 보아야 했다. 동무3은 조용히 세상을, 이라기보다 학급을 관조하는 관찰자형이었다. 따라서 교실 안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였으나, 교실 밖에서는 곧잘 기상천외한 생각을 해 내는 싱크탱크였다. 말하자면 실제보다 저평가되는 스타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소년은... 그냥 소년이었다.

성격이 비슷하거나 성적이 비슷하거나 부모끼리 친구이거나, 하다 못해 집의 방향이라도 비슷해야 쉽게 동무가 되는 게 당시 시골 학교 나름의 소셜 네트워크 형성 과정이었으니, 이런 점이 판이하게 다른 네 아이가 동무가 된 것은 좀 특이한 일이었다. 어떤 계기를 통해 그렇게 되었는지 소년은 기억하지 못한다.

장마비가 오락가락하던 이 날, 소년을 비롯한 네 명은 학교가 끝난 뒤 자그마한 읍내를 한 바퀴 돌고 다시 학교로 왔다. 군데군데 빗물이 고인 운동장 구석의 철봉에 매달려 시국을 논하며 놀고 있는데, 같은 반의 여자 아이들 다섯 명이 홀연히 등장했다. 정말 갑자기 나타난 폼새가,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아니면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요요해서, 소년 일행은 마치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이 다섯 소녀는 나름대로 학급에서 엘리트 그룹이었는데, 저희도 소년 넷처럼 자기들끼리 잘 어울려 다녔다. 홀연히 나타난 다섯 소녀는 네 소년을 보더니 반가운 체를 하고 나서, 비가 좀더 올지도 모르니 교실에 들어가서 놀자고 한다. 네 소년은 여전히 홀린 것처럼 입을 헤 벌리고 소녀들을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소년이 다니던 시골 학교의 교실은 보통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시냇물에 멱을 감거나 논두렁에서 메뚜기를 잡기에 적당한 계절이 아니면,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다시 교실에 돌아와서 노는 일도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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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5학년 반 배정이 끝나고 나서 매우 실망하였다. 소년이 좋아하는 소녀든 소년을 좋아하는 소녀든 모두 다른 반으로 가 버렸으며, 월요일의 애국 조회 때나 점심시간 때의 국민체조 시간이 아니면 잘 만나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대신 같은 학급이 된 소녀들은 잘 모르거나 관심을 끌지 않았던 아이들이었다. 소년에게 5학년 시기는, 예쁜 여자들은 마녀로 몰려 화형 당하고 곰보 성처녀들만 우글대던 중세 암흑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울려 살다 보면 암흑 속에서도 꽃이 피고 열매도 맺는 것이다. 한두 달이 지나면서 점차 두각을 드러내는 소녀가 있었다. 이 소녀는 말수도 적고 활달한 편도 아니어서 그 존재를 알아채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에 딱 한 번씩, 이 소녀가 무대의 전면에 서서 모두의 눈길을 끌어모으는 때가 있었다. 토요일 첫 교시, 학급 회의 시간이 바로 그 때였다. 회의라고 해 봐야,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올 법한 문장 하나를 골라 다음 주 주훈을 정하고 '그네를 고쳐주세요' 하는 건의 사항이나 내놓는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회의는 회의. 진행자도 필요하고 기록자도 필요하다. 소녀는 바로 이 회의의 진행을 칠판에 정갈하게 정리하는 서기였다.

회의가 시작되면 소녀는 자기가 앉던 나무 걸상을 들고 칠판 앞으로 조용히 나간다. 반장이 "국민 의례는 생략하고..." 운운 하는 염불을 외우는 동안, 소녀는 담임 선생님이 넘겨 준 안건을 칠판 왼쪽 위에서부터 가지런히 쓰기 시작한다. 서기 소녀가 처음 분필을 잡던 날, 소년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사람이 쓰는 글씨가 저렇게 교과서 글씨와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소녀가 세로획을 아래로 내려 그으면서 그 머리 부분을 크지도 작지도 않게 딱 꺾어 내리거나, 이응을 쓰면서 동그라미를 시작하기 전에 작은 점을 내리찍는 것을 보고 소년은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 소녀가 석봉 어머니와 일합을 겨루었더라면, 어머니는 지금도 산에 올라가 떡 써는 수련을 하고 계셨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뒤로도 어느 반이나 이렇게 칠판 글씨를 유달리 잘 쓰는 아이가 있었다. 소년이 서울로 전학을 갔을 때, 그 콩나물 시루 같은 학급에서도 칠판 글씨를 전담하는 소녀가 하나 있었다. 이 서울의 서기 소녀는 사실 소녀라기보다 아줌마 같은 스타일이어서, 가뜩이나 과밀 학급에 정신을 못차리던 소년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소년이 시골의 서기 소녀에게 강력한 인상을 받은 것은 단지 글씨를 잘 썼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5학년 생활이 무르익고 학급 회의도 거듭되면서, 소년에게 서기 소녀는 중세 암흑을 밝히는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 젖은 운동장에 홀연히 나타나 소년 일행을 이끌고 학급으로 들어간 소녀들 중에는 이 서기 소녀도 끼어 있었다. 오, 그리고 오직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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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들어온 소녀들 중 하나가 갑자기 종이를 꺼내 잘게 찢기 시작한다. 음... 서로 상대편을 대상으로 하여 투표를 하자는 것이다. 소년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 보았다. 뭐? 투표를 왜 해? 반장 또 뽑나? 하는 생각과 에이, 재미없어... 운동장으로 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소년들의 눈길을 따라 오고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들은 연필까지 챙겨주며 투표지 넉 장을 소년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기들도 다섯 장을 하나씩 나눠 가졌다. 흐음...

이런 인기 투표가 당시 다른 지역에서 널리 행해졌는지, 혹은 소년이 있던 곳의 여학생 사이에 흔하던 것인지 소년들은 전혀 아는 바 없었다. 구슬과 딱지의 분산 투자 전략, 호랑이와 사자의 전투 예측 모델 같은 시사 토론에 전념하던 소년들에게, 설문조사를 통한 여론 수렴 방법론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게다가, 결과가 즉석에서 공개되니 좀 창피하지 않냔 말이다. 쟤들은 부끄러운 것도 몰라요, 글쎄.

복도 쪽 1분단과 창 쪽 5분단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은 소년들과 소녀들이 투표지에 이름을 쓰는 잠깐 동안, 세상은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양측이 다 쓴 투표지를 모아 교환하는데, 소녀들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흥분, 궁금증, 호기심, 기대감 같은 것이 뒤섞인 그 표정들은 참 인상적이었다. 소녀들이 보기에 소년들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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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맞대고 둘러서서 건네 받은 쪽지 네 장을 펴 보던 소녀들.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잠시 후 고개를 들고 소년들 쪽을 바라보는데, 다들 얼굴이 빨갛다. 꽤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지난 뒤, 그 중 가장 키가 큰 소녀가 말했다. "이거 무효야. 다시 해!"

소년 네 명이 써 낸 쪽지 넉 장에는 약속이나 한 듯 꼭같이 한 사람 이름이 씌어 있었으니, 바로 서기 소녀였던 것이다. 소년은 여기서 1차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 넘들이 모조리 서기 소녀를 찍다니. 동무들에 대해 강한 배신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분노한 소녀 네 명이 얼굴이 빨개진 채 식식대었기 때문에, 소년들은 잘못한 것도 없이 미안해서 당황해 했다.

소년이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소녀들이 쓴 쪽지를 펼 때였다. 꼬깃꼬깃 접힌 다섯 장을 폈더니... 하! 놀랍게도 표가 고르게 분산된 것이다. 소년이 두 표를 받았고 동무들도 모두 1표씩을 받았다. 아니, 대체 저런 사고뭉치 녀석(동무1)이나 보기만 해도 우울한 녀석(동무2), 있으나마나 한 녀석(동무3)을 좋아하는 여학생도 있었단 말인가! (동무들에게 열 받아 있는 상태이므로 이런 생각이 가능했다, 물론.) 이번엔 누군지도 모르는 소녀 세 명을 향해 새로운 배신감이 솟아났다.

소년은 충격을 애써 감추고 동무들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뒤에서는 소녀 네 명이 "이 투표 무효야!!"를 외치고 있었다. 어쨌거나 표가 분산된 소년들은 아무 일 없겠지만, 소녀들 경우는 달랐다. 소녀들 사이가 서먹해지거나, 서기 소녀가 왕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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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투표 사건에서 소년이 받은 충격은, 다른 말로 하면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른가를 획기적으로 깨달은 지적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남녀가 피지컬한 측면 말고 멘털리티에서도 이렇게 큰 차이가 난다니! 아아, 남자란 얼마나 단순한가. 여자란 얼마나 복잡한가. 여자의 선호, 취향, 감각은 얼마나 세밀하고 개성적이며 예측하기 어려운가. 수컷으로 세상을 살기가 만만치 않겠구나.

소년은 이후 이 날 얻은 깨달음을 뒤집을 만한 경험을 해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간혹 복잡한 남자를 만나기는 했어도, '단순한 여자' 같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년 주변의 여자들이 유달리 복잡해서인지도 몰랐다.

개표 정국의 혼란 속에서도 소년은 몰표를 받은 서기 소녀 민O영의 얼굴을 살짝 살펴 보았다. 난처한 표정 속에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미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누구를 찍었을까. 호남아일까, 예술가일까, 조용한 천재일까, 아니면 소년일까. 어쨌거나, 만장일치로 지지를 받은 서기 소녀가 행복해 했으리라는 생각은, 양 진영 모두로부터의 배신감으로 상처 받은 소년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물론 서기 소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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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사은 2007/09/08 18:14 # 답글

    아, 너무 잘 읽었습니다. 픽션일까 아닐까가 잠시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었어요. :)
  • 시노조스 2007/09/08 22:25 # 답글

    아! 왜 전 저런 명랑(?) 소년사를 만들지 못한거죠?
    제 인생은 0과 1로 점철된.................... 하하 -_-;
  • deulpul 2007/09/10 01:33 # 답글

    사은: 고맙습니다. 모호함이 때로 힘이 되기도 하죠.

    시노조스: 이제부터 명랑 청년사를 만드세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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