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뻔한 지갑

범사에 감사하라
무사에 감사하라
평범에 감사하라

오늘도 평범하게 지나갔구나. 아무 일 없는 것이 복이다.

도서관 4층으로 올라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으슥한 단골 자리에 앉아서 짐을 풀다 보니, 어, 지갑이 없다.

2단짜리 내 지갑은 좀 두꺼운 편이다. 가운데 가장 불룩한 부분은 두께가 2센티미터 이상이다. 크하핫,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다면 좋겠지만 평생 그럴 일은 없을 듯하니 좌절. 대신 별별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다. 뭐가 들어 있나 볼까.

지폐 5달러짜리 한두 장, 1달러짜리 서너 장
최근에 받은 카드 영수증 서너 개
운전면허증
2번으로 시작하는 SSN 카드
어머니가 보내주신 부적...
크레딧 카드
데빗 카드
AAA 회원 카드
Sam's Club 회원 카드
동네 식품점 할인 카드 두 장
도서관 출입증
복사 카드 두 장
버스 패스
자동차 예비 열쇠
청순한 여인의 사진 두 장
체육관 라커 자물쇠나 자전거 자물쇠 번호 따위 중요한 번호를 적은 쪽지
옛날 명함 두 장
최근에 받은 남의 명함 두세 장
동료들 연락처를 인쇄해 최대한 축소복사한 쪽지 한 장


야... 이렇게 잡다한 게 들어 있는지 나도 몰랐다.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것으로서 납작하고 조그만 것은 모조리 들어 있는 셈이구나. 이 것들은 모두 내딴에는 꼭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이라 여기는 넘들이다. 예컨대, 자동차 열쇠를 안에 둔 채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린 경우에 대비한 비상용 예비 열쇠. 비상 열쇠를 보관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양하고 기발한데, 나는 그냥 지갑에 넣어 다니는 방법을 쓴다. 이 열쇠가 쓰이는 경우는 1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데, 막상 그런 일이 생기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또 부적은 매 입춘 때마다 한국에서 일껏 보내주시는 어머니의 정성 때문에 꼭 지니고 다닌다. 잠깐 떨어내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께 죄 짓는 것 같아서 며칠도 안돼 다시 지갑에 집어 넣었다. 다른 것들도 자주 쓰이지는 않아도 항상 지니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내 지갑에 들어 있는 것은 내게는 모두 부적이나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별별 것이 다 들어 있으니, 마음이야 편할지 몰라도 갖고 다니기가 꽤 불편하다. 여름처럼 걸친 옷가지가 적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따금씩 날 잡아서 한번씩 털어주기는 하지만, 파킨슨 법칙을 따르기라도 하는지 금세 다시 뚱뚱해진다. 그동안 지갑을 바지 왼쪽 앞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어느 날 불룩 나온 앞섶이 보기 흉하다는 것을 깨닫고, 몇 개월 전에 오른쪽 뒷주머니로 옮겼다.

자리에 앉아서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지갑과 열쇠 따위 묵직하고 불편한 것들을 몸에서 떨어내는 것이다. 앉아서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지갑을 꺼내려고 보니 뒷주머니가 허전한 것이다. 지갑이 어디로 가고 없다!

만원 버스며 만원 지하철이 없으니, 소매치기를 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디다 흘렸거나 버려두고 왔음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몇 가지 일로 유달리 정신이 좀 사나웠다. 결정적인 순간, 그러니까 지갑을 꺼내 뭔 일을 치르고 다시 집어넣는 순간에서 집중력이 흩어지는 일이 발생할 경우, 기억은 지갑과 함께 블랙홀로 사라진다.

돈은 안되지만 들은 잡동사니가 많으니, 지갑을 잃어버리면 타격이 무척 크다. 안해도 될 일을 이것저것 신경써야 할 것을 생각하면 하늘이 노래질 정도다. 급히 가방이며 웃옷을 다 뒤졌는데, 아무데도 들어 있지 않다. 들어 있을 리가 없다. 가지고 다니지 않을지언정, 다른 데 넣는 일은 드문 것이다. 내 머리 속은 오늘 도서관에 오기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헤아리기 위해 급히 되감기를 시작했다.

오늘 좀 늦게 나온 이유는 정기 체크업을 위해 아침에 맡겨두었던 모터사이클을 찾아 왔기 때문이다. 서비스를 나설 때, 연료가 얼마 없으니 예비 연료 탱크를 열고 가라고 했다. 괜찮을 것 같아서 무시하고 그냥 나왔다가 출발한 지 5분도 안되어서 길가에 섰다. 자동차든 오토바이든 작동이 안되어서 길 옆에 비상 정차해본 사람은 안다. 상당히 창피하다. 게다가 모터사이클은 어디 숨을 데도 없다. 여기서부터 약간 얼이 빠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X팔림을 무릅쓰고, 예비 연료 콕을 열고 한참 재시동을 건 뒤에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다행히 가까운 데 주유소가 있었다. 여기서 카드로 계산을 했으니 여기까지는 지갑이 있었다.

도착한 뒤에는 웃옷을 벗어 들고 왔기 때문에 중간에 흘렸을 수도 있다. 일단 뛰어! 나는 급히 내가 온 길을 되짚어 갔다. 주차장으로부터 도서관까지는 약 5분 거리. 바닥을 열심히 살피며 주차장까지 돌아갔는데도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누군가가 주워서 도서관이나 어디에다 맡겨놨을지도 모른다. 급히 도서관으로 되돌아와 데스크에 물어보니 lost and found 에도 지갑 같은 것은 없단다. 다시 4층으로 올라와 털썩 주저앉았다. 약간 절망적이었다.

연료를 넣을 때 주유기 위에 그냥 올려놓고 왔을 가능성이 제일 컸다. 연료를 내가 직접 넣기 때문에, 헬멧 벗고 장갑 벗고 하면서 주의가 흩뜨러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가뜩이나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랬으니. 그러나 주유소를 다시 찾아간대도 시간이 꽤 걸릴 테고, 만일 주유소에 놓아두고 왔다면 캠퍼스에 떨어뜨렸을 때보다 되찾을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가보기는 가봐야지. 다시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나왔다. 오토바이 옆에서 열쇠를 찾는데, 아하! 어쩜 그 검은 지갑이 바퀴 옆에 다소곳하게 떨어져 있단 말이냐. 마치 누가 예쁘게 내려놓고 간 것 같았다. 눈을 비비고 봐도 내 지갑 맞다. 아까 왔을 때는 분명히 못 봤는데.

내가 쓰던 도장은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것이다. 당연히 부동산 거래에 인감으로 쓸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보다는 사인펜을 칠해 연습장에 장난하는 용도로 더 많이 썼다. 투명한 아크릴 재질에 안에는 작은 조개들이 들어 있고, '관광 기념'이라는 아햏햏한 글이 새겨진 쪽지까지 들어 있었는데, 말하자면 값싼 기념품 같은 도장이었다. 그러나, 코흘리개에게 도장을 파 주신 아버지의 뜻이 고마워서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이 도장을 썼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도장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온 집안을 다 뒤졌으나 도장은 나오지 않았고, 할 수 없이 나는 새 도장을 팠다.

사라진 도장이 다시 발견된 것은 서너 해가 지나서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장을 보고 돌아왔더니 세상에, 그 도장이 안방 딱 한가운데에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딱 한가운데에. 어머니의 진술의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도장이 어떤 가구 밑으로 또르르 굴러 들어갔다가, 어머니가 집을 비운 동안 무슨 경미한 지진이나 그 비슷한 진동이 있어 다시 또르르 굴러 나왔을 가능성밖에 없었다. 도장을 분실했을 때 이미 구석구석 다 뒤져 봤지만, 어쨌든 그런 추리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어딘가 사차원 같은 것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들긴 했다.

지갑도 잠시 사차원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온 것일까. 저간의 사정을 보면, 정신 못차리고 다니다 흘렸다고 해야 더 정확한 설명이 되겠다. 아무래도 지갑이 너무 두꺼워진 것일까. 다시 군살빼기를 해야 할 때인 듯하다. 어쨌든 범사, 무사에 새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다. 좋은 일이 없어서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쁜 일이 없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히 안도하고 즐거울 수 있으니까.


 

덧글

  • naroo 2007/09/12 14:52 # 답글

    트리플에이와 샘스클럽이라... 혹시 미시건에 있으신가요? 왠지 저희 동네 같은느낌이드네요
    ^^
  • deulpul 2007/09/12 15:13 # 답글

    그 곳은 아니지만 비교적 가까운 곳입니다. AAA는 차 나이가 좀 많으면 흔히 가입하는 것이고, 샘스는 먹는 게 좀 많으면 흔히 가입하는 거죠? 아... 그건 아닌가? 하하-.
  • 서산돼지 2007/09/12 15:25 # 답글

    예전에 환상특집에서 나왔는데, 세상은 객차가 줄줄이 이어져 있는 열차와 같답니다. 사람들은 한 객차에서 약 2분씩 머물고 똑 같이 생긴 다른 객차로 가는데, 수많은 신의 하인들이 오늘도 열심히 세계를 만들고 있읍니다. 그러다가 간혹 물건을 빼놓는 수가 있는데, 갑자기 물건이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은 그때문이라고 하는군요.
  • deulpul 2007/09/12 16:06 # 답글

    재미있는 비유네요. 하지만 진지하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하-. 어쨌든 실수하는 소품 담당들은 감봉해야 해요. 세상에 디테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 Yoon 2007/09/12 20:22 # 답글

    아무튼.. 지갑을 찾으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
  • deulpul 2007/09/13 08:21 # 답글

    고맙습니다. 종내 잃어버렸더라면 지금까지 패닉 상태였을 거에요.
  • eunjeong 2007/09/13 10:49 # 답글

    범사에 감사하라, 무사에 감사하라.
    저에게 큰 위안이 되는 말이네요. 감사합니다. ^^
  • 시노조스 2007/09/13 12:16 # 답글

    어제 낚시 갔다가 친구가 모든 루어가 담긴 태클박스를 놓고 와서 돌아갔다 왔지요. 마지막에 언제 봤는지 기억을 따라 올라가면서 생각하고 마지막 목격지에 갔더니 딱 거기 있더군요.

    들풀님도 찾으셔서 다행이에요. ^^
  • deulpul 2007/09/13 18:04 # 답글

    eunjeong: 갑자기 눈이 짠해졌어요. 이유는 말 안드리렵니다.

    시노조스: 네... 감사. 보통은 잘 안흘리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단 없어지면 불필요하게 타격받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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