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 섞일雜 끓일湯 (Others)

오늘 받은 편지 한 장에는 잡지 <워먼스 데이(Woman's Day)> 1982년 12월14일자에 실린 낸시 게이븐(Nancy Gavin)의 글이 담겨 있다. 그 글을 먼저 옮기고 내가 쓴 사족은 맨 뒤에.

작고 하얀 봉투

우리 집 크리스마스 트리 가장 높은 가지에는 자그마한 흰색 편지봉투 하나가 매달려 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고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평범한 봉투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이 편지 봉투는 언제나 우리 집의 크리스마스 트리의 가지 사이에 올라 있었다.

모든 일은 내 남편 마이크가 상업주의에 찌들어 버린 크리스마스에 넌더리를 낸 데서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는 가족과 친지에게 줄 선물을 사느라 바빴다. 해리 삼촌에게 줄 넥타이나 할머니에게 선물할 영양제를 사느라 우리는 바삐 돌아다니며 돈을 써야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곧 과소비 시즌이었는데, 이것은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축하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나온 절망적인 몸부림 비슷한 것이었다. 어느 해, 나는 셔츠, 스웨터, 넥타이 따위를 사는 일을 포기하고, 남편 마이크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정말 우연히 찾아왔다.

우리 아들 케빈은 당시 12살이었는데, 학교에서 레슬링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즈음, 케빈의 팀은 친선 레슬링 시합에 출전하게 되었다. 케빈네 학교 팀과 겨루게 된 상대 팀은 도심의 한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들로 조직된 레슬링 팀이었다. 이 팀 아이들은 다 떨어진 운동화에 제각각 다른 남루한 옷을 입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이들의 모습은 파란색과 금색이 어울린 깔끔한 유니폼을 입고 번쩍이는 새 레슬링화를 신고 출전한 우리 팀 선수들과 극명히 대비되었다. 나는 그들이 귀나 머리를 보호할 헤드기어조차 착용하지 않고 나온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헤드기어 같은 필수 장비도 그들에게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교회 팀 아이들은 케빈의 팀을 당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모든 체급에서 상대를 압도했다. 패배한 교회 팀 아이들은 매트에서 일어나, 마치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과장된 몸짓을 하며 자기 팀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거리의 아이들다운 결기였는데, 그런 과장된 몸짓 때문에 그들이 더욱 딱해 보였다. 내 옆에 앉아서 경기를 보던 남편은 머리를 흔들며 안타깝게 말했다. "쟤네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이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분명히 잠재력을 갖고 있을 텐데, 이렇게 참패를 당하면 더 하고 싶은 생각이 날까 모르겠어." 마이크는 세상 모든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린이 축구나 야구 코치를 했던 그는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이크에게 줄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바로 이 때였다. 그 날 오후, 나는 운동용품 가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헤드기어와 레슬링화를 사서 그 교회에 익명으로 보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내가 마이크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를 간단히 적은 메모를 써서 봉투에 넣고, 그 봉투를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았다. 이것이 내가 남편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 해 마이크는 어떤 크리스마스 때보다도 크고 환한 함박 웃음을 얼굴에 담았다.

그의 환한 웃음은 그 뒤 크리스마스 때마다 계속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익명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마이크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삼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우리 집의 전통이 되었다. 어느 해에는 정신 장애를 겪는 아이들을 하키 경기에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했으며, 어느 해에는 추운 겨울에 집이 홀랑 불타 버려서 거리에 나앉게 된 형제에게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해마다 내가 마이크에게 선물하는 이 봉투는 우리 집 크리스마스의 하이라이트가 되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 선물은 가장 마지막에 개봉되었다. 아이들은 선물로 받은 새 장난감도 잊은 채, 올해에는 어떤 내용이 봉투에 들어 있을까 궁금해 하며, 봉투를 여는 아빠의 손길을 진지하게 응시하곤 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장난감은 좀더 실용적인 선물로 바뀌었지만, 흰 봉투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작년에 마이크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너무나 슬픔에 쌓인 나머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울 힘조차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자, 나는 언제나와 같이 흰 편지봉투를 트리에 매달고 있었다. 받을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트리에 봉투 세 개가 더 매달린 것을 발견했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세 아이들은 이심전심으로 아빠에게 보내는 선물을 각기 준비해 나무에 매달았던 것이다.

우리 집의 전통은 이렇게 확장되었다. 언젠가 나의 손자 손녀들이 그들의 엄마 아빠가 여는 하얀 편지봉투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낼 날도 곧 올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마이크의 정신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와 진정한 크리스마스 정신을 기억하기를 바라며.





크리스마스가 상업주의에 오염되었다는 우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서로 정을 주고받는 따뜻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각종 백화점과 할인 판매점에서 대박 터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디어는 우리에게 돈을 쓰라고 충동질할 것이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돈과 시간과 정성을 낭비해야 할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작은 선물을 마련하여 가족과 친지를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낸시 게이브 여사는 좀더 독특하면서도 가슴 따뜻한 방식으로 이 때를 기념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낸시 게이븐 여사의 선물처럼 완전한 익명도 좋겠고, 선물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을 사람 명의로 좋은 일을 하는 방법도 괜찮겠다. 이러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두 가지 점에서 매력적이다. 하나는 해마다 다양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는 것 말고도, 아주 구체적이고도 신선한 일을 얼마든지 벌일 수 있지 않을까. 그 아이디어를 궁리하는 동안이 정말 즐겁고 행복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받는 사람 처지에서도 이런 '사회적 선물'이 해마다 받는 지갑이나 넥타이보다 훨씬 즐겁고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는 이런 접근이 개인의 선의를 사회로 확산하는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사회적 사랑으로 확장하는 것. 이런 점에서,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러 이 세상에 온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 정신과 가까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일년 364일 나와 내 가족과 내 친구를 생각하며 달려 왔다면, 하루쯤 내가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크리스마스가 한 해의 끝무렵에 놓인 것은 그런 마음을 갖도록 한 배려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때요, 쉽죠? 좋은 선물 아닐까요?

 

덧글

  • 우유차 2007/11/27 17:49 # 답글

    말이 안 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글이 너무 예뻐요 ^^" 마음이 훈훈해지는데요.
  • 2007/11/27 18:4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마르스 2007/11/27 21:53 # 답글

    훈훈해지는 글이네요.
  • deulpul 2007/11/28 03:31 # 답글

    우유차: 내용이 예쁜 거겠죠? 저도 흐믓했습니다.

    비공개님: 둘이 합쳐 -가 되는 경우도 있다나... 하하-.

    마르스: 사연처럼 따뜻한 겨울을 나시기를-.
  • kirrie 2007/11/28 09:29 # 삭제 답글

    어제 오랫만에 친구와 술 한 잔 나눴습니다. 불콰해진 얼굴로 친구가 얼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본 내용이라며, 진화의 본질은 배려에 있다고 했습니다. 침팬치가 서로를 배려해서 전기철조망이 쳐 진 과수에 나무로 사다리를 놓아 다른 침팬치를 나무 위로 이끌었다고 했는데, 자연과학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배려'라는 것은 어쩌면 너무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아닌가 하면서도 겉으로는 슬쩍 웃기만 했습니다. 뭐 진화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은 연구자들에게 넘겨주지요.
    어쨌든 배려는 좀 더 나은 인격을 위한 개인적 소양이 아니라, 절실하게 인류가 다음 천년에까지 살아 남기 위해 필수적으로 깨달아 익혀야 하는 덕목이 아닌가 하고 이야기를 맺었습니다.

    거짓말같이 그 다음 날 들풀님의 블로그에서 또 낯익은 낱말을 만나는군요. 저는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배려를 이어 나가겠습니다. 이 글을 읽은 모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의 따뜻한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
  • 소년에이 2007/11/28 15:24 # 답글

    안녕하세요, 들풀님. 처음뵙겠습니다.
    포스팅해주신 따뜻한 글을 통해 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트랙백합니다.
    행복한 겨울 보내세요^ㅅ^
  • deulpul 2007/11/29 08:25 # 답글

    kirrie: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일기 같은 글을 쓰다보니, 일기 같은 덧글이 더욱 반갑네요, 하하-. 치열한 경쟁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태되면서 이루어져 온 것이 진화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 배려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은 정말 신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비록 비유적 의미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혹은 이를테면 시인의 눈으로 보는 진화의 한 측면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평가가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바람입니다. 함께 살아 남으려면 남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에 100% 동의합니다.

    비슷한 말씀이겠지만, 한 인격의 성숙도는 그 사람이 자신의 자원을 기꺼이 쓸 수 있는 사회적 거리에 비례한다고 믿습니다. 경제적 자원 뿐 아니라 시간이나 정성, 배려 같은 것도 다 포함되는 의미에서요. 저 자신도 잘 못하면서 그렇습니다. 이기심으로 꽁꽁 뭉쳐진 사람이나 오로지 남을 위해 삶을 사는 사람을 보면, 배려나 이타성이란 것이 우리 몸의 어디에서 우러나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소년에이: 반갑고 또 고맙습니다. 소년에이님 트랙백 보고,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분명히 남과 나눌 게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함께 즐거운 고민을 해 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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