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섞일雜 끓일湯 (Others)



인간이 세상과 자연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달을 다녀올 수는 있지만 달을 끌고 올 수는 없다. 별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별을 딸 수는 없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중에는, 이를테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봄을 강제로 동토(冬土)에 데려오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겨우내 하염없이 내리던 눈이 3월 들어 좀 잦아들고 해의 각도가 조금 높아지자, 드디어 땅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근 석 달 동안 눈에 두텁게 덮여 있던 대지가 가까스로 얼굴을 드러낸다. 비록 나무 밑동처럼 눈이 덜 쌓여있던 쪽부터지만, 기나긴 겨울이 물러갈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인 것 같아 여간 반갑지 않다. 눈을 몇 겹 덮고 숨죽이며 겨울을 났던 잔풀들이 희미하나마 여전히 녹색을 머금고 있어, 마치 하나도 변하지 않은 오래 전 동무를 다시 만난 듯 반갑고 대견하다.
그래도 봄은 아직 멀었다. 서성이는 바람 속에는 분명히 봄의 훈향이 배어 있지만, 시절은 여전히 겨울이다. 낮 온도도 기껏해야 0도 근처에서 더 오르지를 못한다. 유래 없이 길고 추웠던 겨울은 그 뒷자락마저도 예사롭지 않다. 하긴, 5월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가. 이번 같은 엄동(儼冬)이라면 수명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위세가 만만치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두터운 털목도리를 개어 넣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다.

"봄을 업어 옵시다"

상대가 너무 강하면 맞서기를 포기하게 된다. 이런 겨울과는 도무지 싸울 수가 없다. 혹한과 강풍과 폭설로 휘몰아 칠 때, 온기 서린 방 안에 틀어박혀 겨울잠을 자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사는 도시의 시민인 대런 부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만능 스포츠맨인 그는 지난 주에 추위가 조금 누그러지자 자전거를 타고 성급하게 운동을 하러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리를 절룩이며 자전거를 끌고 돌아와야 했다. 나서자마자 곧 눈과 얼음이 뒤섞인 구덩이에 처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드디어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체 이 길고 지루한 겨울은 언제 끝난단 말인가. 봄은 대체 언제 온단 말인가.

길고 긴 겨울에 넌덜머리가 난 부시씨는 대학 천문학과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겨울이 대체 언제 끝나는 겁니까. 봄은 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그가 들은 대답은 별로 낙관적인 것이 아니었다. 봄이 온다고, 혹은 왔다고 결정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목성의 인력 변화라든가 대양의 조류 변화라든가가 그것이다. 서너 달 동안 오장육부가 꽁꽁 얼어붙어 분통이 터진 부시씨에게는 목성이라든가 태평양, 대서양은 너무 먼 곳의 이야기였다.

부시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시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이거, 겨울 너무 지겹지 않습니까? 봄이 오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도무지 못 살겠습니다. 시장님도 동네방네 눈 치우는 데 아주 진저리가 나지 않습니까? 우리 그냥 봄 합시다. 봄이야 오든말든, 봄이 왔다고 우리가 그냥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이 도시의 시장은 처음에는 어이 없는 주장으로 생각했다가,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듣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너무나 지겹고 괴로운 겨울이었던 것이다. 시민들이 오죽 답답하면 이런 전화를 해온단 말인가. 어차피 올 봄, 몇 주 앞당겨 봄맞이를 선언한다고 해서 안 될 게 무어냐.

시장은 3월9일 일요일 오후 2시를 기해 이 도시에 봄이 시작된 것으로 선언했다. 예년보다 두어 주 빠른 시점이었다. 그 일요일, 낮 최고 기온은 여전히 영하 2도였다.

인간이 봄의 도래를 강제로 선언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온도와 강설과 해 뜨는 시간과 태양의 입사각 같은 데 적용되는 말이다. 사람의 심리에 관한 한, 봄의 선언은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서너 달 동안 희디 흰 세상만 보다보다 SAD(계절성 우울증)에 걸리고 마는 곳에서는. 시장의 말대로, 봄이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 상태인지도 모른다. 밖에서 눈보라가 몰아쳐도 우리 마음 속에 따뜻한 봄을 피워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교과서에서 본 신석정의 시가 생각난다. 이 시의 제목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 너머 남촌에서 불어오는 은근한 미풍에서 오는 것도, 1억5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태양의 화염에서 오는 것도 아닌지 모른다. 봄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를 줄 아는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의 따뜻한 체온 속에서.

덧글

  • 은혈의륜 2008/03/14 04:25 # 답글

    대런 부시씨는 재밋는 사람이군요 낄낄. 그런데 하염없이 내리는눈은 조금 부럽구뇽.-_ 제가 사는 펜실베니아의 동네는 눈이 작년대비로 해서 25%도 채 안왔습니다.....
  • deulpul 2008/03/14 04:47 # 답글

    시즌 오프 클리어런스 할인 대세일 합니다, 눈... 마음껏 퍼가셔요, 하하.
  • 섬백 2008/03/14 06:30 # 답글

    일년 내내 여름에 가까운 기후속에서 살고있는 제게는 또 신선한 감상이네요. 봄은 좋은거죠.
  • 2008/03/14 06:3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Charlie 2008/03/14 07:16 # 답글

    벌써 80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서부...라고 이야기를 꺼내면 '버럭!' 하실것 같아요. :)
    deulpul님 계신곳과 반쯤씩 교환할까요?
  • hotcha 2008/03/14 08:30 # 답글

    가을입니다.
  • deulpul 2008/03/15 05:20 # 답글

    섬백: 사계절이 뚜렷한 곳은 보기는 좋지만 살기는 역시 항상 따뜻한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을 맞는 즐거움이 없다는 점만 빼면요.

    비공개님: 정말, 한반도 대용광로라도 쏟아붓고 싶은 심정입니다.

    Charlie: 얼어붙은 동태가 어디 버럭이나 할 수 있습니까. (30+80)/2=55... 저야 언감생심이지만, 좀 손해보시는 거 아니세요?

    hotcha: 요즘 정서로는 애도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그쪽은 겨울이 그다지 혹독하지 않을테니 가을도 좋은 계절이 될 듯 싶습니다. 천고인비의...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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