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가 될지도 모른다 섞일雜 끓일湯 (Others)

가을비라고 해야 할까. 가을비지. 비가 하루종일 온다.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면 상쾌해진다. 그냥 비를 날것으로 맞으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우산이 없어서 후드를 쓰고 돌아다녔는데, 옷이 축축해져서 마음도 좀 축축해졌다. 작은 우산 하나 없을 뿐인데 온 세상이 모두 나를 외면하는 듯 하다.

버스를 타려고 어두운 거리에 섰다. 호주머니 안의 엠피3이 그 옛날 정태춘의 '얘기2'를 어느 구석에서 찾아 흘려냈다. 제목에 생각이 미치자, 오늘 얘기를 거의 하지 않고 하루를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아침 7시30분에 깨어서 열 다섯 시간 남짓 사는 동안, 내 입에서 나온 문장은 열 개도 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벙어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아니라 의미 있는 소통을 못하는 벙어리. 가만히 음성을 내어 보았는데, 목소리도 좀 낯설다.

괜히 마음이 급해져 정태춘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소리를 내고 있으니, 비록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누가 들었다면 실성했다고 할 것이었다. 성한 놈 되기는 어렵고도 어려운데, 미친 놈 되기란 지나치게 쉽다.

... 이 땅이 좁다고 느끼던 시절 / 방랑자처럼 나는 떠다녔네
이리로 저리로 목적지 없이 / 고단한 밤 꿈속처럼 나는 보았네
낙동강 하구에 심란한 갈대숲 / 희뿌연 안개가 감추는 다도해
호남선 지나는 김제벌 까마귀 / 뱃놀이 양산도 설레는 강마을
뻐꾸기 메아리 산골의 오두막 / 돌멩이 구르는 험준한 산계곡
노을빛 뜨거운 서해안 간척지 / 내 민족 허리를 자르는 휴전선을...

불현듯, 이런 정경이 펼쳐진 곳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솟구쳤다. 목적지 없이, 방랑자처럼, 좁지만 좁지 않은 우리 땅을 구석구석 떠다녀 보고 싶은 생각이 몰려왔다. 내가 종로 어딘가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나는 그냥 남부터미널로 가서 서산이나 김제나 구례나 보성이나 하동이나 진주나 경주나 제천이나 태백이나 동해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을지 모른다.

지금은 이 낯선 거리에서 낯선 버스를 기다리고 있지만, 언젠가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착한 후배들과 함께 다도해며 김제벌이며 꼭 가고 싶다. 사람 사는 곳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 땅과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함께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비는 계속 내리고 버스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덧글

  • 새녘 2008/10/08 20:05 # 답글

    저도 한 17일 이곳저곳 걸어다녀 본 적이 있어요. 사람 사는 곳이란 뭐 특별할 건 없더군요. 마음씨좋은 분들도 있고 성희롱하는 아저씨들도 있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그래도 사람이란 참 따뜻한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시골이든 도시든,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건 뿌리를 내리는 일인 것 같아요. 내가 사는, 나를 포함한 이 세상에 긍정과 애정의 뿌리를 내리는 일이요.
  • deulpul 2008/10/09 14:34 #

    정말 부러운 경험을 하셨군요. 물론 일부는 빼고. 뿌리를 내린다는 말,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뿌리를 찾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죠. 어딘가 썼나 싶은데, 젊은이라고는 아예 없는 시골에서 빈 집 앞엘 잠깐 있다가, 말 고픈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그 분들이 하신 말씀도 제게는 뿌리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죠.
  • 2008/10/09 01:03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8/10/09 14:35 #

    틀린 주소로 온 짐을 찾아가라고 그 틀린 주소에다 카드를 맡겨 놨다나요... 나 참.
  • 2008/10/10 11:4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8/10/10 14:00 #

    아, 저도 반갑습니다. 저는 4절을 특히 좋아합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의 싹을 찾아주는 듯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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