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지성'을 값싸게 보는 신문 섞일雜 끓일湯 (Others)

미국의 국제 정치 관련 잡지 <포린 폴리시>는 올해 5/6월호에서 '우리 시대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대중적 지식인' 1백명을 뽑았다. 이 리스트에는 교황 베네딕트 16세, 리처드 도킨스, 프란시스 후쿠야마, 폴 크루그먼, 움베르토 에코, 위르겐 하버마스, 바츨라프 하벨, 자끄 아탈리, J. M. 쿳시, 밍신 페이, 새뮤얼 헌팅턴, 월레 소잉카, 마리오 바르가스 로사, 무하마드 유누스, 오르한 파묵 등 우리가 이름 한 번씩은 들어보았음직한 저명한 지성이나 정신적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 노엄 촘스키도 빠지지 않았다.

<포린 폴리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성 중에서 1백 명을 고른 기준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현재 살아 있을 것,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을 것,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했을 것, 사회적 논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 이런 능력이 자기가 속한 국가를 넘어 세계 차원으로 미칠 것."

그러니까 과학적 성과라든가 학문적 업적 따위보다는 자기 분야의 성취와 사회적 영향력이 주요 기준이 된 셈이다.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이렇게 뽑힌 세계적 지성인 1백 명 중에서 지존을 딱 한 명을 뽑는다면 누가 될까. 최고의 지성인을 뽑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지성인을 뽑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포린 폴리시>는 해당호에 실린 지성인 1백 명을 대상으로 하여 온라인 투표를 실시했다. 혹시 1백 명 밖에서 추천하고 싶으면 추천할 수 있도록 했다. 온라인 투표는 4주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기간에 50만 명 이상이 <포린 폴리시> 웹사이트를 찾아와 투표에 참여했다. 그 결과는 다음호인 7/8월호에 실렸다.

페툴라 귤렌(Fethullah Gulen)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난생 처음 들어보신다면,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치는 사람의 이름조차 모르고 사는 셈이 된다. '세계 지성인 인기 투표' 결과,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은 이 터키의 이슬람 종교학자였다.

그러나 귤렌이라는 '세계 지성의 지존'을 모르는 게 당신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귤렌이 가장 많은 표를 받긴 받았지만, 온라인 투표였다는 점이 좀 문제였다.

온라인 인기 투표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다.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것은 투표자가 곧 전체(population)를 대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즉 투표 결과가 전체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포린 폴리시>가 온라인 투표를 하기 전, 5/6월호에서 1백대 지성을 발표했을 때, 터키 언론은 페툴라 귤렌이 여기에 포함된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한 신문은 이를 1면에 실었을 정도다. 따라서 터키 무슬림를 중심으로 한 많은 이슬람 교도가 귤렌이 1백대 지성에 포함된 사실과 곧이어 최고 지성을 뽑는 투표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표 몰아주기가 작동한 것이다. 실제로 귤렌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이 나가고 난 뒤 그를 지지하는 투표가 쇄도했다고 한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랄 수도 있다. 우리도 독도냐 다께시마냐, 혹은 동해냐 일본해냐는 투표가 벌어지면 CNN이든 NYT든 단체로 몰려가서 투표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슬람 교도의 집중력은 한민족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는 모양이다. 투표 결과 1위 페툴라 귤렌을 비롯하여, 1위에서 10위까지가 모두 이슬람 교도거나 이슬람 관련 지식인들이었다. 결과가 이렇게 나오면 주최측이 힘이 좀 빠지지 말입니다.

그래서, 1위에서 10위까지는 종교적, 혹은 민족적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보고 이를 제외해 보자. 11위가 누굴까. 바로 노엄 촘스키다. 특정 종교나 문화 그룹에서 촘스키를 전략적으로 밀었다고 보기 어렵고, MIT 학생들이 작정하고 단체로 투표했을 가능성도 극히 적으므로, 세계인 전체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이 잡지의 보편적인 독자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촘스키는 정평 있는 잡지에 의해 세계 1백대 지성 중 한 명으로 선택되었으며, 그 독자들에 의해 (실질적인)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뽑힌 셈이다. 다시 <포린 폴리시>의 선정 기준으로 돌아가면, 촘스키는 현재 살아 있고 공공 활동에 참여하며 자기 분야(언어학)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했고 그의 미국 정치, 특히 대외 정책 비판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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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좀 지났지만, 한 신문이 '촘스키가 비싸게 팔리는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 찬 초등학생의 독서 감상문 같은 글을 실었기 때문이다. 이 기명 칼럼을 빨간펜으로 첨삭 수정한다면 본문보다 수정문이 더 길어질 판이다. 내용은 이미 많은 분이 지적해 주셨으니 그냥 넘어가고, 어설픈 결론인 마지막 단락만 보자.

사상이나 이념도 자유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소비자들에 의해 선택된다는 점에서 한쪽으로 편향된 시각의 책만 나오는 지식시장은 건강하지 못하다. 하물며 한물간 좌파 지식인의 책을 그의 조국보다 훨씬 더 대접해주는 분위기는 촌스럽다.

이 기자는 출판 시장에서 나오는 책 자체가 사상의 자유 시장의 경쟁의 과정이자 결과이며 소비자에 의해 선택된 것이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지 궁금하다. '한물 간 좌파 지식인'보다 더 대접해 주어야 하는 이 기자의 '조국'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정권에 해가 될 우려가 있는 책이나 사상을 닥치는 대로 금하는 조국이 그가 그리는 조국인가? '좌파 지식인을 더 대접해주는 것이 촌스럽다'면, 사상과 출판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정신적 살인이다. 설령 내가 촘스키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살해당하기보다는 촌스러운 것을 얼마든지 선택할 것이다.

이 기자가 일하는 신문이 국방부에 의해 판금 조처되었다고 해도 이 기자는 이렇게 조국을 더 대접해야 촌스럽지 않다며 코딱지 후비는 소리나 하고 있을지도 궁금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이 기자가 일하는 신문은 아주 오래 전에 정권 탄압으로 인해 광고가 다 떨어지고 고난을 겪은 적이 있다. 그래도 이 기자는 정권에 쓴소리하는 신문보다 이 신문을 탄압하고 언론을 옭죄는 조국을 더 대접해 주어야 한다고 헛소리하고 앉았을까.

<포린 폴리시>의 사례는 촘스키가 '비싸게 팔리는' 것은 한국뿐이 아니며, 촘스키가 '비싸게 팔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며, 그의 영향력은 '한물 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잘 보여준다. 이 기자처럼 특정한 틀을 갖고 세상을 보는, 혹은 보게 된 사람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덧글

  • 2008/11/12 12:0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8/11/12 16:35 #

    그래서 오로지 (비교적) 건강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죠... 밉습니다, 하하-. 그러니 건강하지도 않고 천재도 아닌 사람은 얼마나 밉겠어...
  • 은혈의륜 2008/11/12 12:48 # 답글

    살다살다 촘스키를 저런식으로 까는 인간은 처음봅니다(...) 와 이게 알려지면 또 얼마나 개망신일까. 허허.....
  • deulpul 2008/11/12 17:21 #

    틀. 틀이 중요하죠. 그 틀에 재수없게 촘숙희양이 걸려 겁탈을 당한 것 뿐이지, 사실 촘숙희양을 특정해서 뭐라고 하잔 것도 아닌 듯 싶습니다. 찍어 놓고 비판하려면 적어도 연구는 좀 했어야 하니까요.
  • mooyoung 2008/11/12 13:28 # 답글

    들풀님덕에 촘스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읽어보았습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죠. 그리고 드는 생각, 미국이 이런 책을 놔뒀단 말인가라는 생각과 순간 찌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랐죠. 그리고 촘스키는 '지성인'이었습니다.
  • deulpul 2008/11/12 16:45 #

    우습죠. 촘스키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미국에서 촘스키는 자유롭게 유통되는데, 그가 한국 정권 나쁘다, 혹은 한국 군부 나쁘다 한 적 없는 한국에서 금지됩니다. 미국 국기인 성조기를 미국에서 미국 사람이 불태우면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지만, 한국에서 한국 사람이 태우면 한국 감방에서 징역 사는 꼬라지나 비슷한 양상입니다. 거지가 부자 망할까봐 노심초사 걱정해주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 ND 2008/11/12 16:23 # 삭제 답글

  • deulpul 2008/11/12 16:47 #

    빠를 빙자한 고도의 까 같기는 한데, 뭘 까자는 것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군요.
  • 일곱 혼돈 2008/11/12 16:58 #

    주... 주체사상! 우리식 자본주의!
  • AlexMahone 2008/11/12 16:25 # 답글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네요..

    그럼 "We ♥ Bush" 플랑카드 들고서 "한물 간 대통령을 그의 조국보다 훨씬 더 대접해 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허씨에게 묻고 싶네요..

    이분 성함 앞에 "폐"자가 붙으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휴~ 은혈의륜님 말대로 "리만브라더스"처럼 외쿡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렵습니다. 외쿡이나 촘스키가 알게 되면 "오해다"라고 할려나요? ㅡㅡㅋ
  • deulpul 2008/11/12 16:56 #

    위 러브 부시... 그건 촌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촌충스러운 것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저 분이 보시기에는 '순수한 마음에서 한 일'이므로 수십 억씩 지원해야 할 도회지스러운 일로 비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려질 일도 없지만, 혹시 알려진다 하더라도 이미 국방부 금서 지정에서 나라의 쪽을 다 팔아 뒀으니 대략 안심.
  • deulpul 2008/11/12 17:05 # 답글

    camino: 트랙백이 중복되어 걸린 것 같아서 앞의 두 개를 지웠습니다. 괜찮죠?
  • 키세츠 2008/11/12 17:21 # 답글

    사상이나 이념도 자유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소비자들에 의해 선택된다는 점에서 한쪽으로 편향된 시각의 신문만 나오는 지식시장은 건강하지 못하다. 하물며 한물간 수구꼴통 지식인의 신문을 그가 찬양하는 미쿡보다 훨씬 더 대접해주는 분위기는 촌스럽다.

    ..........랄까요. 흐음. 위의 문장에서 "지식인"이라는 단어도 좀 빼고 싶은데 그럼 문맥이 안 맞아서...
  • deulpul 2008/11/13 06:13 #

    말씀대로 그 분위기 참 촌스럽군요. 거꾸로 미쿡을 더 대접해 준다고 해도 아햏햏하고요. 원문이 앞 문장과 뒷 문장 간에 전혀 논리적 호응이 없어서, 뭘 갖다 끼워 놔도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2008/11/12 18:43 # 삭제 답글

    앞쪽부분은 절로 미소가 나오는 글이지만 뒷부분은 너무 심한 인신공격이 된 듯 합니다.
    조국을 지적하신 부분은 약간 논지에서 벗어난게 맞다면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요?
    그나자나 하버마스님이 살아계셨군요 .. 오오...ㅋㅋ
  • deulpul 2008/11/13 06:45 #

    꼼꼼히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좀 그렇죠?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개인 블로그도 아니고, 자칭 백만이 넘는다는 독자가 보는 신문에 '한물 간 좌파 지식인' 운운 한 톤이나 크게 다를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갔습니다. 저 사람들의 세계관은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으므로, 오크와 비슷하다면 덕담으로 생각하고 좋아할 사람도 많지 않을까 싶네요. 조국은 왜 그렇게 느끼셨는지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답변하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 자그니 2008/11/13 01:49 # 답글

    이젠 그쪽 신문은 굳이 안읽으셔도 됩니다...;;; (응?)
  • deulpul 2008/11/13 06:51 #

    그렇지 않아도 하는 꼴이, 수드라에서 하리잔이나 달리트로 신용등급 하락일로에 있군요...
  • silent man 2008/11/13 23:04 # 삭제 답글

    촘스키 할아부지는 다른 얘기하시는 게 참 좋긴한데, 막상 언어이론에 대한 책은 계속 '봐야지, 봐야지'만 하며 미루고 있네요.
    ㅡ.ㅡ;
  • deulpul 2008/12/02 18:14 #

    생산성이 좋으셔서 '다른 얘기' 따라가기도 쉽지 않은...
  • nohmad 2008/11/27 14:10 # 삭제 답글

    기자의 글에서 '조국보다'는 '조국에서보다'의 의미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촘스키와 조국을 비교대상으로 놓으면 이상하니까요. 글의 전체적인 논지 또한 촘스키 유행이 그의 조국인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강한 것에 딴지를 거는 거구요.

    저 글의 필자는 확실히 출판시장의 메커니즘에 무지하거나 또는 일부러 은폐한 것 같습니다. 독자들의 출판시장에서의 선택 이전에 출판시장의 선별(filtering)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한국에는 우편향 서적(?)을 돈주고 살만한 독자층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부끄러운 사실은 지적할 생각이 없다는 거죠.
  • deulpul 2008/12/02 18:23 #

    네, 정확하게 보셨으며, 문제 글의 필자가 하려는 이야기를 당사자보다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이 필자는 '촘스키 vs 국방부=조국'이라는 구도로 본 모양입니다. 출판 관련한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 LieBe 2009/01/03 13:04 # 삭제 답글

    글 잘 읽었습니다...

    민노씨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 좋은 글들이 참 많은거 같습니다..

    앞으로 자주 방문하여 배우겠습니다...
  • deulpul 2009/01/03 16:19 #

    반갑습니다. 배우시긴요, 제가 그래야 할 듯한 걸요. 트랙백하신 글도 잘 보았습니다. 저는 그냥 성질만 벅벅 냈는데, 꼼꼼히 쓰신 글과 잘 연결을 시켜 두셨네요. 생각을 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JNine 2009/01/03 16:49 # 삭제 답글

    저도 민노씨와 LieBe님의 칼럼에서 넘어와 읽게 되었는데, 얼음집에 사시는 분들 중 숨은 고수가 많으신데 얼음집에 사시는 분들은 메타에 잘 등장을 안하셔서;;;(은둔형)
  • deulpul 2009/01/05 15:56 #

    앗? 반갑습니다. 유명한 분들 효과가 막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즘입니다. 은둔형은 좋게 봐 주시는 표현이고, 정답은 듣보잡... (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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