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소년사 8: 창 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연결連 이을續 (Series)

음악에 유행이 있으니, 노래도 시간이 지나면 그 곡조를 기억하고 흥얼거리는 사람이 적어진다. 그러나 이즈음과 같은 연말이면 잊지 않고 찾아 오는 캐럴은 다르다. 마치 11월 달력을 찢어내면 언제나 하얀 설경이 나타나듯이, 12월 달력 속에서는 언제나 캐럴이 흘러 나온다. 해마다 들으니 물릴만도 한데, 들으면 언제나 반갑다. 노래 자체가 명곡이어서라기보다, 철부지 때 기쁘고 즐거이 들었던 노래들이라 그런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노래란, 가사와 곡에 개인의 삶까지 엮여야 비로소 의미 있는 노래 하나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년이 연말이면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캐럴 중에서 '창밖을 보라'를 특히 기억하는 것도 그런 연유라 할 수 있었다.

소년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에 서울 학교로 전학을 왔다.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이 스스로 서울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보다는 소년의 어머니가 나서서 6학년 여름방학 중에 급히 전학 절차를 밟은 게 사실에 가깝다. 전학 시키는 일이 전학하는 당사자만큼이나 지겨우실 만도 한데, 초등학교가 끝나가는 판에 굳이 다시 학교를 옮기도록 한 것은 오로지 교육입국의 신조를 가지고 계신 탓이라고 보아야 했다.

2학기를 시작하는 첫날, 새 담임 선생님에 이끌려 낯선 교실에 들어선 소년은 질리고 말았다. 교실 안에 가득 찬 사람 때문이었다. 아이들로 빼곡히 찬 교실은 여백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전학오면서 받은 번호는 79번이다. 이 학급은 이미 아이들 78명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소년은 여기에 하나를 더한 셈이었다. 선생님이 간단히 소개를 하는 동안, 156개의 눈이 일제히 소년을 향했다. 156개 눈은 파도가 되어, 교단에 오두마니 서 있는 소년을 덮치듯 밀려왔다.

전학 첫날 첫 시간에 맞닥뜨린 이 초과밀 학급의 위압적 이미지는 소년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소년의 부모는 몰랐지만,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소년은 한동안 이 이미지에 시달렸다. 시골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운동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를 하는 아이를 맞닥뜨릴 때라든가, 전교 1등을 한다는 아이 옆을 지나칠 때, 소년에게는 교실에 꽉 찬 사람의 물결이 자신을 향해 밀어닥치는 환상이 떠오르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충격은 약해졌지만, 소년이 이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중학교 3학년 가을이나 되어서였다.

소년은 친구를 사귀면서 새로운 세상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분명 서울 아이들은 입성이 좀 다르고, 덩치가 큰 아이들이 교실 뒷쪽에 진을 치고 있는 것도 좀 달랐다. 이것은 낯선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이 있었다. 서울 아이들도 축구를 했다. 운동장에 금을 긋고 하는 놀이는 시골과 전혀 다른 종류였지만, 축구는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서울 친구들과 공을 차며 조금씩 친해졌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공을 차지 않았다. 따라서, 시골 소녀들보다 대체로 좀더 어른스러웠던 서울 소녀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노는지 소년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파브르 곤충기에 나오는 꿀벌들처럼, 소녀들은 과밀 학급 안 어디에서나 붕붕거리며 살았지만 그들의 세상은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서울은 낯선 세계였으며, 서울 소녀들은 그 낯선 세상의 가장 먼 끝 동네에 살았다.

2학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점심 시간이었을 것이다. 공 여러 개와 아이들과 먼지와 함성이 뒤엉킨 좁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소년은 같은 반의 한 여학생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와 함께 잠깐 교장실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무실도 아니고 교장실을? 뭐를 잘못했나? 소년이 물어보니 소녀는, 그저 담임 선생님이 가라고 했다고만 말했다.

교장실에 갔더니 다른 반에서도 아이 두엇씩이 와 있었다. 응접실 소파에는 교장 선생님과 직함이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선생님 서넛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돌아가며 아이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아직 공을 차던 숨을 고르지 못해 씩씩대던 소년은 대체 이런 질문을 왜 하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질문이 대충 끝나고 아이들을 둘러보던 선생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럼, 이 중에서 이번 학기에 학교 일을 할 임원을 정해서 알려줄테니 모두 그렇게 알도록. 돌아들 가라."

말하자면 2학기 학교 임원을 뽑는 면접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말을 듣고 나서였다. 소년은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던 낡은 반바지가 창피해졌다. 게다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얼굴에 삐질삐질 땀까지 흘리고 있지 않았던가. 창피하다, 창피해.

그러다 갑자기, 소년은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서 그랬구나.

아까 교장실로 올 때 일이었다. 소년은 자신을 부른 소녀와 함께 복도를 걸어 교장실로 향했다. 아직 학교 구조도 모르는 터라, 소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갔다. 그 전에 소녀와는 말을 나눠본 적도 없었다. 이름도 잘 몰랐을 때였으니까.

복도를 걷던 소녀가 말했다. "너 무릎에... 무릎 봐라."

소년이 자기 무릎을 내려다 보니 한 쪽이 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대개 소년의 나이란, 망아지 뛰듯이 제 좋은 일을 미친듯이 하다 보면 어디가 깨지고 다쳐도 알지 못할 때인 것이다.

"음, 축구하다 다쳤는데, 안 아프다."

갑자기 소녀가 멈춰 서더니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소년은 손수건이라는 낯선 소품이 등장한 데 놀랐다. 손수건이라니. 서울 여학생들은 손수건도 갖고 다니는구나. 저렇게 예쁜 호주머니에서 이렇게 예쁜 손수건이 나오네.

"이거로 닦아."
"괜찮다."
"아냐, 닦아라. 흙도 좀 털고."

소년은 거역하지 못하고 손수건을 받아서 대충 피를 닦고 흙먼지도 털어냈다. 손수건에는 소녀의 따뜻한 체온이 배어 있었다. 아, 예쁜 손수건이 더러워지는구나. 집에 가면 혼날텐데.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소녀는 왜 교장실을 찾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니, 소년만 빼고 모든 아이들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소년은 아직은 낯선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했으면,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서 닦으라고 했을까. 뒤늦게 이런 생각에 미치자, 소년은 임원을 뽑는다는 선생님 말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창피해졌다. 교장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소년의 얼굴이 새빨갰던 것은, 아득히 먼 서울 소녀들의 세상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그 소녀가 건넨 손수건 탓임이 틀림없었다.

그 일 뒤, 손수건 소녀는 다시 서울 소녀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좀 친해졌을 법도 하고 무언가 이야기도 제법 나누었을 만한데, 소년의 기억에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소년은 학교에서 놀다 집에 갈 때는, 학교 근처 시장에서 큰 장사를 한다는 소녀의 집 쪽으로 일부러 돌아 갔다. 그 시장 거리를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눈여겨 보는 일이 소년의 습관이 되었다.

겨울 방학이 다가오자, 담임 선생님은 우리 반만의 학예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학기말쯤을 겨냥해, 노래와 춤과 촌극을 준비해보라는 것이었다. 학예회라고는 하지만, 79명이 모두 나서서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소년을 포함한 아이들 대부분이 '관객' 역할을 맡기로 하고, 몇몇 아이들이 며칠 동안 연습을 했다.

방학식을 하는 날 열린 학예회에서 아이들은 즐겁게 놀고 즐겁게 보았다. 대학생 형들이 부르는 노래도 나왔고, 옛날 이야기를 각색한 촌극도 선보였다. 그러나 단연 소년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손수건 소녀를 비롯한 여학생 네 명이 불렀던 '창밖을 보라'였다. 아이들이 빽빽히 찬 교실, 그 좁은 교단 위에서 손수건 소녀는 다른 세 소녀와 함께 율동을 하며 노래불렀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겨울이 왔다
썰매를 타는 어린이들은 해 가는 줄도 모르고
눈길 위에다 썰매를 깔고 즐겁게 달린다
긴긴 해가 다 가고 어둠이 오면
오색 빛이 찬란한 거리거리에 성탄빛
추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마음껏 즐기라
밝고 흰 눈이 새 봄빛 속에 사라지기 전에

소년이 이 노래를 그 전에 들어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네 소녀가 맑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낯설고 새롭게 들렸다. 소년이 듣기에 이 노래는 참 도회지적이고 서울다웠다. 이 노래에서는 며칠 전에 친구들을 따라 가 본 명동의 백화점 같은 분위기가 났다. 그리고 이 노래는 손수건 소녀와 참 잘 어울렸다. 노래 속에 나오는 흰 눈, 그것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 주던 하얀 얼굴 소녀의 하얀 마음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길고 지루한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을 보내고 2월에 졸업식을 한 뒤, 소년은 손수건 소녀와 영원히 헤어졌다. 한 학기를 낯선 학교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동안 겨우겨우 생기기 시작한 실낱 같은 인연의 끈들은, 밝고 흰 눈이 새 봄빛 속에 사라지듯 졸업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겨울은 어김없이 오고, 겨울이 오면 흰 눈은 어김없이 온다. 흰 눈이 오면 서울다운 캐럴 '창밖을 보라'가 거리에 흘러 나온다. 이 노래는 소년에게 아이들로 꽉 찬 교실, 그 앞에서 율동하며 노래하던 손수건 소녀, 그가 내밀던 따뜻한 손수건 따위를 기억케 한다. 졸업과 함께 봄빛 속의 흰 눈처럼 사라진 소녀는 노래 속에서 살다가, 연말이면 잠깐 나타나 그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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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대밋 2008/12/03 11:42 # 답글

    오옷. 멋진 글입니다. 창밖을보라를 들으면 정말 그런 기분이 듭니다. "오색 빛이 찬란한 거리거리에 성탄빛"이라니, 시골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광경 아닙니까. 게다가 "추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마음껏 즐기라"라는 말은 어찌 그리 매혹적인지요. 겨울의 축제, 한 시즌이 완료되는 충만감과 아쉬움, 그리고 이것저것 걱정 말고 그냥 즐기자..는 대담한 말투.
  • deulpul 2008/12/04 08:52 #

    그러고 보니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나 '한 잔 먹세그려... 무진무진 먹세그려'에 깃들어 있는 대인배 기질을 계승하는 캐럴이군요. 개인적으로는 '추운 겨울이 다 오기 전에 마음껏 즐기라'는 주의인데, 오늘처럼 세상이 눈으로 덮인 겨울날이면, 오로지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충만한 기운과 독특한 정취가 물씬물씬 솟아나서,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땐 동무들과 신나게 눈싸움 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음... 지금도 할 수는 있지만.
  • 황소걸음 2008/12/04 23:50 # 삭제 답글

    날 춥습니다. 단디 여미고 따뜻한 겨울을...
    세상에서 캐더린 제타존스 다음으로 이쁜 여자랑 살면서
    (설마 이 표현 땜에 미움을 받지는 않컸지^^)
    어찌 그리 옛날 여자들 생각이 많으신지요...

    가끔은 이 몸 생각도 나실랑가...
    (겨울투정...^^)
  • deulpul 2008/12/09 09:21 #

    아니, 캐더린 제타존스보다 더 예쁜 여자랑 사시므로 옛 생각이 안 난다고 자랑하시는 겁니까!! 음... 선플 운동의 흐믓한 장면을 보는 듯 하군요, 하하-. 생각 뿐입니까. 곧 몇 자 적어 올리겠습니다.
  • 김준 2009/12/14 19:06 # 삭제 답글

  • deulpul 2009/12/15 09:39 #

    한 자라서 행간을 읽을 수도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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