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 동안, 늙지 않는 노안 섞일雜 끓일湯 (Others)

예전부터 나이보다 어리게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자랑이 아니다. 어린 놈이 어리게 보이면 무슨 대수리요만은, 나이 적당히 먹었는데도 어려 보이는 것은 불편한 경우도 많다. 사회 생활 할 때 특히 그렇다. 초면의 사람 사이에서도 나이를 기준 삼아 질서를 세우기 일쑤인 한국 사회에서는, 어려 보이면 닥치고 일단 한 수 접고 보려는 사람이 태반이다.

미국에 와서는 외모로 드러나는 나이에 신경쓸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 나이를 말하면 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내가 어려 보여서라기보다 이 사람들이 동양인 나이를 잘 짐작하지 못해서이다. 우리도 그렇잖은가. 백인이나 흑인 나이를 정밀하게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식품점에서 맥주를 사서 계산하면 점원이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 알콜 음료는 21세 이상이 되어야 살 수 있다. 아, 이 얼마나 기쁜 상황인가. 내가 어려 보이긴 한 모양이네, 호호홋.

물론 이것은 착각이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계산을 위해 줄을 서면서 지켜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이가 어중간한 동양인들은 대개 다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우리가 보기엔 안 그래도 될 분들에게도 그랬다. 즉 손님이 어려 보여서라기보다, 만에 하나 under-age에게 술을 팔다 걸리면 골치아프니까, 짐작도 잘 안 가는 족속, 그냥 대충 다 민증 까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으면 기쁘기는커녕 귀찮기만 했다.

그런데 말이지. 언젠가부터 신분증 내놓으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대충 일제 단속하듯이 신분증을 요구하는 데서 열외가 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부지런히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동안(童顔)의 약발이 다 했단 말인가. 그리하여, 이제는 술독을 지고 나가도 얼굴만 보고 안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단 말인가. 동양인 나이 잘 짐작하지 못하는 점원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대충 넉넉히 잡아 둔 범위에서조차 벗어나는 아웃라이어가 되었단 말인가.

한편 생각해 보니, 이즈음에 내가 술을 사러 다닌 일이 매우 드물다. 어쩌다 한 번 가면 한 번에 왕창 사서 쟁여놓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술 먹을 일이 없다. 소비량이 크게 줄은 것인데, 그래서 술 사러 가는 일이 두어 해 전이라면 열 번이었을 게 지금은 한 번 정도다. 그런 연유로, 식품점에서 신분증을 꺼낼 일이 줄어들었다고 느낀 것일까.

또 한편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도 있다. 최근에 갑자기 나를 보고 "Sir! Sir!" 하는 놈이 많아진 듯 하다는 점이다. 샌드위치 싸 주는 놈도 그러고, 도서관에서 책 대출해주는 놈도 그런다. 말하자면 경어요 존댓말인데, 이 말을 버스에서 노인네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 아니면 새로 자대 배치된 이등병이 소대장에게 신고할 때나 쓰는 것으로 간주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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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한국을 가면 몇 년 만에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오랜만에 만나면 그 세월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사람도 있고, 그제나 이제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팽팽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다. 동안들은 늙고 노안들은 늙지 않는다. 어려 보여서 부러움을 사던 동안들은 대개 불쑥 성숙한(?) 면모를 하고 있는가 하면, 원래부터 나이들어 보이던 사람들은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그래프를 그려 봤다.


그래프에서 X축은 실제 나이, Y축은 겉모습을 근거로 하여 인지된 나이(perceived age, PA)이다. 일차함수 직선 A는 실제 나이와 남에게 보이는 나이가 거의 유사하게 진행되는 경우다. 붉은 선 B는 동안, 파란 선 C는 노안이다. 점선 D는? 물론 벤자민 버튼이고.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고르게 늙어가서, 언제나 남이 제 나이로 봐 주는 경우(A)는 실제로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세상은 흔히 살기가 너무 고단하거나 너무 재미있어서, 나이보다 더 늙기도 하고 더 젊기도 하다. 혹은 화장품이라든가 노화 방지제 등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1. 인지된 나이는 일차함수로 고르게 전개되지 않고 점증과 급증의 이원 구조로 전개된다. 여기서, 급증 부분이 우리의 주요 관심사가 된다. 외형적 노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부분, 쉽게 말해 갑자기 팍 늙는 것인데, 이런 과정은 인생의 어느 연령대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

2. 노안(C)은 급증 과정이 일찍 시작된 경우다. 일찌감치 얼굴이 늙어버리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에는 얼굴이 정말 늙어서 별명이 '늙은이'였던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얼굴이 이미 늙어 있기 때문에, 그 뒤로 얼굴 나이가 별로 들지 않는다.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충격의 정도가 약하달까.

3. 동안(B)은 실제보다 나이가 어려 보인다. 이런 축복이 평생 가면 좋겠지만, 또 그런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들도 언젠가는 늙는다. 이들이 연령 저평가 상태에서 평균 평가 상태로 올라올 때는 PA 급증 현상이 발생하며, 이 때 상당한 심리적 충격을 동반하게 된다.

4. 이 때, PA값은 급상승하는 데 비해,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는 심리적 나이는 제 자리에 머물려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둘 사이에 격차가 발생하며, 이 격차 역시 급증하게 된다. 이 괴리는 상업적으로 주요한 공략 대상이 되며, 어떤 경우 '언제나 청춘(forever young)'으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는 간단히 주책으로 인식된다. 개인의 취향과 개성에 대한 사회적 용인이 커짐에 따라, 이러한 격차에 대한 수용도도 높아지는 추세이긴 하다.

5. 어떤 시점(그래프에서 녹색 수직선으로 나타난 T1)에서 동안 B와 노안 C를 만났다고 해 보자. B는 처음 볼 때 나이가 어려 보이고 젊어 보인다. 이에 비해 노안 C는 무척 나이가 들어 보인다. 몇 년 뒤(T2) 두 사람을 다시 본다. C는 변한 게 거의 없다. 그의 얼굴에서는 세월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젊어 보이던 B는 크게 달라졌다. 그래도 PA값은 여전히 B가 C보다 적지만, PA값의 변화량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우리는 심리적으로 B가 C보다 더 늙은 것처럼 여기게 된다.

6. 그래서, 노안은 안 늙고 동안만 늙는 모양이다. 동안이 "어쩜 이렇게 젊어 보이나요"의 축복이라면, 노안은 "어쩜 이렇게 안 늙나요"의 축복이랄까. 어쨌든 인생은 나이나 세월에 관해서, 그리고 오직 그것에 관해서만은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동료에게 말했다.
"요즘 이상해. 왜 나보고 자꾸 sir, sir, 그러지?"

동료는 위로는 못할망정, 이렇게 이야기해서 더 염장을 질렀다.
"아... 그 참 이상하군요. 그런 경우 드문데..."

 

덧글

  • 트렌드온 2009/03/22 15:14 # 삭제 답글

    ㄷㄷㄷㄷㄷㄷㄷ

    저도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소리를 간혹 듣곤 하는데.

    말씀하신 것 처럼 그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더군요. ^^
  • deulpul 2009/03/22 17:09 #

    얼굴이 좀 늙어보여야 유리한 때나 장소가 꼭 있죠. 그럴 땐 좀 불리합니다. 여행 가서 혼자 소주 마시려 했더니, 식당 주인 아저씨가 '새파란 넘이 싸가지 없이...'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시던 기억이 납니다. 흠... 그 때가 그립군요, 하하-.
  • axon 2009/03/22 15:48 # 삭제 답글

    그래도 그래프만 보자면 늙는 동안이 늙지않는 노안보다는 죽을때까지 젊게 보이는군요.
  • deulpul 2009/03/22 17:13 #

    그런데 많은 사람이 젊고 쌩쌩한 모습을 기억하는 탓에, 이들이 보기에는 실제보다 훨씬 더 폭삭 늙은 것으로 보인다는 게 좀 문제랄까요... 마치 흰색 위의 회색이 더 검어 보이듯이.
  • mooyoung 2009/03/22 19:43 # 답글

    음.. 동안의 분(憤)함은 동안만이 알겠죠! 적어도 제 나이대로는 보이고 싶은 갈망(!) , 지금은 그동안의 노력(?)이 있었던지 나이보다 과분한 대접을 받는다는... 흠... 그렇죠, 심리적 충격을 받죠.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반성을 하게도 하더군요. 빨간선이 가슴을 찌르는군요.음..
  • deulpul 2009/03/23 03:07 #

    오, 동안이셨던 분이 많군요. 동병상련이어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 모두 공주병일지도... 남들이 인사치레로 한 말을 정말로 믿는다. 하하-.
  • deulpul 2009/03/25 11:06 #

    물귀신 작전이 필요할 때다...
  • mooyoung 2009/03/25 11:37 #

    들풀님의 공주병에 업힐 생각 없다는 무영의 생각.ㅋㅋㅋ
  • mooyoung 2009/03/25 11:43 #

    철자가 틀려서 수정했는데 모양새가 이상해졌네요. 앗! 우리는 맞춤법이라고 하죠?
  • 2009/03/23 03:0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9/03/23 03:09 #

    선배, 앗 뜨거라 놀라서 댓글을 비공개로 했습니다, 하하. 괜찮죠? 곧 연락 드리겠습니다.
  • 2009/03/23 16: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9/03/25 11:07 #

    헙, 그럴리가요. 그런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쯔압. 연락 드릴께요.
  • used-P 2009/03/24 09:32 # 답글

    동안은 기울기가 있는 그래프, 노안이거나 서양인의 경우는 메뚜기(곤충류)의 변태 직각 그래프 :)
  • deulpul 2009/03/25 11:10 #

    탁월한 해석이군요. 변태하면 그야말로 환골탈태니... 변태의 결과가 좀 부정적인 데 대해서는 안타깝습니다.
  • Harry 2009/03/25 21:42 # 답글

    저는 나이에 비해서 +3~5 년의 오차를 가지고 있어서.. 가끔 슬프답니다..
    40대에 가까워지면 오히려 저같은 타입들이 동안이 된다는 말을 굳게 믿고있습니다.. ㅎㅎㅎ
  • deulpul 2009/03/29 10:38 #

    네, 시간이 지나면 중요한 것은 변화량이지, 초기 출발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상대적으로 점점 젊어지시는 겁니다, 하하-.
  • min 2009/03/27 14:32 # 삭제 답글

    글 처음 남깁니다.
    나이를 먹고 보니 홍안의 젊은이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될 것 같더군요.
    선배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예전에 한겨레 칼럼 하나가 생각납니다.
    지금이야 동안 뭐 이런 것이 새롭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글 내용이라기보다 글과 사진의 부조화가 흐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912.html
  • deulpul 2009/03/29 10:42 #

    허! '동안 선발대회'라는 것도 있었단 말입니까. 정말 인간(과 상업주의)의 조야한 상상력은 끝이 없네요. 그나저나 이 칼럼은... 왜 이렇게 큰 사진을 썼대요? 하하-.
  • 박혜연 2009/05/13 22:19 # 삭제 답글

    어릴때부터 타고난 노안인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폭삭 늙는일이 전혀없다고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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