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식 수류탄이 해체되듯이 미국美 나라國 (USA)

과거는 종종 예기치 않은 계기를 통해 현재에 모습을 드러난다. 과거의 역사가 현실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것인데, 최근에 내가 사는 지역의 폭발물 처리반이 바빠진 것도 그런 경우의 하나라 할 수 있다.

2차대전(1939~1945)은 70년 전에 벌어진 전쟁이다. 미국이 전면 개입하게 된 1941년 이래, 종전 때까지 미군으로 근무한 미국인은 1천600만 명이다. 이들을 통틀어 2차대전 참전 용사(World War II veterans)로 간주한다. 실제 전쟁에 참여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의 막바지인 1945년에, 17세 소년이 참전했다고 치자. 그의 현재 나이는 81세다. 이 사람은 2차대전 참전 용사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할 것이다. 참전 용사 1천600만 명 중에서 현재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250만 명 정도이며, 거의 모두가 80~90대 노인들이다. 수명 한계점에 도달함에 따라 이들도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미국 보훈처의 추산에 따르면, 2차대전 참전 용사들은 현재 하루에 1천 명 정도가 사망한다. 앞으로 11년 뒤인 2020년이면 이들이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체험과 기억으로서의 역사가 또 한 장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폭발물 처리반이 바빠지는가? 참전 용사들이 숨지고 나서,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각종 무기와 폭발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책장에서 나온 수류탄과 포탄들

2월 초에 내가 사는 지역의 경찰은, 혼자 사는 80대 노인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가족의 신고를 받았다. 집 문을 따고 들어간 경찰은, 거실 의자에 앉은 채 사망한 노인을 발견했다. 그는 2차대전 참전 용사로, 조지 패튼 장군 휘하의 제3군 제8 기갑사단에서 포수로 근무했다. 집안을 둘러보던 경찰은, 책장 위에서 안전핀이 그대로 꽂혀 있는 수류탄을 발견했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폭발물 처리팀은 이 집에서 155밀리미터 포탄과 바주카 포탄을 더 찾아냈다.

한 여성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 나온 수류탄을 며칠 동안 차 뒷좌석에 싣고 다니다 소방서에 신고하기도 했다. 이 여성은 오래된 수류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소방서는 신고를 받자마자 주차장의 다른 자동차들을 황급히 소개해야 했다. 어떤 곳에서는 경매 행사가 벌어지는 자리에 1차대전 때의 수류탄과 2차대전 때의 박격포탄을 들고 들어온 할머니 때문에, 경매장이 급히 폐쇄되고 참가자가 모두 대피하는 소동을 겪었다.

어떤 노인의 집에서는 일본군 수류탄이 발견되기도 했다. 삼촌이 돌아가신 뒤 집을 정리하다 이 수류탄을 발견한 조카는,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랐다. 그가 이 수류탄을 친구 집에 가져갔을 때, 친구는 깜짝 놀라서 급히 경찰에 신고했다. 폭발물 처리팀에 따르면 이 수류탄이 아직도 폭발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전쟁터에서 살아 남은 뒤 집으로 돌아오는 군인들은, 전장에서 쓰거나 노획한 소품을 참전 기념품 삼아 가져 오는 경우가 흔했다. 독일 깃발, 일본기, 독일군 철모, 수류탄, 대검, 루거 권총 등이 단골 기념품이었다. 참전 용사들의 집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2차대전 기념품은 오른쪽 그림과 같은 수류탄. 작고 가벼워서 간단히 들고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참전 기념품(wartime memorabilia)으로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오른쪽은 2차대전 때 미군이 사용한 Mk-II A1 수류탄.)

노병과 함께 사라지는 전쟁의 추억

왜 이런 비공식 전투 기념물들은 참전 용사가 죽은 뒤에야 발견되는 것일까. 그냥 책장이나 선반 위에 올려두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만 아는 곳에 감추어 두기 때문이다.

폭발물을 집안에 보관하는 것을 반기는 가족은 별로 없다. 참전 용사들이 수류탄이나 포탄을 들고 돌아오면, 부인들은 대경실색하여 갖다 버리라고 성화를 하기 일쑤다. 그러나 남자란 동물들은 이런 걸 가끔씩 만져 보고 주물러 보며, 자신이 참여했던 역사의 한 장면과 그 속에서 어우러졌던 젊은 자신과 전우를 추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폭발물들은 지하실이나 차고 작업실 등, 부인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으슥한 곳에 비장되게 마련이며, 당사자가 죽고 나서야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다행히 이런 전쟁 기념물이 폭발하여 큰 사고를 일으킨 사례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화학 약품에 따라서, 어떤 종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케케묵은 기념품이라고 만만하게 볼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전쟁 기념물은 한 세대의 소멸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것도 보통 세대던가. 대공황 때 태어나 2차 대전에서 싸웠던, 이른바 '가장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라 불리던 이들이 아니던가. 위대하든 초라하든 세월은 가고, 그들의 현재는 우리의 과거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손때 묻은 세열 수류탄이 해체되어 사라지듯이.

수류탄 그림: www.sproe.com/g/grenade-us.html

덧글

  • 댕글댕글파파 2009/03/29 12:19 # 삭제 답글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군요. 사고가 일어난 적은 없다니 다행이네요. 왠지 밴드오브브라더스가 다시 보고 싶어지게 하는 글입니다. 루거를 좋아하는 그 병사가 기억이 나네요.
  • deulpul 2009/03/29 13:54 #

    노병들이 사라질 뿐 아니라 실제로 사망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므로, 위의 스토리도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왜 '하루에 1천 명씩 죽는다'거나 '혼자 살다 의자에 앉아 죽었다'는 부분이 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유명한 미니시리즈는 소문만 듣고 아직 보지는 못했군요. 언제 하루 날 잡아서 그냥... 그러다가는 (시간상으로) 파산하겠습니다만.
  • 슈타인호프 2009/03/29 14:21 # 답글

    한국에서도 저런 사례가 꽤 있었지요. 요즘은 보도가 잘 되지 않지만, 예전에는 불법무기 신고기간이면 한국전쟁 때 칼빈, 광복군이었던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권총...같은 게 신고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곤 했습니다.
  • deulpul 2009/03/29 14:43 #

    넵, 한국도 바로 이 땅에서 직접 전쟁을 겪은 터라, 저도 자료 조사하면서 한국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은 'TV 진품명품'으로 가져 가려나... 또 한 가지, 한국의 전쟁 세대도 역시 얼마 뒤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생한 전쟁 문학 하나 충분히 만들어 놓지 못한 상황에서, 체험과 증언으로서의 역사가 개인 차원에서 머물다 사라지고 만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 코코볼 2009/03/29 14:43 # 답글

    오 저거 신기하군요.
  • deulpul 2009/03/29 14:47 #

    지시어의 대상이 좀... 설마 수류탄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 코코볼 2009/03/29 14:48 #

    그럼요... 무기를 집에다가 두고 있는 사람이 저렇게 많을줄은 몰랐죠.. 총기라면 모를까 폭발물이라니...
  • deulpul 2009/03/29 15:08 #

    에... 당시로서는 전역하면서 깔깔이 들고 나오는 정도 아니었을까요? 하하-.
  • 문제중년 2009/03/29 14:45 # 삭제 답글

    저거 외에 때에 따라서는 꽤나 괴악한 기념품이 발견되기도 한다죠.
    '해골' (두개골) 같은...

    특히 태평양 전선에서 복무했던 미군들 중에서는 열대에서 한달 채 안되는 기간동안
    깨끗하게 백골만 남겨진 두개골을 기념으로 가져와 전쟁 끝나고 차고속에 넣어뒀다
    그가 죽으면서 유품으로 발견, 가족과 이웃, 지역 경찰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죠.

    이 특별한 혹은 폭발물처럼 위험한 기념품에 대한 이야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슬슬 나왔었고 아직까지 눈에 띄는 큰 사고가 안난걸 보면 다행이긴
    합니다.
  • deulpul 2009/03/29 15:05 #

    두개골 기념품이라니, 정말 콜렉터의 세계는 오묘하군요... 남미의 원주민들이 적을 사살한 뒤 그 머리를 오렌지 크기로 축소해 갈무리했으며, 한때 유럽인들에게 인기 높은 기념품이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전장에서 해골을 들고 돌아왔다면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하군요. 그저 PTSD(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비쳤을지도...
  • shaind 2009/03/29 15:51 # 답글

    위대했든, 평범했든, 어떤 세대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순리군요.
  • deulpul 2009/03/30 06:37 #

    그 어떤 위대함이라도 극복할 수 없는 순리겠죠? 묘지의 땅 위에서 영광과 수치, 명예와 굴욕을 가름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 아시모 2009/03/29 16:37 # 삭제 답글

    우리나라도 땅만 파도.. 탄약이나 수류탄, 총류탄, 포탄들이 우수수 나오죠. 특히 전방엔 더심하다는
  • deulpul 2009/03/30 07:04 #

    불행한 과거 덕분이겠지요. 그런 것이야말로 덮어 두는 게 상책인 경우겠군요...
  • 릴리슈슈 2009/03/29 21:40 # 삭제 답글

    우연히 들르게 되었습니다만 제 추억을 한가지 말씀드리면 제가 전방 gop근무중의 일입니다. gop는 이중철책으로 되어있었는데 그 사이의 제초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임병이 삽으로 흙을 뒤엎고 있었는데 그 당시 분대장이었던 저를 후임들이 부르더군요. 저 사진의 수류탄과 동일하지만 저 파란색의 안전클립부분이 부식되어 끝부분만 불안하게 지지되어있던 형태의 수류탄을 발굴하였습죠. 전 너무 놀라 그 수류탄을 바닥에 놓게 하였고 분대원들을 좀 멀리 피신 시킨뒤 소대장님께 알렸습니다만 소대장님은 그 수류탄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집어서 가져가시더군요. 그때 생각만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리긴 합니다만, 너무 무신경한게 아닌가싶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안전불감증이 심하다고 각인되던 추억입니다.
  • deulpul 2009/03/30 07:12 #

    직접 겪으신 위험한 상황이셨군요. 오래 되긴 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물건이었겠죠? 그나저나 그 소대장님은 너무 용감하셨군요. (사실은 '소대장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일지도...)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 상황이므로, 이 경우에 대비한 대응 매뉴얼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실에서 매사를 매뉴얼대로 하기는 좀 어렵긴 합니다만... 별다른 사고가 있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네요. 생생한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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