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하늘의 뜻인가 섞일雜 끓일湯 (Others)

잘 된 놈들이 다 나쁜 놈들이 아니고 좋은 놈들이 다 못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쁜 놈들이 흔히 잘 되고 좋은 놈들이 종종 못 되는 것을 보면, 운명이랄까에 약간의 의심을 아주 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사마천이 <사기> 열전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제1장은 백이, 숙제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마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큰 물음이기도 하다. 하늘에 도가 있고 세상에 뜻이 있다면, 어찌하여 나쁜 놈들이 잘 되는 것일까.

사마천의 언어로 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는 말한다: "하늘의 도는 친하고 소원함이 없어, 항상 선인(善人)의 편에 있다."

백이와 숙제 같은 이는 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짊을 쌓고 행동을 깨끗하게 함이 이와 같았건만, 그러고도 굶어 죽다니!

공자는 제자 70명 가운데서 홀로 "안연(顔淵)은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자주 끼니를 굶었으며, 술지게미나 겨밥 같은 조악한 음식도 실컷 먹지를 못하였다. 게다가 일찍 죽었다.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해 베풀어줌이 어찌 이러한가.

도척(盜跖)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생간을 회쳐 먹었다. 포악하고 패려하고 방자하여, 도당 수천 명을 모아가지고 천하를 제멋대로 돌아다녔으나, 마침내 장수하여 목숨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것은 무슨 덕을 좇아서 그러한 것인가.

이들은 그런 사례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명백한 것일 뿐이다. 근세의 사례를 살펴 본다면, 행동이 절제가 없어서 오로지 남이 꺼리고 싫어하는 악행만을 일삼는데도 일평생을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며 부귀가 여러 대를 두고 끊어지지 않는 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땅을 가려서 디디고 적합한 때를 기다려서 말하며, 큰 길이 아니면 다니지 않고 바른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데도 환란과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이런 사실에 대해 큰 의문을 갖고 있다. 이른바 천도(天道)라는 것은 정말로 이런 것인가.


그 뒤 사마천은 공자가, 부귀를 구할 수 있다면 천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것이며, 구할 수 없다면 홀로 덕이나 닦겠다고 한 말을 들어, 부귀와 군자가 병존할 수 없는 게 천도인가 하고 질문한다. 또 옛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가죽 대신 꽃다운 이름을 남기기 위해 독실한 자세로 나아가고 물러남을 실천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름이 사라지고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 아이러니를 의문시한다.

2천1백년 전에 나온 질문이다. 사마천에서 오늘에 이르는 그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선인도 태어나서 죽고 악인도 태어나서 죽고, 평범한 사람도 태어나서 죽었다. 세상의 역사는 개인의 삶으로 쪼개져 무한히 반복되느라 바빴는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큰 진전이 없다. 진전은커녕, 개인의 협소한 삶을 챙기기도 급급해지는 시대, 결과가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되어 가는 시대, 악인 되기를 권하는 시대에, 이런 질문조차도 사라져 간다.

성속(聖俗)에서 수많은 종류의 윤리학이 나오고, 그 규범을 채워 놓은 윤리 교과서가 서가에 넘치더라도, 윤리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이 있는 한, 다른 사람이 윤리할 때 윤리하지 않음으로써 돈과 권력을 오히려 편하게 선취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있는 한,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한, 사마천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쁜 놈들이 잘 되고 좋은 놈들이 못 되는 게 하늘의 뜻인가. 곧은 이는 고사리나 뜯다가 굶어 죽어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인가.

불의를 보고 의연히 일어나 바로잡으려 했던 이들은 밥숟갈을 걱정해야 하는 곤경에 빠지고, 불의를 타고 살아온 자들의 용렬한 삶이 방무도(邦無道)의 시대를 만나 더욱 일취월장하는 세태. 아니, 사실 언제든 그러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하여, 오늘을 사는 나 역시 같은 질문을 되씹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하늘에, 뜻이란 게 있다면, 이게 그것이란 말인가.


※ <사기> 인용 부분은 남만성(南晩星)이 번역한 을유문화사 발행본의 내용을 일부 수정 인용함.

 

덧글

  • 러움 2009/07/06 15:51 # 답글

    아무래도 그 시기에 선악에 대해 논한 분은 굉장한 자린고비에 채식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는 헛생각을 해봅니다.; 풀 뜯어먹으며 고생하지 않으면 악당! 이라던지요. - 물론 농담입니다만. ^^;

    들풀님의 글에 삼천포처럼 붙이는 댓글이긴 합니다만, 역사책이나 비슷한 소설들을 읽다보면 사회의 부조리한 부분이 요즘과 거의 같은 경우가 많아서 이런 쪽에 대한 인간의 학습능력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운명과 같이 엮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하면서요. 그 왜.. 연결짓는 순간 왠지 희망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잖아요.

    언젠가는 착한 사람들은 항상 스테이크를 써는 부류다-라는 정의가 나오리라 믿습니다.(..) 저 끝까지 헛소리만 하고 가네요;///
  • deulpul 2009/07/07 12:13 #

    그런 점에서 보면 사마천은 약과죠. "고사리는 그 나라에서 나는 풀 아니냐. 그것도 먹지 말았어야지!" 하고 분노한 선비들도 많았다니. 부조리에 대해서는, 인간 본성과 관계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시스템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적절히 잡아주는 시스템. 그래도 나쁜 분들은 계속 나쁜 짓 하겠습니다만... 시스템 이야기하자니 갑자기 닭살이 돋네요.
  • 긁적 2009/07/06 16:17 # 답글

    괜찮아요. 그래 봤자 죽으니까요. 어떠한 기쁨도, 어떠한 고통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근데 ㅅㅍ.. -_-)y=o0
  • deulpul 2009/07/07 12:20 #

    죽는다는 사실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데 위안을 얻지만,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만 모두 평등하다는 데 절망을 느낍니다. 유한한 삶, 단 1회의 삶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 소중한 기간을 행복하게 보낼 당위가 있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 언럭키즈 2009/07/06 19:42 # 답글

    2천년동안 참 변한게 없군요.
  • deulpul 2009/07/07 12:23 #

    하늘의 도란 어떻다든가 하는 보편성이란 도무지 성립할 수 없다는 보편성을 건진 게 나름 수확일까요.
  • 2009/07/07 10:4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9/07/07 12:28 #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도 그래요. 파전 생각도 나시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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