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도 못 읽는 편집국장 섞일雜 끓일湯 (Others)

(아래 글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분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연은 맨 밑에 적어두겠습니다.)

내가 이 신문사에 입사한 것은 우연이거나, 아니면 당연지사였다. 저널리즘 스쿨을 다니며 학교 신문의 기자로 활동할 때는, 졸업 뒤 사건 현장을 누비며 필력을 드날리는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꿈꾸었다. 그러나 첫 술에 배 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막 대학생 딱지를 뗀 초짜를 받아 줄 큰 신문사는 없었다. 어차피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는 것이 직업 언론인의 삶이기도 했다. 나로서는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인구 몇 만의 작은 도시에서 발행되는 이 신문사는 규모가 무척 작았다. 직원은 기자들 일고여덟 명 남짓에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겸하는 사장 한 명, 업무부 직원 몇 명이 다였다.

맨 처음 신문사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실망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무실 규모나 인원으로 보면, 대학 때 일하던 학교 신문사보다 더 작았던 것이다. 이런 신문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다른 신문사로 옮기기 위한 경력이나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짜 수습 기자로서 나는 시청 담당으로 배당되었다. 큰 갈등이 드문 곳이므로 초년병 기자가 활동할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요 행정 조직과 인물을 익히기에도 좋았다. 나는 매일 시청에 나가 홍보 담당자가 내오는 자료를 취합하고 관련 인터뷰를 마친 뒤, 신문사에 돌아와서 기사를 썼다.

기자들이 쓰는 모든 기사는 편집국장 겸 사장인 존의 데스크에 쌓였다. 존은 두툼한 사전이 놓여 있는 그 큰 책상 뒤의 높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 기자들이 써 온 기사를 하루종일 읽었다. 그리고 기사 곳곳에 빨간 펜으로 줄을 긋고 단어를 바꾸고 문맥을 고친 뒤 인쇄 담당자에게 보냈다. 이런 작업을 할 때, 존의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게 마련이었다.

신문사를 떠도는 소문

나는 내가 쓴 첫 기사를 기억한다. 시에서 새로운 주차 제도를 적용하기로 한다는 작은 소식이었다. 나는 시청의 관계자를 인터뷰한 뒤, 짤막한 기사를 써서 존의 데스크에 올려 두었다. 다음 날, 인쇄되어 나온 내 기사는 내 이름을 달고 있기는 했지만, 내가 쓴 것과 크게 달랐다. 내가 쓴 단어들은 대부분 바뀌어 있었고, 톤도 매우 달라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쓴 기사보다 인쇄되어 나온 기사가 훨씬 간결하고 힘이 있었으며 정확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기자들의 글은 존의 데스크를 거치며 기사로서 다시 태어났다. 존이 기사를 고치는 데 대해 기자들은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거의 언제나 결과물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존이 문맥 자체를 고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말하자면 존의 데스킹은, 기자가 무슨 기사를 쓰려고 했는지를 정확히 파악한 뒤, 이를 좀더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표현으로 구성되도록 고치는 식이었다.

존이 기사를 고치고 모든 기자가 이에 수긍하면서도, 좀 이상한 기류가 있었다. 선배 기자들은 존을 친한 친구로 여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했지만, 존경한다고까지는 말하기 어려웠다. 기사를 다루는 놀라운 솜씨로 보면 탁월한 선배 기자로서 존경해야 마땅할 일인데도, 그런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존과 관련해 떠도는 한 가지 소문이 그 이유인지도 몰랐다.

소문은 존이 신문사를 만들기 전에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었냐는 데 관련되어 있었다. 존은 직업 언론인 출신이 아니라, 시청에서 청소를 하던 청소부 출신이라는 것이다. 전문적인 언론 교육을 받아 본 적도 없을 뿐더러, 기자 생활을 해 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시의 행정과 정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사정이 신문사를 성공시킨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소문의 진위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사실 누구 하나 진지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소문은 소문이었다. 사장실 문은 언제나 닫혀 있었으며, 그 안에서 존은 열심히 기사를 고쳤고, 그가 데스킹한 기사들은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 다음 날 아침 지면을 빛냈다.

초년병 수습 기자로서 주차 제도 기사를 쓰던 때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지금의 큰 신문사로 옮겨 올 수 있었던 데에 존이 큰 역할을 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내 기사뿐 아니라 기자들의 기사는 모두 언론학 교과서에 나오는 원칙들을 정확히 반영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발간되었으며, 그것은 모두 존이 데스킹한 덕분이었다. 취재는 우리가 했지만, 기사는 사실 존이 썼다.

몇 년 뒤, 내가 주도(州都)에서 발행되는 큰 신문사의 눈에 뜨여 옮길 수 있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고, 지금 같은 전국지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덕분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무엇보다, 나는 존에게서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배웠다는 점에서 그에게 크게 빚졌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써서 존의 데스크에 올려놓은 기사가 다음날 어떻게 발행되었는지를 신문에서 찾아보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이었으며, 그 때마다 나는 큰 깨달음을 축적해왔던 것이다.

죽은 뒤 알려진 존의 비밀

얼마 전에 나는 존의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존이 돌아가셨다는 부고였다. 장례식 날짜에 맞춰 나는 존의 집을 찾아갔다. 십여 년 만에 보는 집인데도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나는 존의 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존은 정말 열심이었지요. 신문사 일을 좋아했어요. 신문사에서 살라고 해도 살 사람이었어요. 천성이 신문장이였다고나 할까요. 내가 봐도 놀라웠죠.

그거 아세요? 존이 문맹에 가까운 학습 장애자였다는 거? 그랬어요. 존은 문장을 읽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었어요. 기억력도 형편 없었죠. 단어나 숫자 같은 데 특히 그랬어요. 낯선 단어는 돌아서면 잊어버렸답니다. 숫자도 그랬고요.

그런데 어떻게 신문사를 차려 일했는지 아세요? 모르셨죠? 존이 학습 장애를 감추고 편집국장 역할을 한 것은 오로지 사전 때문이었답니다. 잠깐... 이걸 보세요. 기억나세요? 이게 존의 책상 위에 있었던 사전이에요. 존은 평생 이 사전을 끌어안고 살았답니다. 기사가 책상 위에 쌓이면, 존은 문을 닫고서 읽기 시작했죠. 기사에 나오는 거의 모든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며 말이에요. 문을 왜 닫은 것인지는 짐작하시겠죠?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를 모두 찾다보니, 잘못 쓴 것, 어색한 것, 문맥에 맞지 않는 것 등을 모두 고칠 수 있었답니다. 감정이 들어간 단어, 힘이 약한 단어, 모호한 단어, 오해할 만한 단어들도 모두 고칠 수 있었고요. 네, 시간은 많이 걸렸죠. 처음엔 인쇄 마감 때문에 직원들이 많이 답답해 하셨죠. 그러나 점점 빨라졌어요. 이게 존의 비밀이었던 거지요. 아마 아무도 모르고 계셨을 거에요."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저널리스트가 단어의 뜻도 잘 모르는 학습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니.

나는 새까맣게 손때가 묻은 두툼한 사전을 가만히 넘겨 보았다. 사전의 거의 모든 페이지는 빨간 동그라미로 가득 찼고, 작은 글씨로 용례를 써둔 경우도 많았다. 이 사전이 존이었고 이것이 내가 존경하던 저널리스트였다.

나는 존의 부인에게, 그가 정말로 시청에서 일하던 청소부였는가 하고 물어 보았다.

"글쎄요. 궁금하시죠? 비밀을 하나 가르쳐 드렸으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비밀로 남겨두고 싶군요. 그런 게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진심으로 부인의 말에 동의하며, 사과했다. 존이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존은 영원히 나의 편집국장이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 저널리스트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1990년대 중반 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글입니다. 실화인데, 글의 요지는 대충 비슷하지만, 제 기억이 한계가 있는지라 구체적인 내용은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글이 실린 게 영문판인지 한글판인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도서관에서 영문판을 이잡듯 뒤져 보았는데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한글판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모아두신 분이 있을까요.

마치 <시네마 천국>을 떠올리게 하는 사연인데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중요한 점을 시사하는 내용이라 마음 한 쪽에 꼭 담아두고 있는 사연입니다.



 

덧글

  • 긁적 2009/07/13 22:55 # 답글

    ..........
    전자사전에 영어 단어만 올려놨는데, 국어사전을 올려놓아야겠군요.
    좋은 포스트 감사합니다.
  • deulpul 2009/07/14 07:51 #

    포인트를 잘 잡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2009/07/14 01:0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9/07/14 07:56 #

    아무래도 우리 정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잘 와닿는 듯 하죠? 글에 대한 강박은 김선생님도 만만치 않을 걸요? 하하-. 마무리와 새 출발 모두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 mooyoung 2009/07/14 01:00 # 답글

    기억에 의존한 재구성치곤 생생한데요. 잘 읽었습니다
  • deulpul 2009/07/14 08:00 #

    대충 소설 썼습니다. 신춘 문예 소설 같은 소설 말고, "소설 쓰고 앉았네~" 할 때의 그 소설. 뭐, 저작권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나. 는 훼이크고, 오래 삭이다 보니 내 이야긴지 남 이야긴지 헷갈리는... 그런 것이겠죠.
  • mooyoung 2009/07/15 19:52 #

    명랑소년사 이어주세요. 이어주셔요.이어주시와요...~~~(ㅎㅎ)
  • deulpul 2009/07/19 09:21 #

    아, 정말 그거 계속해야 하는데... 역시 마감이 없으니 동기 부여가 안 되는군요.
  • 夢影 2009/07/14 09:29 # 답글

    편집자의 입장에서 반드시 배우고 따라야할 불문율이네요. "사전을 보라!"
  • deulpul 2009/07/14 13:48 #

    포인트를 잘 잡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2)

    블로거들도 친해져야 할 친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러움 2009/07/14 09:42 # 답글

    처음에는 아니 단어도 못 읽는데 무슨 국장을 한거지 비리인가!!-라고 생각하며 들어왔는데 읽으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감동도 받았습니다. ;ㅅ; 요즘 뭔가를 보기만 하면 의심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스트레스 또한 지독하게 느끼게 되네요. 이게 다..(..나머지는 생략합니다.;)
  • deulpul 2009/07/14 13:53 #

    비리 차고 넘치는 세상인 탓이겠죠. 사실 저 분도 처음 신문사 차릴 때, 시청 고위 공무원의 비리를 잡고 협박하여 허가를 쉽게 받았다든가... 학력을 조작했다든가... 우리는 이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 러움 2009/07/14 17:01 #

    포인트를 잘 잡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3..퍽퍽퍽퍽)

    더 깊게 들어가면 눈물 날 거 같아요. ㅠ
  • deulpul 2009/07/15 14:12 #

    기자를 채용할 때 금품을 받았다든가... 취재 때 촌지를 강요했다든가... 노조 설립을 방해했다든가... 건물주의 비리를 빌미로 임대료를 체납했다든가... 아들을 주도로 위장 전입시켰다든가... 연예인 제인에게 성접대를 받았거나 강요했다든가... 미공개 정보 활용해 주식 투자했다든가... 신문 팔면서 자전거 끼워줬다든가...
  • mooyoung 2009/07/15 19:48 #

    끼워준다든가... 라는 망상으로 날만 샜다는(아시아 방모,김모,이모제왕의 믿거나말거나 속앓이)
  • 러움 2009/07/15 22:04 #

    어헝 엉엉엉엉엉 ;ㅁ;.......
  • deulpul 2009/07/19 09:17 #

    mooyoung: 그런데 미디어법 통과되면 자전거를 끼워주든 자동차를 끼워주든 아무도 상관 못한다는 거죠... 저이들 앓던 이 빠지는 셈이 될 듯 합니다.
  • deulpul 2009/07/19 09:18 #

    러움: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 2009/07/19 15: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9/07/20 10:29 #

    그렇군요. 저는 지면으로 보질 못하니 사실 위기감이 좀 떨어지는 모양입니다. 참,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데 말입니다. 말씀해 주신 운동도 중요하고, 좀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서도 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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