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보잡 소고 때時 일事 (Issues)

듣보잡 논쟁이 다시 일고 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 그녀가 소송이라는 행위를 통해 논객으로서의 자기 발에 도끼를 내려찍는 스펙터클한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한국을 떠난 지 꽤 된 나에게 이 장관의 주인공은 정말 듣도보도 못한 사람이었다. 이 블로그를 찾아보면 아주 오래전에 뭣도 모르고 이 사람 글을 옮겨 둔 게 있다. 그런 걸 보니, 나는 이이를 몰랐던 게 틀림없다. 내 처지에서 볼 때 이 사람은 듣도보도 못한 잡놈은 아니지만 듣도보도 못한 사람 맞다.

나보다 먼저 이 곳에 오신 분이 있다. 언젠가 그 분이 내게 물었다. "진중권이 대체 누구야?" 새로 만나는 젊은 사람마다 진중권, 진중권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진중권도 듣도보도 못한 잡놈은 아니더라도 듣도보도 못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듣보잡이라고 하면 기분 나쁠까? 별로 그렇지 않을 듯 하다. 게다가 나는 이름도 없지 않은가. 구조적으로 듣보잡이 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듣보잡'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듣보잡에서 탈피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진정 듣보잡이라면, 나를 일러 듣보잡이라 할 일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 나에게 'deul듣보'라고 불러준다면, 나는 그에게 달려가 꽃이 되고 싶을 정도로 황공무지한 영광일 것이다.

설령 내가 유명한 사람이거나, 혹은 내 스스로 "나는 유명한 사람이야" 하고 착각하고 산다고 해 보자. 그래도 다른 사람 누군가가 나를 일러 듣보잡이라고 부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내 이름을 듣거나 나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나는 항상 듣도보도 못한 잡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듣보잡'이라는 말이 내재하고 있는 의미적 특성이다. 나를 듣보잡으로 결정하냐 마냐는 내 영역이 아니라 상대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내가 상대의 인식과 주관의 영역 안에 난입해 그의 뇌를 꺼내 씻으며 "나는 유명인이라고!" 하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게 이 단어의 구조이며, 또 상식이다.

미국의 어느 대통령인가가 시골에 내려가 선술집에 들어가서 자기를 소개하니, 촌로 하나가 말하길 "뉘신진 모르지만 날도 더운데 맥주나 한잔 하고 가셔" 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는데도 자세한 사항은 잘 떠오르지 않네. 어쨌든, 어떤 경우는 대통령조차도 듣보잡인 것이다.

사실 듣보잡이 좋은 거다. 이름 팔려봤자 씹히기만 한다. 좀 순화된 표현으로 다시 말하자면, 이름 알려져봤자 사람들은 선입관만 갖게 된다. 동작동에서 부관참시 쇼하는 어르신 같은 분들은 진중권이란 이름만 들어도 이를 부득부득 갈 거다. 그 중에서 그가 쓴 글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이름이 너무 팔리면, 사람들은 상표만 보고 내용물을 잘 안 본다. 이름만 봐도 내용을 다 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좀처럼 강단이 있지 않는 한, 자기 이야기를 자유로이 하기 힘들다. 팬도 다사로이 챙겨야 하고, 이름만 보고 덤비는 적도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 두 방향 모두에서 오는 영향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다. 모두 깔아뭉개고 혼자 갈 길 가는 강단이 있다면 좋지만, 얼굴이 망가진다.

이렇게 듣보잡이 좋긴 좋지만, 배가 고프다는 게 좀 문제긴 하다.

어쨌거나 아무리 유명한 사람도 시작은 듣보잡이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도 동네에서 열린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전국노래자랑'에서 의자 위에 올라서서 노래 하고 5달러 상금 받고 좋아하던 듣보잡이었고, 또 다른 황제 버락 오바마도 시카고 변두리에서 동네 시민 운동 하던 듣보잡이었다. 자, 그러니 '듣보잡'이란 말에는 아직 때가 타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신진 세력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는 거다. 그러고 보니, 어째 풋풋하고 신선한 느낌이 느껴지시지 않는가?

요즘에 듣도보도 못한 사람 참 많이 나온다. 내가 글자 그대로 과문해서 그렇겠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온갖 잡분들이 자기 이름을 대문에 걸고 국가와 사회를 향해 점잖게 한 마디씩 하는 게, 비 온 뒤 지렁이들 기어나오는 양을 연상케 한다. 좋은 의미다. 지렁이는 유익한 생물이다. 당장 보기에 징그러워서 그렇지.

자기 이름 석 자를 내거는 순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듣보잡의 영역을 탈피하는 노력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이 자체가 문제될 리는 없다. 단지, 이름 팔기에 너무 매달리지 마시기 바란다. 그건 그 양대로 눈 찌푸려질 뿐만 아니라, 이름 팔기에 목매달다가는 예컨대 '듣도 보도 못했다' 같은 극진한 칭찬을 오해하여, 그야말로 열등감 폭발하게 된다. 혼자서 폭발하면 상관없지만, 파편이 주변으로 튄다. 누가 "듣보잡!" 하면 아, 내가 신세대구나, 내 앞길이 창창하구나 하고 생각하면 된다. 지역구 시골에 가서 "어이 듣보잡" 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촌로하고 멱살잡이 하면 내 표만 떨어진다.

어쨌든 이번 일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다시 확인한다. 여성 여러분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경외하는 말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덧글

  • 러움 2009/10/16 15:06 # 답글

    저 어제 뉴스상에서 '듣보잡'이란 단어가 들려서 진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듣보잡 때문에 고소하는 세상이 왔군요.. 아니 진짜 어젠 걍 웃다 눈물 찔끔 흘리고 말았지만; 들풀님 글을 읽고 보니 진짜 저도 모르게 끄덕거려지네요. 솔직히 세종대왕님 정도는 되야 듣보잡 소릴 안듣죠.. 아니 이게 아닌가요 아무튼.(..) 맞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 deulpul 2009/10/16 15:16 #

    상상해 보니, 정말 웃기겠습니다. 배운 사람도 항상 점잔 빼면서 논쟁하지 않을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랑상콤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링 밖으로 나가 자빠지면 스물을 다 세기 전에 다시 들어와야죠...
  • 언럭키즈 2009/10/16 19:13 # 답글

    사실 예의 그 분도 들풀님의 이 포스팅과 똑같은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http://ch601.blogspot.com/2009/06/blog-post.html
    ...그런데 왜 소송을 벌였는지는 모를 일 이군요.
  • 언럭키즈 2009/10/16 19:21 #

    http://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0675
    이게 원본인데.. 한눈에 봐도 뭔가 꼬인 논리구조를 사용하는 것 같네요.[...]
  • deulpul 2009/10/16 20:23 #

    그러게, 듣보잡은 구상유취가 욱일승천하여 청출어람하니 후생가외한다는 칭찬의 뜻이라니까요. 그런데 어디서 이런 듣도보도 못한 희한한 글들을 찾아오십니까. 대충 읽어보니 초등학교 때 쓰던 일기 같네요... "친구랑 싸웠다. 나보고 욕을 했다. 앞으로 놀지 말아야겠다. 끝"
  • 2009/10/16 21: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9/10/17 06:52 #

    그러게 말입니다. 보통, 같잖다고 생각하면 상대를 안 하는 거거든요. (누구 어투처럼 되어 버리네...) 그런데 붙잡고 늘어진다는 것은 같잖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른 마음이 있다고 비치게 되는 거거든요.
  • 2009/10/16 21:3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9/10/17 06:53 #

    네????? 아니 그 분이 남자였습니까? 사진이 좀 남자처럼 보여서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충격이군요.
  • 김상현 2009/10/17 06:14 # 삭제 답글

    빅뉴스'라는, 위에 소개된 사이트에 잠깐 들렀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정치적 의도는 그만두고, 그들의 무지막지한 직함 - 특히 문명비평가!? -에 가위 눌린 듯한 착각에 잠시 빠졌고, 무엇보다 기본적인 문장 구조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그 탁월한 능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과감히 무시한 채 질주하듯 글을 갈겨대는 그 용기(만용?)에 또 한 번 감탄했습니다. 듣보잡이라... 참!
  • deulpul 2009/10/17 06:59 #

    정말 머리가 멍- 해지지요. 아니 세상에 무슨 비평가가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정말. 비평할 건덕지는 없고 비평가만 득실득실하는 세상인가보네요. 어쨌든 저도 '세계 비평가'나 '인간 비평가'가 되어 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한편, 피알계에 비전으로 내려오는 비기 중 하나에, '문장을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게 쓰라'는 게 있습니다. 뭔 말인지 모르니 좋든싫든 몇 번 읽어야 하는데, 독서백편에 의자현의 원리에 따라, 비문읽기 백번에 세뇌를 시킬 수 있다는 비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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