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될 명예가 없는 인간 섞일雜 끓일湯 (Others)

명예 훼손은 타인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을 때 발생한다. 동어 반복이나 마찬가지인 설명이지만, 이렇게 뻔한 의미가 새삼 중요해지는 세상이다. 스스로 자기 명예를 훼손하고 깎아먹기를 밥 먹듯이 하는 '명예 자해자'들이, 남이 그러면 정색을 하고 나서는 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명예가 중요하면, 애초에 불명예스러운 짓을 하질 말든가. 욕 먹을 짓들을 하고서 욕을 안 먹겠다고 기를 쓰니 참 딱하다.

명예 훼손과 관련한 미국법을 보면, 실질적으로 명예 훼손을 하더라도 죄를 물을 수는 없는 경우가 있다. 하나는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명예 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명예란 오직 그 당사자의 것이므로, 아무리 친한 가족이나 친척이라 하더라도 당사자의 명예를 넘겨받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다.

(한국 형법에서는 제33장 제308조에 '사자의 명예 훼손'이라고 하여, 죽은 사람도 명예 훼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산 사람의 명예 훼손이 사실이나 허위 여부와 관계없이 성립할 수 있는 데 비해, 죽은 사람의 경우 허위의 사실만 명예 훼손을 구성하는 것으로 하여, 역시 상당히 약화되어 적용됨을 알 수 있다.)


명예 훼손죄가 성립하지 않는 다른 경우는, 훼손될 명예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다. 자기가 저지른 일 때문에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명예가 땅에 떨어져 있어서, 누가 뭐라고 한 소리 한다고 더 침해될 여지가 없는 경우다. 이른바 '훼손될 명예가 없는 인간', libel-proof plaintiff 다.

물론 상식적인 세상에서는 이 지경에 이른 인간들이 흔한 것은 아닐 터이므로, 법원이 이렇게 판단하는 경우도 흔하지는 않다. 미국 법원이 어떤 인간을 libel-proof로 인정하는 경우는, 대개 이들이 흉악한 범죄를 벌인 뒤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경우다.

시궁창 속 명예에 구정물 튀어봐야

1997년작 영화 <도니 브래스코(Donnie Brasco)>는 흥미진진하다. 목숨 걸고 마피아 조직에 침투하는 FBI 요원 이야기인데, 실화다. 배우도 알 파치노와 조니 뎁으로 빵빵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영화에서 마피아 행동대장으로 묘사된 실제 인물 존 체르사니다. 다른 조직원은 다 실명으로 나왔지만, 체르사니는 이름이 바뀌어 등장했다. 당시에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행동대장이 악명 높은 체르사니임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영화가 나오고 난 뒤, 체르사니는 영화 감독 마이크 뉴웰과 제작사, 배급사인 트라이스타, 소니를 상대로 하여 명예 훼손(libel) 소송을 걸었다. 근거는 영화에서 묘사된 폭력, 협박 및 갈취 행위가 나중에 실제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무죄로 판명난 일을 영화에서는 실제로 한 것처럼 묘사했으니 명예 훼손이라는 것.

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1) 설령 문제의 사건이 무죄였다고 해도, 2) 이미 다른 건으로 협박 및 갈취, 은행 강도 공모, 마약 거래에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으며, 3) 기타 건으로도 협박, 강탈, 사기 등으로 기소되고 주가 조작에 개입하는 등, 마피아 소속원으로서 온갖 나쁜 일은 다 하고 다닌 것이 인정되므로, 4) 여기에 불명예스러운 영화 묘사 하나가 더해진다고 해서 특별히 체르사니의 명예가 더 훼손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이미 시궁창에 처박힌 명예에 구정물 한 점 더 튄다고 해서 표도 안 난다는 것이다. 이는 명예에 실질적인 훼손이 일어나지 않으면 명예 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이후로 종종 '훼손될 명예가 없는 인간'으로 판정나서 기각되는 명예 훼손 소송이 있는데, 대개 흉악 범죄자들이다. 말하자면, 이런 판결은 명예 훼손 다툼에서 사뭇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법이 어쨌든, 이런 사례를 통해 생각해 볼 게 있다. 스스로 제 명예를 땅에 처박는 짓을 하면서 남에게는 명예를 존중해 달라고 주장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이없는가 하는 점이다. 스스로 돕지 않는 자는 하늘도 돕지 않듯이, 스스로 존중하지 않는 명예는 남도 우습게 본다. 스스로 꼴사나운 불명예를 자초해 놓고, 남에게 명예를 주장하면 그게 먹히겠나. 주장하면 할수록 자신의 불명예만 더욱 커질 뿐이지. 명예 훼손을 당하지 않는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불명예스러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덧글

  • 리디 2009/11/04 17:47 # 삭제 답글

    10,000점짜리 글입니다. :D
  • deulpul 2009/11/04 19:16 #

    소수점 아니고 콤마 맞는 것이죠? 오밤중이라 눈이 좀 빌빌한 상태라서...
  • shaind 2009/11/04 20:31 #

    독일같은 곳에서는 콤마를 소숫점으로 사용하긴 하던데요, 뭐......

    저도 잘 읽었습니다. 예외적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었군요.
  • deulpul 2009/11/05 05:27 #

    shaind: 아니 이런 게슈타포의 후예들 같으니라고. 그래도 맥주가 좋으니 봐 줍니다. 하하-. (농담이니 독일분들은 흥분하지 마세요.)

    리디: 그러고 보니 전에 제가 도토리와 내공을 듬뿍 (말로만) 드린 적이 있군요. 이번에도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 What? 2009/11/05 01:54 # 삭제 답글

    자주 지나다니는 길인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100,000 out of 10을 드리겠습니다:)
  • deulpul 2009/11/05 05:32 #

    자주 지나다녀 주시기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이렇게 불우이웃을 위한 성금까지 준비해 주시다뇨... 반갑고 고맙습니다.
  • 러움 2009/11/05 09:51 # 답글

    자기 조상(이라기엔 가깝지만)은 친일 안했으니 명예훼손이라고 빼달라고 생난리치던 모 후손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히히.. 저도 들풀님처럼 딱딱 조리있게 쓰고 싶은데 나이먹을수록(야) 어려워지는거 같아요. 그래도 이렇게 보면서 공감할수 있는게 좋습니다. ^^
  • 댕글댕글파파 2009/11/05 10:03 # 삭제 답글

    동감가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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