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한 분이 한국으로 떠나며 책 몇 권과 CD 몇 장을 남겨 주었다. 원래 책과 CD는 이 곳에 있는 공공도서관에 기증될 운명이었는데, 인사차 갔더니 고맙게도 그 중에서 몇 개를 뽑아 내게 건네 주었다.
책장을 휙휙 넘길 수 있는 책, 즉 한글로 쓰인 책에 대한 갈증은 때로 심각하다. 진도가 잘 안 나가는 원서, 특히 중문 복문이 배배 꼬여 두세 문장이 한 쪽을 차지하는 악성 원서와 씨름할 때는, 한글 책 생각이 간절하다. 이럴 때면, 한글 책이라면 철학책이든 통계책이든 앉은 자리에서 한 권씩 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실제로 그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글책은 책장을 휙휙 넘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은 한글로 되었는데도 도무지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것이다. 두 권으로 쪼개어 만들어진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 (문학과 지성사)다. 몇 장 읽다가 팽개치고, 또 몇 장 읽다가 팽개치고 하기를 벌써 석 달째다.
책 껍데기에 적힌 대로 '살인과 광기 그리고 불운한 사랑의 대서사시'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읽을 만한데, 왜 읽다 집어던진단 말인가.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문장이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문장에 관하여 내가 좀 까탈스럽다는 점은 나도 안다. 그래서, 도무지 요령부득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찌저찌 뜻은 통하는 문장들은 대충 넘어갈 수 있다. 순간적으로 책을 탁 덮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자비 출판한 비매품 책도 아니고, 상업적으로 제작되어 독자의 돈을 받고 파는 책이라면 그런 요령부득의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를 문장이며 서술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소설이 무엇이고 묘사가 무엇인가. 글을 읽으면, 문장으로 해체된 현실이 다시 독자의 머리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어떤 문장들은 도무지 그게 안 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구글 북스에서 찾아 본 영어 번역문과 스페인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건반 자체의 색이 변한 게 아니라 검은 먼지에 덮여 있었다는 말이며, 두터이 쌓인 먼지 때문에 건반 사이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말이다. 덮개며 접합점 따위는 나오지도 않는다.
또 이런 것도 있다:
역시 영어 번역본과 스페인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희미한 불빛에서 보니, 그 여주인은 (파마기를 덮어쓰고 있는 바람에) 잠수부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웬 초인종? 잠수부(diver)를 스페인어 원문에서 buzo라고 썼는데, 번역자가 이를 buzzer로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여기서 왜 갑자기 '초인종'이 나와야 하는가, 안에서 나오는 불빛에 그게 보일까 하는 상식적인 생각을 잠깐 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먹고 살 일도 아니고, 시간도 없어 더 많은 예를 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이런 식이다.
번역자는 자신이 번역한 한글 문장을 자신이 이해해야 한다. 번역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은 이해하더라도 독자가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원문을 읽은 자신은 이해하고 있더라도, 한글로 옮겨 펴내면 읽는 사람은 원문을 본 번역자가 아니라 원문을 모르는 독자다.
번역서에서 글의 맥이 잘 잡히지 않으면 틀림없이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난데없거나 뜬금없거나 어이없거나 맥락에 닿지 않거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묘사며 서술이 그런 경우다. 전문서도 아닌 이런 대중소설 번역본에서, 읽어도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면 거의 100% 번역 오류라고 보아도 된다.
사실 이 책에는 번역을 참 잘 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종종 나온다. 말하자면 번역의 품질이 고르지 못하고 들쭉날쭉이랄까. 번역자는 기가 막힌 명문을 쓸 필요도 없다. 물론 그럴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런 일은 사실 번역자의 임무가 아니다. 번역자는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면서 원저자가 뜻하는 바를 충실하게 옮기는 것일 따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무리 뛰어난 부분이 있더라도 전체적으로 매끄럽지 않고, 더구나 실수에 가까운 부분들마저 수시로 등장한다면, 책 정말 읽고 싶어지지 않는다.
<바람의 그림자>는 미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 사폰의 첫 성인 소설이라고 한다. '전염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책 뒷표지에 따르면 "가르시아 마르케스, 움베르토 에코, 그리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이 스페인의 젊은 소설가가 쓴 마술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독자를 동요시키는 명민하고 놀라운 이 작품에서 만나고 있다"는데, 한글 번역본을 보며 도저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책 뒤에 줄줄이 늘어선 상찬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과대 광고로 보이는 것은, 사폰의 원 소설이 시시껄렁해서인지 아니면 번역 탓인지 알 수 없다.
※ 책 이미지들: 구글 북스 The Shadow of the Wind, La sombra del viento
책장을 휙휙 넘길 수 있는 책, 즉 한글로 쓰인 책에 대한 갈증은 때로 심각하다. 진도가 잘 안 나가는 원서, 특히 중문 복문이 배배 꼬여 두세 문장이 한 쪽을 차지하는 악성 원서와 씨름할 때는, 한글 책 생각이 간절하다. 이럴 때면, 한글 책이라면 철학책이든 통계책이든 앉은 자리에서 한 권씩 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실제로 그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글책은 책장을 휙휙 넘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은 한글로 되었는데도 도무지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것이다. 두 권으로 쪼개어 만들어진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 (문학과 지성사)다. 몇 장 읽다가 팽개치고, 또 몇 장 읽다가 팽개치고 하기를 벌써 석 달째다.
책 껍데기에 적힌 대로 '살인과 광기 그리고 불운한 사랑의 대서사시'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읽을 만한데, 왜 읽다 집어던진단 말인가.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문장이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문장에 관하여 내가 좀 까탈스럽다는 점은 나도 안다. 그래서, 도무지 요령부득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찌저찌 뜻은 통하는 문장들은 대충 넘어갈 수 있다. 순간적으로 책을 탁 덮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자비 출판한 비매품 책도 아니고, 상업적으로 제작되어 독자의 돈을 받고 파는 책이라면 그런 요령부득의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를 문장이며 서술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소설이 무엇이고 묘사가 무엇인가. 글을 읽으면, 문장으로 해체된 현실이 다시 독자의 머리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어떤 문장들은 도무지 그게 안 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한쪽 구석에는 카락스의 어머니의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가 머물러 있었다. 건반들은 검게 변색되어 먼지 덮개 아래의 접합점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190쪽)오래 방치된 집 안에 먼지를 덮어 쓰고 있는 피아노를 묘사하는 장면이다. 몇 번을 읽었다. 그런데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건반이 검게 변색되다니? 누렇게라면 혹 몰라도. 불이 났었나? 먼지 덮개 아래라니, 건반에 덮개가 씌여 있었나? 그렇다면 건반이 '검게 변색'될 리가 없는데? 접합점이란 대체 뭐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다.
구글 북스에서 찾아 본 영어 번역문과 스페인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건반 자체의 색이 변한 게 아니라 검은 먼지에 덮여 있었다는 말이며, 두터이 쌓인 먼지 때문에 건반 사이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말이다. 덮개며 접합점 따위는 나오지도 않는다.
또 이런 것도 있다:
슬리퍼를 신고 머리에는 파마기를 꽂고 솜이 들어간 남색 체크무늬 가운을 걸친 한 아주머니가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희미한 빛 사이로 초인종이 보이는 듯했다. (258쪽)주인공이 어두컴컴한 아파트 복도에서 어떤 집의 문을 두드린 뒤, 여주인이 문을 열고 나온 장면이다. 희미한 빛 사이로 초인종이 보인다니? 초인종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왜 주인공은 문을 "주먹으로 두들겼"나? 어두워서 미처 못 보았나? 그런데 집 안에서 빛이 흘러나오니 이제야 초인종이 보인다는 말인가? 안에서 빛이 나오면 밖에 있는 것들은 오히려 더 잘 안 보일텐데? 그런데 이렇게 눈에 띄기도 어려울 정도로 소소한 초인종에 왜 이런 특별한 관심을 두나? 그 뒤 벌어질 일에 무슨 단서라도 되나?
역시 영어 번역본과 스페인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희미한 불빛에서 보니, 그 여주인은 (파마기를 덮어쓰고 있는 바람에) 잠수부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웬 초인종? 잠수부(diver)를 스페인어 원문에서 buzo라고 썼는데, 번역자가 이를 buzzer로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여기서 왜 갑자기 '초인종'이 나와야 하는가, 안에서 나오는 불빛에 그게 보일까 하는 상식적인 생각을 잠깐 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먹고 살 일도 아니고, 시간도 없어 더 많은 예를 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이런 식이다.
번역자는 자신이 번역한 한글 문장을 자신이 이해해야 한다. 번역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은 이해하더라도 독자가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원문을 읽은 자신은 이해하고 있더라도, 한글로 옮겨 펴내면 읽는 사람은 원문을 본 번역자가 아니라 원문을 모르는 독자다.
번역서에서 글의 맥이 잘 잡히지 않으면 틀림없이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난데없거나 뜬금없거나 어이없거나 맥락에 닿지 않거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묘사며 서술이 그런 경우다. 전문서도 아닌 이런 대중소설 번역본에서, 읽어도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면 거의 100% 번역 오류라고 보아도 된다.
사실 이 책에는 번역을 참 잘 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종종 나온다. 말하자면 번역의 품질이 고르지 못하고 들쭉날쭉이랄까. 번역자는 기가 막힌 명문을 쓸 필요도 없다. 물론 그럴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런 일은 사실 번역자의 임무가 아니다. 번역자는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면서 원저자가 뜻하는 바를 충실하게 옮기는 것일 따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무리 뛰어난 부분이 있더라도 전체적으로 매끄럽지 않고, 더구나 실수에 가까운 부분들마저 수시로 등장한다면, 책 정말 읽고 싶어지지 않는다.
<바람의 그림자>는 미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 사폰의 첫 성인 소설이라고 한다. '전염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책 뒷표지에 따르면 "가르시아 마르케스, 움베르토 에코, 그리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이 스페인의 젊은 소설가가 쓴 마술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독자를 동요시키는 명민하고 놀라운 이 작품에서 만나고 있다"는데, 한글 번역본을 보며 도저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책 뒤에 줄줄이 늘어선 상찬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과대 광고로 보이는 것은, 사폰의 원 소설이 시시껄렁해서인지 아니면 번역 탓인지 알 수 없다.
※ 책 이미지들: 구글 북스 The Shadow of the Wind, La sombra del viento
덧글
MCtheMad 2009/11/09 17:47 # 답글
설마 영어로 저렇게 쓰여진 문장을 진심으로 저렇게 번역했을 리는 없으니...;;
deulpul 2009/11/09 18:17 #
HolyRan 2009/11/09 18:10 # 답글
deulpul 2009/11/09 18:30 #
페코 2009/11/10 21:56 #
꿈꿀권리 2009/11/10 02:55 # 답글
검정아닌 시뻘건 스킨일지라도 축하드려욧!
눈이 아파도 참는 분이 계신데...
( 통증은 없지만 시력이 급격하게... --;)
말이 났으니 말이지 울나라도 '번역청'을 둬야 합니다.
출간되는 책은 번역청의 심사를 거쳐 숙고된 다음 세상으로 나와야 해요.
엉터리 번역본을 읽으면 이누무 출판사가 미쳤나! (죄송..)
번역한 인간은 나름 쟁쟁한 명성을 떨치는 교수류인데 실제 번역은 학부생이나 조교가
알바로 한 것이 아닐까 의심쩍어지거든요.
흠.
deulpul 2009/11/10 14:21 #
김상현 2009/11/10 03:57 # 삭제 답글
deulpul 2009/11/10 14:42 #
언럭키즈 2009/11/10 06:01 # 답글
deulpul 2009/11/10 14:43 #
한여름 2009/11/10 13:42 # 답글
deulpul 2009/11/10 15:01 #
라임 2009/11/10 17:11 # 답글
나이가 든 데 따른 집중력 부족 때문인가 생각했는데, 들풀님의 말씀대로 그 영향을 받은 듯도 합니다.
deulpul 2009/11/12 17:36 #
김상현 2009/11/11 01:43 # 삭제 답글
deulpul 2009/11/12 18:23 #
스킨은... 다시 바꿨습니다. 말씀대로, 말 많은 블로그에서는 문장에서 뿜어나오는 독기들도 만만찮은데 흰 글자에서 번져나오는 시각적 독기까지 더하니 관리하는 사람부터가 영 괴로워서 할 짓이 아니더군요. 그동안 괴롭혀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하-.
꿈꿀권리 2009/11/12 10:13 # 답글
이 정겨운 익숙함
참으로 보람찬 하루가 되겠습니다. ^^
다시 한 번 깨달았네요.
울어라!
혼자 울지말고 떼거리로 울어라!
deulpul 2009/11/12 18:29 #
physik 2009/11/22 03:53 # 답글
deulpul 2010/02/06 06:50 #
pyrexia 2010/02/05 16:38 # 답글
deulpul 2010/02/06 06:43 #
독자가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쓰는 사람 탓도 있고, 읽는 사람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쓰는 사람 탓인 경우만 생각해 보자면, 예컨대 자기 머리 속의 사고의 단절이나 비약을 자기만 아는 말로 그대로 적어 내는 경우(쉽게 말해 저만 아는 이야기를 저만 아는 방식으로 써제끼는 경우)거나, 아니면 쉽게 쓸 수도 있는데 미문을 만들려고 문장을 꼬고 불필요한 단어를 동원하는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첫째 경우는 자신을 이해시키고 남과 소통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의 글이라고 생각해서, 저는 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은 얼마나 피곤할까 하는 생각이 들죠.
둘째 경우는, 얼핏 보면 명문인데 읽어보면 내용이 없음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잘 쓴 글이라고 해서 읽어보면, 문장 하나하나를 모두 반례를 들어 반박할 수 있을 때도 있습니다. 내용을 생각해야 할 시간에 형식, 즉 단어나 표현에 매달리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글도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글의 가치와 신중함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수련'이 영원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늘 부족하고, 그래서 이모저모 생각하다 보면,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고전적 비결인 '다독, 다작, 다상량' 이상 가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인터넷으로 글쓰기가 쉬워지면서, 다작만 있고 다독이나 다상량은 없어지는 세상이라, 말씀해 주신 글쓰기의 고민이 무겁고도 가치 있게 생각됩니다.
이런 소리 하고 있지만, 저도 스스로 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deulpul 2010/02/06 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