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을의 속리산 섞일雜 끓일湯 (Others)

왜 갑자기 그 산으로 가자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갑자기, 였을 것이다. 따져보고 손꼽아 가며 만든 일이 아니었으니까. 세상의 일과 개인의 앞날을 놓고 깊이 시름하던 대학 마지막 해의 어느 늦은 가을 주말, 나는 가장 친했던 친구 둘과 함께 남부터미널에서 속리산고속 버스를 탔다.

속리산은 나에게 기쁘고 슬픈 많은 추억을 남겨준 산이다. 홀로, 혹은 여럿이 많은 산을 다녔지만, 이 산처럼 그 외경이 잘 기억나지 않는 산은 드물다. 어느 산이나 정상까지 가노라면 절경 열두 폭 정도는 보여주게 마련이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 중 두엇은 생생히 기억하게 마련이지만, 속리산만은 텅 빈 산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아마 이 산이 내게 경치나 풍광으로 남지 않고,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산의 이름을 떠올리면 산이 생각나지 않고 그 때의 사람이, 그리고 그 때의 내가 생각난다.

늦게 출발했으니 늦은 시간에 도착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세속[俗]을 떠나는[離] 버스가 구불구불 산길을 거쳐 속리산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열 시 가까이 되어서였다. 도시에서라면 그다지 늦은 시각이 아니지만, 높직한 데 자리잡은 산 마을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일단 숙소부터 잡아야 했는데, 이미 시간이 늦어서였는지 터미널 근처의 민박집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주말이라 이미 방들이 다 찼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다. 보은을 지나 산까지 올라온 승객은 우리가 유일했던 것으로 보면 무리가 아닌지도 몰랐다. 낯선 곳에서 하룻밤 잘 방법을 잠깐 생각하던 우리는, 일단 선선한 밤 공기를 마시며 좀 걷기로 했다.

문을 닫은 식당이며 기념품 가게가 늘어선 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인적 드문 거리를 걸어오던 할머니 한 분이 말을 걸었다.

- 막차 타고 오셨나보네.
- 네.
- 잠 잘 데는 잡으셨나?
- 아니요.
- 지금 쉽지 않을 텐데. 나 따라 오실려오?
- 할머니 집 민박 치세요?
- 우리 집은 아니고 조카네 집인데, 지금 가도 되니 얼른 가요.

호객하는 곳은 따라가면 안 된다. 밥집이든 술집이든, 잘 하는 곳은 가게가 나서서 손님을 부르지 않아도 손님이 스스로 찾아간다. 못 하고 안 되는 곳이 호객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한 듯, 그 할머니 뒤를 따랐다. 딱 대학 4학년만큼 순진해서였을 수도 있고, 잘 곳이 마땅치 않다는 사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 할머니 얼굴이 밤길 가로등 아래에서 봐도 선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15분 가까이 걸었다. 길은 진작에 관광지다운 거리를 벗어났다. 놀러 온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깃들어 사는 사람들을 위한 동네로 갔던 것이다. 그 전에 이 산을 온 적이 두어 번 있지만, 중심가에서 떨어진 개울 건너편에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다.

할머니는 대문 하나를 밀며 사람을 불렀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잠시 뒤, 불이 켜 있던 안방에서 미닫이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마루로 나왔다. 마루 전등을 켜는 바람에 밤길을 걸어 온 눈이 부셨다.

- 고모님 오셨어요?
- 산에 오신 손님들 모시고 왔다.
- 아, 네...
- 그럼 난 간다. 편히들 쉬시우.

빛에 눈이 익숙해지고 보니, 안에서 나온 사람은 앳되어 보이는 새댁이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말로 미루어 보아, 이 집은 전문 민박집은 아니더라도 가끔 손님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 할머니가 터미널 쪽으로 온 것도 혹시 있을지 모를 막차 손님을 맞아가려던 것인지도 몰랐다.

- 어서 오세요, 늦으셨네요.
- 네, 어쩌다 보니 늦게 왔네요.
- 저... 잠시만요.

그녀는 마루를 가로질러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방을 정리하고 수건을 갖다두는 동안, 우리는 건넌방 앞에 놓인 쪽마루에 나란히 앉아 찬 하늘에서 흔들리는 별을 보았다.

방은 셋이 자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넓었다. 그래서 안방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는데, 안방이면 으레 있어야 하는 것들, 예컨대 텔레비전이며 장롱 같은 것이 없어서 건넌방임을 알았다. 방에 들어와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그녀가 창호지 발린 문을 두드렸다.

- 저... 식사 하셨나요?
- 아뇨.
- 저... 밥은 없지만 라면이라도 끓여 드릴까요?
- 아, 그래 주시면 정말 고맙습니다.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나는 동안, 안방에서도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 왔다. 선잠이 들었다가 깬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였다.

바닥이 거뭇거뭇한 냄비에 끓인 라면을 총각김치와 함께 맛있게 먹고 상을 내놓았더니, 다시 안방에서 그녀가 나와 상을 받아가며 말했다. 그럼 편히 주무세요. 환한 60촉 전구 불 아래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얼굴은 먼 발치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앳되게 보였다. 여고생의 얼굴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우리 넷은 조용조용히 마당에 나와 수도꼭지를 틀어 세수를 했다. 방에 이불을 펴고 앉거나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자그마한 책꽂이에 꼽힌 두터운 앨범을 발견했다.

민박으로 손님을 받아 방에 들였다고 해서, 그 주인의 추억까지 하룻밤 대여해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깐 망설였지만, 어린 나이의 호기심을 누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뒤로부터 시작해 거꾸로 펼쳐 본 앨범에는 이 집에 사는 가족, 아마도 가족이겠지, 그들의 삶이 한 장씩의 조각으로 쪼개져 들어 있었다. 이 집의 식구는 젊은 부부와 두 아이였다. 돌사진을 보니 안방에서 칭얼대던 아이는 만 두 살이 채 안 된 아들이었고, 그 위로 예닐곱 살 된 딸이 있었다. 부부의 결혼사진에 나왔던 남자는,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차림으로 찍은 큰 사진에도 들어 있었는데, 여자의 얼굴에 못지않게 어려 보였다. 그의 제복이며 모자에 달린 기장은 낯선 것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그가 배의 갑판이며 선수 위에 서 있는 사진이 나왔다. 아이의 아빠는 선원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서는 남자의 냄새도, 기척도 나지 않았다. 비록 돈을 받고 맞는 손님일지언정, 객이 왔으면 한 번 내다볼 만도 하고, 하다못해 헛기침이라도 한 번 할 만한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조용조용 이야기하다 불을 끄고 누웠는데, 안방에서 건너 오는 불빛이 밝았다. 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잠이 잘 오지 않은 것은 불빛 때문이 아니었다. 도배지 무늬가 어슴프레 드러나는 어둑어둑한 천장에서, 아까 보았던 사진 속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집 안에 이상한 영기(靈氣) 같은 것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방에서 아이가 잠결에 보채는 듯한 소리가 아주 낮게 들려올 때마다, 영기는 곧 한숨으로 토해지는 작은 원망 같은 것으로 바뀌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산에서 태어나 바다로 간 사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나로서는 조금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바다로 간 사내는 왜 젊은 아내와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산에 남겨두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속리산을 안고 있는 보은은 바다를 접하지 않은 유일한 도(道), 충청북도의 내륙에 자리해 있다. 산에 첩첩이 둘러쌓인 곳에서 작은 하늘을 이고 살아온 남자는, 막힘 없이 탁 터진 바다를 동경해 왔을까. 그러한 동경이 젊은 아내와 아이들을 멀리 떠나서도 살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일까. 오래 헤어졌다 잠깐 만날 수 있는 젊은 남편을 기다리는 어린 아내의 삶은 어떤 힘으로 유지되는 것일까. 나로서는 어슴프레한 불빛 속에서 천장의 사방연속 무늬를 짚어내는 것만큼이나 짐작이 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다음 날은 늦으막히 일어났다. 산을 끝까지 올랐다 내려와도 한 나절이면 충분하고, 저녁 버스를 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므로 특별히 서둘 일은 없었다. 문을 열고 마루로 나오니, 여자 아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안녕, 인사를 하고 세수를 하러 마당으로 나서는데 아이가 따라왔다.

한참을 이 아이와 놀았다. 아이를 앞세우고 마루 끝에 주르륵 늘어앉아서, 남부터미널에서 산 1회용 카메라로 사진도 찍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동생을 업고, 따뜻한 늦가을 볕 아래에서 가만히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다가, 내게 여동생이 있다면 저런 얼굴에서 저런 웃음을 짓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사진을 부쳐준다며 받아 온 보은군 내속리면의 주소로 사진을 보냈더니 고맙다는 답장이 왔다. 본문 글은 정갈한 필체였지만, 맨 밑에 달린 이름은 삐뚤빼뚤한 아이의 이름이었다. 편지글도 아이의 관점에서 쓰여 있었다. 이렇게 특이한 편지를 서너 차례 더 주고받았던 것 같다. 편지글은 조금씩 길어졌지만, 언제나 맨 마지막 서명은 아이가 했다. 아이 엄마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봄이 시작될 즈음, 편지 왕래는 끊겼다. 오래 전의 관계를 추억해 볼 때 으레 그렇듯, 어떻게 끊긴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산 속에서 해맑게 자라는 어린 아이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 편지를 쓰기에는 내가 너무 힘들고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가 시리도록 찬 물을 마실 때마다 오대산이 떠오르고, 산록을 물들인 불그무레한 꽃들을 볼 때마다 지리산이 떠오르고, 잔설 얇게 깔린 낙엽 위를 걸을 때마다 계룡산이 떠오른다면, 여자의 한숨 같은 것을 느낄 때마다 속리산이 떠오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속리산 자락의 어느 집 건넌방이 생각난다. 그 날 친구들과 한 산행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대신, 그 건넌방 천장의 아롱아롱한 무늬가 기억날 것도 같은 것은, 아마도 그 밤에 집안을 감싸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던 어떤 기운이 지나치게 인상적이어서일 것이다.

 

덧글

  • kirrie 2009/11/30 21:53 # 삭제 답글

    겨울이 깊어 눈이 내리면, 아직 그 집 처마에도 솜털같은 눈이 쌓일까요. 벌써 십수년은 훨씬 넘은 빛 바랜 이야기인가요. 들풀님 젊은 시절 잘 엿보고 갑니다. :)
  • deulpul 2009/12/01 12:14 #

    쌓인 눈이 녹아 흐르다 얼다 고드름이 되면, 그 계집애의 신나는 장난감이 되었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수천 날을 살아오는 동안 오직 단 하루 지나친 가족인데도,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납니다.
  • pr1vacy 2009/12/01 00:34 # 삭제 답글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문득 속리산을 가보고 싶네요. 산 가까이 살면서도 정작 그 산을 오른 것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 이렇게 멀리멀리 떠나와 돌이켜보니 아쉬움이 더 많이 쌓입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 deulpul 2009/12/01 12:18 #

    아, 그러고 보니 그 쪽의 기운을 받아 나고 자라셨죠, 정말. 그 산이 제게 특별해진 것은 적당히 멀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집 가까이에 좋은 산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주 친하지는 못했죠.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은 참 깨닫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 꿈꿀권리 2009/12/01 01:03 # 답글

    집안 어른이 속리산 부근 모텔을 곡절 끝에 소유하게 되었는데
    딱 하루저녁 거기서 머무시더니 그 다음날 성당의 성수를 층층마다 뿌리더군요.
    여자가 보이더라... 그러니 손이 잠을 못이루고 새벽에 문을 나서는게야...
    모텔은 얼마 안있어 다시 매물이 되어 부동산 게시판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더군요.

    물론 들풀님이 겨울 초입에 납량특집을 올리신건 아니지만
    깊은 한숨이 생명처럼 허공을 떠돌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요.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이 겹치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는건지...
    12월입니다.
  • deulpul 2009/12/01 12:24 #

    여자가 보이는데, 도력 높지 않은 손이라면 잠이 오겠습니까, 하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제 마음을 건드린 것은 서럽고 깊은 한(恨)이라기보다 미세하고 은연한 정도의 그것이었는데, 하긴 한이 뭐 별 거겠습니까. 조금 서럽고 조금 외로운 마음이 쌓이고 쌓이면 깊은 한이 되는 것이겠죠.
  • 러움 2009/12/01 13:36 # 답글

    아 요즘 책을 많이 못 읽는데, 들풀님이 꼭 저 읽으라고 쓰신듯한(퍽퍽) 좋은 글이네요. >_<;;; 잔잔하게 따라읽다보면 전혀 모르는 곳임에도 풍경을 그릴 수 있게 되는게 신기합니다. ㅎㅎ 물론 같은 풍경은 아니겠지만요. :)
  • deulpul 2009/12/01 14:56 #

    글이 비디오 매체와 다른 점이 바로 거기라고 생각합니다. 세트를 세우고 찍어 모두 다 보여주면 각자가 생각할 여지가 없이 모두 표준화된 이미지를 갖게 되지만, 글로 묘사된 것은 사람마다 제각각 나름의 세트를 구성하고 간직하게 해 주는 미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그리신 장면은 제가 실제로 겪은 것과 차이가 나겠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분모가 있는 것이겠지요.
  • 박승준 2009/12/20 22:48 # 삭제 답글

    우와. 글 정말 잘 쓰시네요. 손으로 넘기면서 읽었으면 더 좋았을법한(종이 냄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정말 부러운 글솜씨입니다. 'ㅅ'b
  • deulpul 2009/12/22 11:20 #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꼭 성공하셔서 출판사 차리신 뒤 연락 주십시오... 하하.
  • 2009/12/23 01: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9/12/23 01:24 # 답글

    블로그 공부하시는 분께: 개인 정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비공개로 돌렸습니다. 가능한지의 여부는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 서혜영 2009/12/27 07:58 # 삭제 답글

    블로그 인터뷰 문의한 사람입니다! 메일보냈는데, 확인바랍니다!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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