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섞일雜 끓일湯 (Others)

지난 10월, 중국 후베이성을 흐르는 양쯔강에서 벌어진 일이다. 강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나들이배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어린이 두 명이 강에 빠진 것이었다. 비록 강변에서 가까운 지점이긴 했으나, 강은 깊었고 물살은 세찼다. 깊이가 5미터에 가까웠다.

놀란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첨벙, 소리가 났다. 한 청년이 물로 뛰어들었다. 아이들 쪽으로 헤엄쳐 간 청년은 한 아이를 움켜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그 사이에 힘을 다 써버렸다. 세찬 물살을 헤쳐 가는 데 물에 젖은 청바지는 큰 장애가 되었다.

청년이 배를 향해 소리쳤다.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다시 첨벙 소리가 연이어 났다. 다른 세 청년이 물로 뛰어든 것이다. 두 청년은 맨 처음에 뛰어든 청년으로부터 아이를 받았고, 다른 청년은 나머지 아이를 구하려 했다.

이들은 모두 장강대학 학생들이었다. 나들이를 나온 학생들 중에서 헤엄을 칠 수 있는 사람은 이들 넷뿐이었다. 다른 학생 아홉 명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들은 급히 강변으로 달려가 인간 사슬을 만들어 강쪽으로 접근하며 물에 들어간 동무들을 도우려 했다.

아이들 둘은 무사히 강변으로 나왔다. 그러나 사태가 급변했다. 학생들은 강변 가까운 곳을 흐르는 강 속에 그렇게 강한 급류가 흐르고 있을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갑자기 인간 사슬이 끊어지면서, 강 쪽에 있던 학생들이 급류에 휘말렸다.

이 사고로 대학생 세 명이 숨졌다.
사고 당시, 바로 근처에는 고기잡이 배가 하나 있었다. 학생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배를 향해 소리쳤다.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달라고. 그러나 이 배의 선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물론 고기잡이 배 선원들은 아무도 희생되지 않았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상상을 하게 된다. 내가 만일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의 눈 앞에서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면. 나의 눈 앞에서 사람이 지하철 철로에 떨어져 버렸다면. 나의 눈 앞에서 불 속에 사람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면. 나의 눈 앞에서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면.


-- * -- * --


늦은 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날은 평소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

흐릿한 불빛이 비추는 길을 따라 걷던 그에게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신경이 곤두선 그는 걸음을 늦추었다. 비명은 곧 무언가에 막혀 버렸으나, 곧이어 흐느끼는 소리, 섬유가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의 풀숲에서 벌어지는 소리였다. 상황은 명확했다. 어떤 여자가 공격 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자를 구하러 달려가야 하나. 범인이 흉기를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나까지 위험해 지지 않을까. 경찰에게 전화를 할까.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데 한참 걸릴테지. 모르는 체 하고 지나갈까. 그러기엔 저 여자가 너무 안 됐지 않은가. 왜 하필이면 내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아니, 무엇보다 왜 오늘 굳이 이 길로 들어섰을까. 그러고 보니, 이처럼 급박한 상황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얼마나 혐오스러운가.

그는 용감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또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센 종류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결국, 비명이 난 곳으로 달려간 것은 결국 선의(善意)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로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며, 동시에 꽤 위험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여자를 공격하고 있는 범인을 뒤에서 낚아챘다. 그 바람에 둘 다 뒤로 넘어졌다. 몇 분 동안 격투가 벌어졌다. 이윽고 범인은 달아나기 시작했으며, 다행히 그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어두운 나무 뒤에서 여자는 울고 있었다. 어두워서 여자의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여자가 겁에 질려 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리를 두고 서서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그 놈은 도망갔어요. 안심해도 됩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 여자가 말했다. "아빠, 아빠에요?" 어두운 나무 그늘에서 나온 것은 그의 막내딸이었다.


-- * -- * --


만일 그가, 공격 받는 여자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범인에게 달려드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위에 벌어진 일은 기막힌 우연이지만, 그 여자는 그의 딸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의 딸이었을 것이다. 내 딸이 아니어서 내가 지나치는 동안, 내 딸이 위험에 처했을 때 다른 아빠는 또 나처럼 지나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편적 딸이 그런 위험에 빠지면 보편적 아빠가 행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폭을 넓혀서, 보편적 인간이 위험에 빠지면 보편적 인간이 해야 할 행동도 대개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 인간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순간적으로 생존 본능에서 나온 위기 평가를 한다. 이 위기 평가와 윤리적 당위 사이의 저울질은 오로지 개인의 머리, 혹은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위기 평가가 객관적 상황, 즉 상수라면, 윤리적 당위는 전적으로 개인의 윤리적 감수성에 달려 있는 주관적 영역, 즉 변수다. 따라서 개인의 행동은 후자에 종속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아이들이 물에 빠진 상황을 앞에 놓고, 목숨을 잃은 중국 대학생들처럼 될 수도 있고 팔짱 끼고 구경하는 고기잡이 배 선원들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좀 우울해진다. 사람들은 자기 일, 혹은 자기 가족의 일이 아니면 잘 나서지 않는다. 그 결과, 감수성이 예민한(혹은 계산이 느린)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차에 치여 죽으며 도태되고, 감수성이 무딘(혹은 계산이 빠른) 사람들은 자신의 계산에 흡족해 하며, 혹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의 무모함을 비난하며 번성하는 게 아닌가.

물론 무모함은 이성의 적이다. 아이가 눈 앞에서 물에 빠졌다고 무작정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자신의 헤엄 실력을 따져 보고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 것인가. 생각건대,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동류적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지, 혹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까지 보편성을 요구할 수 있는지가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듯싶다. 인간에 대한 존엄, 인간에 대한 예의란 다름 아닌 이런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식 귀하고 자기 가족 소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동물도 그런다.

한 가지 위안이 있긴 있다. 모든 선의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잘 해결이 된 사례는 별로 화제가 되지 않는다. 위의 장강대학 학생 경우도, 그들이 아이를 구해내고 자신들도 무사히 빠져나왔다면 내 귀에까지 들어오는 뉴스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를 구하려다 함께 숨졌다"는 뉴스는, 누구를 구하려다 함께 숨졌기 때문에 뉴스가 된 것이다. "누구를 구해서 함께 살아남았다"는 소식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 아무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훨씬 많을 것이다. 윤리적 감수성이 예민한 보편적 인간들이 현실에 뛰어들어 다른 인간을 구해 낸 수많은 사례가 뉴스가 되고 화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 이게 위안이 된다.

※ 양쯔강에서 벌어진 장강대학 학생들의 비극은 뉴스에서 본 이야기이며, 성폭행당할 뻔했던 딸을 구한 이야기는 책 <작은 기적들(Small Miracles)>에 나온 실화다. 지난 연말에 사무실 동료로부터 선물 받은 책인데, 버스 타고 다닐 때 조금씩 읽고 있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작은 기적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다. 영어 원저는 책 속에 묘사된 여러 가지 선의와 우연을 '신의 섭리'로 강조한 데 비해, 한국 번역본에서는 신성(神性)을 탈색하고 가족애로 대치한 게 흥미롭다.

 

덧글

  • Niveus 2010/01/21 10:11 # 답글

    반대로 그런 선행들이 좀더 뉴스에 나오고 화제가 되서 선순환되는 구조가 되는게 좋다고도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매스컴이라는것의 선역할은 그런식으로도 구현될수 있으니까요.
  • deulpul 2010/01/21 12:56 #

    의미 있는 지적이십니다. 이른바 '좋은 뉴스(good news)'를 매체에 어떻게 반영시킬 수 있을까는 매체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독자가 기자인 <오마이뉴스>에 일상 생활의 미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한 일이고요. 매체에 노출되는 정도와 자기가 사는 세상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 사이에는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는데, 이 점도 생각해 볼만한 일이겠죠.
  • 긁적 2010/01/21 12:09 # 답글

    1. 참 대한민국의 기독교 까기 열풍도 과하군요 -_-.... 저런 번역도 바뀔 정도라니.
    2. 저는 제 딸이 성폭행 당해도 무조건 119 먼저입니다. 미국이라면 특히 더.
    다만 제 딸인걸 알면 총 맞을 각오 하고 달려들겠죠 -_-.....
    애들이 물에 빠져도 마찬가지입니다. 119에 가장 먼저 연락하고, 이후 주변에 물에 뜰 만한 튼튼한 물건을 던져줍니다.
    저는 그 아이들을 구할 능력이 없으니까요.
  • deulpul 2010/01/21 13:01 #

    제가 한국어판을 직접 본 게 아니니 책 전편에 걸쳐 그런지는 알기 어렵고요, 번역이 바뀌었다기보다 책의 지향이나 방향성, 취지 같은 게 좀 달라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저렇게 본 것은 '가족'을 내세운 출판사의 소개글이 'God'를 중심으로 한 원서의 서문과 큰 차이가 있어서였습니다. 2번은... 긁적님은 딸이 없으신 게 틀림없어요, 하하-. 농담이고요, 저도 정답은 없습니다. 제가 만일 저의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을 가정해서 말해야 한다면 긁적님처럼 하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어려운 문제죠.
  • wgundam 2010/01/21 16:06 # 답글

    두번째 스토리의 암흑버전을 이야기해드릴까 합니다.

    길에서 함부로 욕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여성들에게 음담패설같은 욕(허벅지 다 드러내놓고, 남자들 꼬시러가는 씹팔년이 뭘 꼬라봐?)을 퍼붓는 식으로 [자신에게 피해가 안올만한 경우]에만 욕을 해대더군요.

    이 노인이 어느날은 서울역 지하철 4호선쪽의 에스컬레이터에서 여성이나 장애인같은 약자들에게만 욕을 퍼부어대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남자가 힐끗 뒤돌아보자 그 남자한테도 욕을 합니다.

    "뭘 쳐다봐? 눈깔을 확 뽑아버릴라"

    자신의 생각에는 에스컬레이터(서울역 4호선 환승을 위한 에스컬레이터는 좀 깁니다)를 타고 내려가서 다시 안올라올것이라 생각했지만....그 남자는 올라갔습니다. 내버려두면 그 노인이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남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피해를 주는 상황이 지속될 것 같았으니까요....한마디로 민폐가 지속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왜 지나가는 사람에게 욕을 하시나요?"

    노인은 저음에는 당황하더니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이놈이 어디 눈을 치켜뜨고 그래? 너 몇살이야?"신공을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있는 사람은 함부로 지나가는 사람한테 욕을 해도 좋으냐' '이놈은 지 애비애미도 없냐'....

    이 소동이 벌어지자 당연히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지하철 역무원이 와서 자초지정을 듣고는 노인을 나무라자 노인은 지하철 역무원을 밀치는 등 소동을 더 피우고,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여 노인을 야단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주위에는 많은 여성들은 휴대폰을 꺼내 그 남자와 노인의 말싸움 장면을 녹화하기 시작하더군요.
    그 여자들에게 "그러지 마라'고 이야기하자....도망가면서 찍고 있습니다.
    .
    .
    .
    네, 성희롱의 대상이 되었을 바로 그 여성들이, 그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나선 사람을 오히려 구경거리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그 남자는 여전히 선행을 합니다. 계단에 커피캔이 굴러다니면 누가 밟아서 넘어질까봐 주워다 버리고, 혹은 위험한 물건이 있으면 길가다 멈춰서서 치웁니다.

    그렇지만 누가 성희롱 or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에 그는 나서는 것을 두번세번 생각해볼 것입니다....그리고 아마 나서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쉽겠지요.
    .
    .
    .
    언젠가, 그래서 언젠가 그렇게 동영상을 찍은 여성이 당하고 있어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여자가 그것을 남성들의 인식 탓으로 돌린다면...최소한 그 남자는 이렇게 반론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선 사람에게, 여성들은 어떤 일을 했는가?" 하고 말이죠....
  • wgundam 2010/01/21 16:18 #

    추가로, 아마 두번째 스토리 같은 상황이 만들어질수 있지 않는가?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보다 고확률의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나서서 격투끝에 여자를 도망보냈더니, 나중에 경찰에서는 오히려 남자를 구타한 폭력범으로 몰렸는데 정작 여자는 도망가서 찾을 길이 없어 오히려 자신이 폭력사범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의 확률이 더더욱 많다 고 말이죠.

    그렇게 도망가서는 "아, 난 이제 안전해, 저 남자가 어찌되든 이제는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하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을 대신해 나선 남자가 어찌되었는지 경찰에 확인해 보려는 시도도 안했을리는 없을 것입니다.

    "어제 이러이러한 장소에서 누가 절 구해주었는데요...혹시 그 부근에서 다친 사람이 있나요?" 같은 내용을 경찰에 확인해 보는 것은 기본일테죠...

    "이러이러한 인상착의의 사람이 저를 성폭행하려 했는데요"와 같은, 여성들 공통의 이익을 위해서 나서지 않는 사람들이 나서지 않는 남성만을 탓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 Terzeron 2010/01/21 17:11 # 삭제

    wgundam님께서 말씀하신 피해자는 사라지고 가해자와 선의의 제 3자만 남은 경우를 제가 예전에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마터면 형사 입건될 뻔 했죠. 다행히도 자초지종 설명하고 학생증 제시했더니 경찰에서 훈방 조치... 다음에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저는 아마 좌시하지는 않겠지만 직접 개입하지도 않을 겁니다.
  • 긁적 2010/01/21 19:07 #

    그러니 진리의 119 -_-/
  • deulpul 2010/01/21 23:34 #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야기해 주신 사례는 여러 모로 해석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이해합니다. 게다가 현실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놨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고 한다'는 식의 경우도 드물지 않고요. 오죽하면 그런 속담까지 있을까요.

    말씀해 주신 데 대해, 위의 책 <작은 기적들>에 달린 글이 정확한 대답이 될 수 있을 듯해서 간단히 옮겨 올까 합니다. 한글판은 모르겠습니다만, 영문판에는 각각의 에피소드 끝에 저자들의 '코멘트'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본문에 인용한 사례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가 붙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선행을 해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한다. '좋은 일 해봐야 나만 손해지'라는 냉소적인 지혜가 얼마나 흔한가. 그러나 위의 이야기(즉 성폭행 위기에 처한 딸을 구한 이야기)는 종종 이런 생각과는 정반대의 일도 벌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주인공은 낯선 여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섰지만, 결국 그가 구한 것은 위기에 처한 자기 딸이었다." (이하 생략)

    실제로는 좋은 일을 하고 일이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사례도 무척 많습니다. 다만 그렇지 않은 사례들이 분명히 있고, 도와주고 고맙다는 말 들을 때의 보람보다 도와주었는데도 거꾸로 비난을 받거나 손해를 보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을 때의 실망이 몇 배로 크기 때문에 '좋은 일 해봐야 나만 손해지'라는 지혜가 퍼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좋은 일 하고 손해 안 보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wgundam님은 '고확률'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역시 돌출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좋은 일 해봐야 나만 손해다'라고 생각하고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합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혹시 wgundam님이 지하철 논쟁의 주인공이시라면, 말씀대로 계속 선행을 하시는 분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Terzeron님이 쓰신 것과 함께 생각하면, 역시 시스템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증인되기 정말 힘듭니다. 잘못된 사법 체계는 증인을 범인이나 피고인처럼 대접합니다. 그럴 바에야 입 닥치고 사는 게 훨씬 편하죠. 권력 기관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아울러, 예컨대 증인이 된다거나 하는 일에 개인적 비용이 들더라도, 이를 민주 시민, 혹은 공민(公民)의 당연한 의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많이 봅니다. 그런 점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 2010/01/22 00:5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0/01/22 04:11 #

    이유는 잘 모르지만, 틀림없이 인식의 평균점이 이동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살기가 너무 각박해서일까요. 언제는 고복격양 태평성대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요...
  • 2010/01/22 02:3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0/01/22 04:15 #

    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무관심이 사회적으로 학습되는가 하면, 거꾸로 미담도 H1N1 못지 않게 전염력이 크죠. 어느 쪽 트랙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결과가 꽤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 구하려다 죽었다는 뉴스만큼 사람 구해내고 잘 살았다는 뉴스도 좀 보았으면 싶네요.
  • deulpul 2010/01/22 04:05 # 답글

    바로 위에위에, 시간이나 돈의 비용이 들더라도 증인이 된다거나 하는 일을 공민의 당연한 의무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이 생각이 났습니다.

    동료와 함께 출장을 다녀오던 길에 벌어진 일입니다.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호텔 밖에는 택시 운전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호텔 유리문을 통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수속이 끝나고 가방을 들고끌고 호텔문을 나설 때였습니다. 택시 운전사가 부리나케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가방을 받아 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필이면 바로 그 때, 자전거 하나가 정차한 택시의 왼쪽으로 오다가, 운전석 문이 열리는 바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택시 운전사는 우리에게 신경을 집중하느라, 뒤에서 자전거가 오는 것을 못 보고 문을 연 것이죠.

    큰 사고는 아니었는데, 문제는 자전거를 타던 사람이 나이가 좀 많은 할머니였다는 점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길에 넘어지자, 택시 운전사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할머니한테 달려가 부상 정도를 살폈으며, 자전거도 도로 한 쪽으로 치웠습니다.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상황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나를 물었습니다.

    저는 이 때, 동료에게 상황에 연루되지 말고 다른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이유는 1) 비행기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을 지체하면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는 점, 2) 우리 말고도 목격자들이 여럿 있었다는 점, 3) 사고가 별로 논란이 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나면서부터 바로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이유는 1) 어쨌든 우리가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며, 2) 불쌍한 택시 운전사는 우리를 위해 친절을 베풀려다 사고를 냈으며, 3) 그가 왜 성급하게 문을 열었는지를 설명해 줄 사람은 운전사 말고는 우리밖에 없을 것 같았으며, 4) 이게 사고 책임을 따지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우리의 증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현장을 떠난 것은 위에서 말한 공민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동료까지 공민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내빼자고 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항으로 오는 내내 찜찜했습니다. 물론 택시 운전사나 할머니나 누구든 우리가 필요했다면 연락할 방법은 있었을 겁니다. 호텔에 문의하면 연락처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만, 여하튼 해야 할 일을 못하고 떠난 것 같아서 속으로 불편했습니다. 그런 불편함을 갖느니, 차라리 조금 더 머무르면서 상황을 마무리하고 떠날 걸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아마, 사고가 나고 나서 난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중남미 출신 택시 운전사의 얼굴 때문이겠지요. 여하튼 뜻이 있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010121 2010/01/22 04:32 # 삭제 답글

    두번째 상황에 마주했을때...

    무모하게 달려들지 맙시다......

    그냥 크게 소리쳐서 사람을 모으는게 최곱니다...
  • deulpul 2010/01/22 10:21 #

    그렇겠죠? 하지만 "저 사람 뭐야...?" 하면서 모두 지나간다.
  • 들꽃향기 2010/01/22 14:31 # 답글

    잘 읽고 갑니다. 그리고 두번째 상황을 마주쳤을때 저라면 가까운 곳의 흉기나 실팍한 뭉둥이를...(쿨럭)
  • deulpul 2010/01/27 15:16 #

    그 방식을 쓰신다면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려고 기를 쓸지 모릅니다...
  • ㅇㅇ 2010/01/22 14:36 # 삭제 답글

    제가 아는분 이야기입니다.

    편의점을 운영하시는데 새벽에 인계를 받으려고 길을 가다가 편의점 근처에서 불이 나는것을 발견해 바로 119에 신고를 하셨답니다.

    문제는 그 후에 경찰들의 태도였는데 경찰서에서 오는게 아닌 경찰서로 오라고 해서 그분의 시간을 빼앗으면서 이것저것 증언을 확보하려고 하더라구요.

    그 후로 그분은 최대한 자신의 신상이 까발려지지 않을 선에서만 신고를 하시기로 마음을 먹었답니다. 비록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요.

    진짜 시스템적 문제는 이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 deulpul 2010/01/27 15:20 #

    또 한 분의 비자발적 방관자를 만든 셈이군요. 뜻 있는 시민이 신고하고 협조하고 싶어도, 이런 대접을 받는다면 누가 신고나 하겠습니까. 경찰 업무가 바쁘고 어쩌고 해도 할 일은 제대로 하도록 체계가 갖추어져야 하리라고 봅니다.
  • 은은 2010/01/22 21:57 # 삭제 답글

    의미 있는 의견을 제시해주셨는데,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고 좀 더 복잡한 이야기가 있겠지만, 일단 읽어 보기에는 약간 나이브한 것 같습니다. 이를 단순히 인간의 선의로만 설명하거나 그를 통해 규명할 수는 없지 않나 생각하는데요. 물론 종교 서적이나 <좋은 생각> 같은 잡지에서는 이런 정신을 설파하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게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고만 하긴 어려운 거죠. 한편의 도덕에서는 자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남의 안위를 구하는 걸 도덕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신의 안위에 그 자리에 없는 여러 사람의 안위가 달려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드는 건 무책임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또 많은 경우 구하지 않는 사람이 구하는 사람보다 덜 도덕적이다/ 구하는 사람이 구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구하는 행위가 도덕적일 수는 있지만요. 이런 건 철학 시간에 의논해 봐야 하는 얘기고요. 일단 다른 관점에서 말해보면,


    (1) Safety in Numbers의 현실성 - 이미 벌써 실험으로 많이 입증된 건데, "safety in numbers"는 슬프게도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주변에 자기 이외의 사람이 많으면 도와야겠다는 경향이 떨어지니까요. 실험자가 혼자 있을 때와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개입하는 빈도는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서요. 물론 그 중에서도 특히 도덕적인 사람이 돕는 것이지만 인간의 도덕심이 환경과 반응해서 작용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중 말씀하신 것처럼 자발적으로 남을 돕는 사람이 있는데요 (환경의 변화에 상관 없이), 오히려 이렇게 익명의 대중 사회에서 남을 돕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많아질 수 있는지 사회 심리학적 측면에서 생각해 보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보상이나 포상 같은 강화도 중요하겠지요.

    (2) 선한 사마리아인 법 - 덧글로도 많이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선의를 증가시키고 그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적 보완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 법 같은 게 등장합니다.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돕지 않기 때문에, 도왔을 경우 그 사이에 발생하는 위법적 행위에 대해 면책을 해주는 법이 있어야 하는 거죠. (혹은 아예 공격적 의미의 선한 사마리아인 법은 돕지 않으면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건 난관이 많을 것 같네요.) 이런 식의 제도적 보충이 없고서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도 미비한 판에 자발적으로 도우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시 돕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게 예측적 행동이라고 하긴 어려워요.

    (3) 도덕의 법적 의무화: 결국 말씀하신 대로 남을 돕는 걸 공민의 의무로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혹은 그런 시스템이 없으니까 개인의 도덕성이라도 향상하자고 말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이 법적 의무화가 되지 않는 사회가 개인의 도덕성은 높은 사회일까요? 어느 쪽을 실행하는 게 더 빠를까요? 항상 갖는 의문입니다.

    물론 도덕적 의무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실행하는 건 존경할 만한 일입니다. 그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 deulpul 2010/01/27 16:01 #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시는 말씀이군요. (1), (2) 모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읽은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다 보니,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지의 여부가 초점이 되어 버린 듯싶습니다만, 원래는 무관심을 경계하자는 뜻이었습니다. 무관심이 아니라면 그 방법은 '119'에서부터 '몽둥이'까지 다양할 수 있으리라 싶고요. 코 앞에서 벌어지는 남의 불행에 점점 무심하고 둔감해지는 세태에서 한 번쯤 함께 돌아보자 싶어서 쓰다보니 저렇게 되었습니다.

    물에 뛰어든 사람과 발을 동동 구른 사람 사이에 도덕적 의식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과 옆에서 팔짱 끼고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크다고 봅니다. 피해자가 남이 아니라는 생각, 내 아이처럼 소중한 누구의 아이이고 내 딸처럼 소중한 누구의 딸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불구경하듯 하지는 못할 것이고, 그래서 이런 문제에서도 보편적 인간에 대한 존중이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행동보다 마음가짐이나 태도의 문제를 더 보고 싶었다고 할까요.

    사실 저 양쯔강 사례에서는 더 기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선원들이 팔짱 끼고 구경하던 고깃배는 나중에 희생자 장례가 치러진 뒤 주민들로부터 돌팔매 세례를 받았습니다. 숨진 대학생 세 명의 시신을 끌어올리던 수색업체 직원은 돈을 주지 않으면 시신을 인도하지 않겠다면서, 끌어 올린 시신을 뱃전에 매달고 흥정을 했습니다. 이런 기사를 본 끝이라, 단순하면서도 원론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군요. 제가 쓴 것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만슈타인 2010/01/26 13:29 # 답글

    사회에서 국가에서 장려를 한다고 밀어준다고 해서 그 본질적 가치는 훼손되는 것은 아니니 이런 건 장려할 만하다고 봅니다.
  • deulpul 2010/01/27 15:58 #

    제 블로그질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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