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방언에 대중이 자학할 필요는 없다. 그 대상이 심지어 소녀시대라도 말이다.
이택광, 문화비평, 블로그, 일기
조만간에 이런 글이 나올 줄 알았다.
두 가지 점만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논란이 된 원래의 글에서 설득력 있는 논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 둘은 이와는 별개로, 전문가의 글이란 어떤 시각에서 보아야 할까 하는 점이다.
나는 최근 화제가 된 한 글에 대한 논란에서, '단어'만 거론이 되고 논리가 거론되지 않는 것을 매우 희한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필자가 '어려운 단어'를 썼다고 질타하고 성내고 나무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들 용어 탓, 혹은 이 용어들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이 없는 탓이라고 여겼다. 나는 이 점이 놀라웠다.
내가 보기에 해당 글의 문제는 전문 용어를 썼다는 점이 아니라, 글의 논리가 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논리에 설득력이 없었다고 해도 된다. 어떻게 표현하든, 문제는 단어가 아니라 논리였다. 문제의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어려운 단어가 출몰해서가 아니라, 합리적 논리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글에서 돌출하고 있는 개개의 개념 사이에 연결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 글에서 쓰인 특정 술어나 개념들을 쉬운 말로 바꾸어 놓더라도, 글은 여전히 이해불가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해당 글에 가득 찬 비논리적이고 즉흥적인 진술들의 결함이, 어려운 술어 덕분에 오히려 면책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논리로 보자면, 해당 글의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지만, 표피를 들추면 필자의 '쓰고자 하는 욕망' 이상의 것을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러한 문장들이 일관되거나 합리적인 논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이런 상황을 아주 부드럽게 표현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다. 유로스님의 글은 이러한 점을 제대로 지적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원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정성으로.
흥미로운 것은, 비판이든 옹호든, 문제의 글을 이해하는가의 여부가 '인문학적 지식'의 바로미터처럼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문학적 지식이 없어 해당 글이 이해가 안 된다고 고백하기도 했고,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에게 인문학적 지식이 없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의 글에 나온 개념들은 인문학의 큰 바다에서 보면 지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개념들이 인문학의 전부도 아니고 대표도 아니다. 그런 개념들을 안다고 해서 인문학적 지식을 갖춘 것은 전혀 아니다. 문제의 글이 '인문학자의 글'이라서 어렵게 느껴졌다는 사람도 있는데, 대개의 인문학자들은 이렇게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이른바 인문학자로서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글로 인문학을 구성해 나가는 도정일을 보면 문제의 글이 인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글쓴이의 문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도정일이 말하는 인문학적 소양의 내용을 잠깐 인용해 보자:
도정일에 따르자면, 이른바 인문학자가 인문학적 삶의 제1조도 체화하지 못하면서 살 수도 있는 모양이다.
인문학적 지식의 영역은 폭넓고 크다. 생경한 외국 이론에서 나온 전문적인 개념들만이 인문학인 것은 아니다. 근현대사는 물론이고 고대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첨예한 논쟁들은 일정한 인문학적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디서 많이 보시는 모습 아닌가. 순수문학이든 장르문학이든 창작물을 읽고 평가하는 안목도 인문학의 영역에 포함된다. 자연과학에서 수식이 기초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듯, 말과 글에 대한 엄밀성 역시 매우 중요한 인문학적 소양이고 인문학적 교양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문학을 상아탑 안에 봉쇄함으로써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삼으려는 움직임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 중 하나다.
교수가 하는 일은 전공 공부다. 그 결과물이 항상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분야든, 학회에 발표되는 논문 목록 한번 보시라. 대체 이런 걸 '발견'하고 '증명'해서 누구에게 도움이 되며 무슨 쓸모가 있나 싶은 생각 절로 드실 것이다. 그래도 그런 걸 해야 하는 게 교수며 학자의 직업이다.
이런 점에서, 문제의 글에 대한 논란이 지성 vs. 반지성 논란이 되는 것은 놀랍다. 작금에 팽배한 반지성주의, 특히 권력에 의해 조장되고 강요되는 반지성주의는 세심하게 주시해야 할 부분이지만, 생경한 외국 이론과 그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반지성이라고 몰아붙이는 상황은 어이가 없다. 기도원에서 하는 방언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게 듣는 사람에게 의미 있는 언어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방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반지성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비록 그 방언이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식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하여도, 내가 그 방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몰상식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른바 문화 비평을 하는 학자가 대중 문화, 예컨대 소녀시대를 분석하는 일은, 원자핵물리학자가 핵반응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원자핵물리학자가 수식을 써 가며 하는 말을 들으며 '자연과학적 지식'이 없는 자신을 탓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원자로 반응이 아니라 소녀시대를 주제로 한다고 해도 완전히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중에게 익숙한 소재만을 취하고 있을 뿐, 대중을 상대로 하여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말에 대중이 불편해하고 더 나아가 자학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제가 '대중 문화'이니만치, 더구나 대중이 읽는 공간에서라면(이 '공간'의 규정성은 또다른 흥미로운 문제다),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 써 준다면 고마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전문가가 그렇게 해 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러한 데 관심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바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예컨대 정혜신을 좋아하는 것은 그런 데 관심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예컨대 철학자 김영민을 존경하는 것은 그런 관심을 현실화할 수 있는 소통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어에 배타성을 부여하여 권력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미국 잡지 <포린 폴리시>는 2009년 말 특집호에서 전세계의 탁월한 'thinker' 100명을 뽑은 적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토머스 프리드먼은 21번째로 꼽혔다. 그가 뽑힌 이유를 <포린 폴리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복잡한 사상을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그의 천부적 재능 때문에. 이것은 능력이다.
많은 전문가가 대중을 상대로 하여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이것을 학문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여기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그들은 말과 글과 소통을 고민한다. 그들이 이런 의도로 쓴 글이 대중에게 불친절하다면, 그런 의도에서는 빵점이고, 이를테면 그의 글을 싣는 매체는 그 필자를 해촉, 다시 말해 짤라버릴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어떤 전문가가 그런 의도를 갖지 않은 채 글을 쓴다면, 그가 굳이 친절한 글을 써야 할 의무는 없으며, 대중 독자가 친절한 글을 쓰지 않았다고 그를 비난할 필요도 없다. 다만 대중의 시야에서 볼 때, 혹은 공공지식인의 범주에서 볼 때 배제되고 도태될 뿐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상아탑 안에서만 살기로 한 사람에게, 그리고 오로지 그런 사람에게만 축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전문가의 방언과 대중의 자학'이라는 두루뭉술한 제목을 달았지만, 만일 이 글에 영문 제목을 붙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Don't bother with their narcissism.
이택광, 문화비평, 블로그, 일기
조만간에 이런 글이 나올 줄 알았다.
두 가지 점만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논란이 된 원래의 글에서 설득력 있는 논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 둘은 이와는 별개로, 전문가의 글이란 어떤 시각에서 보아야 할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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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 화제가 된 한 글에 대한 논란에서, '단어'만 거론이 되고 논리가 거론되지 않는 것을 매우 희한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필자가 '어려운 단어'를 썼다고 질타하고 성내고 나무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들 용어 탓, 혹은 이 용어들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이 없는 탓이라고 여겼다. 나는 이 점이 놀라웠다.
내가 보기에 해당 글의 문제는 전문 용어를 썼다는 점이 아니라, 글의 논리가 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논리에 설득력이 없었다고 해도 된다. 어떻게 표현하든, 문제는 단어가 아니라 논리였다. 문제의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어려운 단어가 출몰해서가 아니라, 합리적 논리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글에서 돌출하고 있는 개개의 개념 사이에 연결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 글에서 쓰인 특정 술어나 개념들을 쉬운 말로 바꾸어 놓더라도, 글은 여전히 이해불가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해당 글에 가득 찬 비논리적이고 즉흥적인 진술들의 결함이, 어려운 술어 덕분에 오히려 면책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논리로 보자면, 해당 글의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지만, 표피를 들추면 필자의 '쓰고자 하는 욕망' 이상의 것을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러한 문장들이 일관되거나 합리적인 논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이런 상황을 아주 부드럽게 표현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다. 유로스님의 글은 이러한 점을 제대로 지적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원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정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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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비판이든 옹호든, 문제의 글을 이해하는가의 여부가 '인문학적 지식'의 바로미터처럼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문학적 지식이 없어 해당 글이 이해가 안 된다고 고백하기도 했고,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에게 인문학적 지식이 없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의 글에 나온 개념들은 인문학의 큰 바다에서 보면 지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개념들이 인문학의 전부도 아니고 대표도 아니다. 그런 개념들을 안다고 해서 인문학적 지식을 갖춘 것은 전혀 아니다. 문제의 글이 '인문학자의 글'이라서 어렵게 느껴졌다는 사람도 있는데, 대개의 인문학자들은 이렇게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이른바 인문학자로서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글로 인문학을 구성해 나가는 도정일을 보면 문제의 글이 인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글쓴이의 문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도정일이 말하는 인문학적 소양의 내용을 잠깐 인용해 보자:
자본주의 문화는 자아의 문화, 나르시시즘 문화죠.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이해관계만 따지고, 절대로 문을 열지 않고, 접촉은 이해관계가 통할 때만 하고. 그런 문화 속에서 자아라고 불리는 단단한 문의 폐쇄화가 끊임없이 일어나죠. 이럴 때일수록 껍질을 깨주는 상상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인문학적 경험은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인문학적 삶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내가 첫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이 '가슴을 여는 사회'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울타리를 걷어치울 줄도 알아야 하죠. 그래야 타자가 들어오거나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삶의 제1조에요. (<대담>, 32쪽)
도정일에 따르자면, 이른바 인문학자가 인문학적 삶의 제1조도 체화하지 못하면서 살 수도 있는 모양이다.
인문학적 지식의 영역은 폭넓고 크다. 생경한 외국 이론에서 나온 전문적인 개념들만이 인문학인 것은 아니다. 근현대사는 물론이고 고대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첨예한 논쟁들은 일정한 인문학적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디서 많이 보시는 모습 아닌가. 순수문학이든 장르문학이든 창작물을 읽고 평가하는 안목도 인문학의 영역에 포함된다. 자연과학에서 수식이 기초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듯, 말과 글에 대한 엄밀성 역시 매우 중요한 인문학적 소양이고 인문학적 교양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문학을 상아탑 안에 봉쇄함으로써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삼으려는 움직임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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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가 하는 일은 전공 공부다. 그 결과물이 항상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분야든, 학회에 발표되는 논문 목록 한번 보시라. 대체 이런 걸 '발견'하고 '증명'해서 누구에게 도움이 되며 무슨 쓸모가 있나 싶은 생각 절로 드실 것이다. 그래도 그런 걸 해야 하는 게 교수며 학자의 직업이다.
이런 점에서, 문제의 글에 대한 논란이 지성 vs. 반지성 논란이 되는 것은 놀랍다. 작금에 팽배한 반지성주의, 특히 권력에 의해 조장되고 강요되는 반지성주의는 세심하게 주시해야 할 부분이지만, 생경한 외국 이론과 그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반지성이라고 몰아붙이는 상황은 어이가 없다. 기도원에서 하는 방언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게 듣는 사람에게 의미 있는 언어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방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반지성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비록 그 방언이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식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하여도, 내가 그 방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몰상식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른바 문화 비평을 하는 학자가 대중 문화, 예컨대 소녀시대를 분석하는 일은, 원자핵물리학자가 핵반응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원자핵물리학자가 수식을 써 가며 하는 말을 들으며 '자연과학적 지식'이 없는 자신을 탓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원자로 반응이 아니라 소녀시대를 주제로 한다고 해도 완전히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중에게 익숙한 소재만을 취하고 있을 뿐, 대중을 상대로 하여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말에 대중이 불편해하고 더 나아가 자학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제가 '대중 문화'이니만치, 더구나 대중이 읽는 공간에서라면(이 '공간'의 규정성은 또다른 흥미로운 문제다),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 써 준다면 고마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전문가가 그렇게 해 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러한 데 관심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바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예컨대 정혜신을 좋아하는 것은 그런 데 관심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예컨대 철학자 김영민을 존경하는 것은 그런 관심을 현실화할 수 있는 소통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어에 배타성을 부여하여 권력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미국 잡지 <포린 폴리시>는 2009년 말 특집호에서 전세계의 탁월한 'thinker' 100명을 뽑은 적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토머스 프리드먼은 21번째로 꼽혔다. 그가 뽑힌 이유를 <포린 폴리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복잡한 사상을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그의 천부적 재능 때문에. 이것은 능력이다.
많은 전문가가 대중을 상대로 하여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이것을 학문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여기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그들은 말과 글과 소통을 고민한다. 그들이 이런 의도로 쓴 글이 대중에게 불친절하다면, 그런 의도에서는 빵점이고, 이를테면 그의 글을 싣는 매체는 그 필자를 해촉, 다시 말해 짤라버릴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어떤 전문가가 그런 의도를 갖지 않은 채 글을 쓴다면, 그가 굳이 친절한 글을 써야 할 의무는 없으며, 대중 독자가 친절한 글을 쓰지 않았다고 그를 비난할 필요도 없다. 다만 대중의 시야에서 볼 때, 혹은 공공지식인의 범주에서 볼 때 배제되고 도태될 뿐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상아탑 안에서만 살기로 한 사람에게, 그리고 오로지 그런 사람에게만 축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전문가의 방언과 대중의 자학'이라는 두루뭉술한 제목을 달았지만, 만일 이 글에 영문 제목을 붙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Don't bother with their narcissism.
덧글
도르래 2010/02/12 23:34 # 답글
우리가 문자로 자신의 생각을 푸는 이유도 저는 결국 '소통'을 위해서라고 봅니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 뛰어나다고 해도, 남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의미는 퇴색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오리지날U 2010/02/12 23:55 #
글을 싣는 공간, 다시 말해 그의 블로그는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위한 '실험모델'이라고요.
아, 하나 더.
소통은 사기랍디다ㅋ 애초에 소통을 하기 위해 적은 글도 아니었다나 뭐라나..
도르래 2010/02/13 00:06 #
'소통이 사기다'란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잘못된 말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개념,관념들을 남한테 완벽히 이해시킨다(A)'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소통'의 의미가 A의 의미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보단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이택광님의 글이 기초적인 문법조차 맞지 않는 글이라면, 언어가 갖는 기본적인 의사소통 기능마저 못하는 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택광님이 설마 그런 류의 소통마저 사기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시지는 않았을 거라 봅니다만..
deulpul 2010/02/13 04:17 #
그런데 사실 남의 일기장 보면서 시시비비를 한다는 게 좀 웃기는 일이기는 합니다. 저 작자가 이런 인간이었군! 하고 알 수는 있어도, 감놔라 배놔라 하기는 좀 어려운 구조가 되는 것이죠. 이건 블로그라는 공간의 성격과 관련한 문제를 낳는데, 위 본문에서 "이 공간의 규정성은 또다른 흥미로운 문제"라고 한 게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저는 블로그를 (순수한 의미의) 일기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도르래 2010/02/13 04:32 #
사바욘의_단_울휀스 2010/02/13 00:01 # 답글
deulpul 2010/02/13 04:28 #
백범 2010/02/13 00:07 # 답글
설령 악의나 편견이 없다라고 하더라도 기자나 전문가가 신이 아닌 이상에는, 실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번쯤은 이건 아닐수도 있다 라는 생각, 비판적인 생각을 한번 정도는 해볼만도 할텐데...
deulpul 2010/02/13 04:33 #
2010/02/13 00:39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deulpul 2010/02/13 05:04 #
몽몽이 2010/02/13 01:04 # 답글
deulpul 2010/02/13 05:14 #
낯선이름 2010/02/13 02:04 # 답글
deulpul 2010/02/13 03:20 #
낯선이름 2010/02/13 05:24 #
성공했군 2010/02/13 02:20 # 삭제 답글
이들을 소환했으니 글은 성공적이군요
도르래 2010/02/13 04:32 #
백범 2010/02/13 04:40 #
deulpul 2010/02/13 05:16 #
언럭키즈 2010/02/13 03:47 # 답글
deulpul 2010/02/13 05:17 #
와우 2010/02/13 03:51 # 삭제 답글
백범 2010/02/13 04:40 #
deulpul 2010/02/13 05:16 #
유치찬란 2010/02/13 13:03 # 답글
다만 진짜 [퇴고없이, 거기다 생각없이] 바로 논리를 전개해 논리적 단락이 심각하게 생겨났고, 일반 대중이 보기에 함축적이라고 생각되는(실제로 그렇기도 한) 문장, 혹은 단어의 사용으로 인해 좀 글 자체가 가진 의도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채 산으로 갔지요-_-;
원래 쉽게 글을 쓸 수 있다면 좋은것이지만, 그 커뮤니티 내에서만이, 혹은 특수한 교육을 받은, 혹은 같은 공유할 수 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있음을 알고 생각한다면, 사실 개인적 자학 자체가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면에 진짜 공감은 해요.ㅋㅋㅋㅋ
deulpul 2010/02/15 13:55 #
파파라치 2010/02/13 13:09 # 답글
deulpul 2010/02/15 13:57 #
wakeup 2010/02/13 13:30 # 답글
대책없는 로봇빠들이 있으니 매너리즘에 젖어 글의 질이 나아지질 않아요.
deulpul 2010/02/15 14:03 #
호반새 2010/02/13 21:46 # 답글
deulpul 2010/02/15 14:09 #
지나가다 2010/02/14 00:46 # 삭제 답글
어쩌다 이 블로그에서 저 셋이......
글 쓰신 블로거분에 유감은 없고 글 내용에도 동의합니다만 리플들이 좀 안타까워서..
deulpul 2010/02/15 14:18 #
액시움 2010/02/14 01:45 # 답글
deulpul 2010/02/15 1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