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화책

아름다운 공주가 멋진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잘 사는 이야기 - 동화.

어린이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동화가 예상 외로 부작용도 크다는 주장이 나왔다. 최근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동화들은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사람은 다 착하고 선하며, 잘생기지 못한 사람은 악마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동화에서 등장하는 공주나 여주인공은 눈부신 드레스나 빨간 구두가 잘 어울릴만큼 날씬하고 아름다우며, 백마를 타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왕자들도 훤칠하고 잘 생긴 넘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론 혈족 보존을 위해 근친결혼이 일반화된 세계 각국의 왕가에서 온갖 희한한 별종들이 다 태어났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왜 왕자는 모두 멋있어야 하고 공주는 모두 이뻐야 하느냐 말이다.

이런 잘 생긴 선남선녀들은 못 생기고 사악한 마녀나 악마의 주문에 걸려 고생하다가 이에 맞서 싸우고 마침내 모든 영광과 부와 권위와 행복을 독차지하게 된다. 물론 이들이 대체 어떤 수단을 통해 먹고사는지는 알 수 없다.

잠깐 현실을 보자.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잘 생긴 사람은 현실에서 큰 덕을 본다. 능력과 상관 없이 말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 더 그렇다. 왜 이런 일이 당연하게 벌어지고, 누구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위의 동화 연구자들은 어릴 때부터 아무런 비판적 장치 없이 자연스럽게 동화들을 읽고 그 메세지를 받아들여온 것이 그 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동화를 통해 여자 어린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세지를 암묵적으로 각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 대상이 된 동화는 전세계 수천만 명의 어린이가 매일 읽고 있는, 그림 형제 (Jacob and Wilhelm Grimm) 가 지은 동화 168편이다 (그렇게나 많았나?). 이 동화들은 1800년대에 중부 유럽에서, 어린이이들에게 소년과 소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선과 악은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 실제 교육에 활용되었다고 한다.

연구 대상 동화 168편 중에서 43%는 현재까지 인기가 높아 각종 동화책이나 영화로 어린이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란다. 가장 인기 있는 다섯 편은 <신데렐라>, <백설공주>,<잠자는 숲속의 미녀>,<빨강 모자> (뭐지?), 그리고 <헨젤과 그레텔>이다.

이들 이야기 대부분이 젊고 아름다운 공주의 이야기로, 어린이들에게 육체적 매력이 여성이 성취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항임을 각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다른 대안적 정보 입수의 경로가 없는 그 나이대의 어린이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17%의 동화들에서 악마 (마녀) 는 추하고 못생긴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다른 동화에서도 못생긴 사람은 대부분 실패하거나 천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단다.

그림 형제의 동화 거의 모두 (94%) 가 외모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언급은 한 편당 평균 13.6회였다고 한다. 한 동화에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말이 114번이나 쓰였다고 한다. 물론 남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말은 이보다 횟수가 훨씬 적다.

이러한 묘사의 가능한 또 한가지 부작용은 여자 어린이들에게 능력으로 인정받기보다 아름다움으로 인정받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쉬운 길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예쁘면 다 면피된다"는 식의 사고, 혹은 직장에서 능력으로 승부하기보다 꽃이 되기를 선택하는 식이다.

덧붙여, 이들 동화는 여성의 역할을 매우 전근대적인 것으로 제한하고 있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 활동이 활발한 현대의 어린이들에게 왜곡된 성 역할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됐다. 요즘처럼 여성들에게 독립적인 존재가 될 것, 외모보다는 능력으로 인정받을 것이 권장되는 시대에 말이다 (especially during a time when women are encouraged to be independent and rely on their brains rather than beauty).

사실 동화나 옛날 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그리 적합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지적은 많이 나왔다. 생각해 보자. 늑대가 엄마를 잡아먹는 장면이나 오누이가 호랑이에게 쫓기는 장면, 그 호랑이가 동아줄에서 수수밭으로 떨어져 죽창같은 수숫대에 갈기갈기 찢기는 장면, 춤이 멈추지 않는 신발을 떨쳐버리기 위해 도끼로 다리를 자르는 장면, 살아있는 토끼의 입에 손을 넣어 간을 꺼내(려)는 장면 같은 것들은 당장 18금의 호러 영화로 옮겨놓아도 하나도 손색이 없는 엽기적인 것들이 아닌가.

그런데 나역시 어릴 때 저런 동화들을 읽고 들으며 자랐는데도 한번도 무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나이에는 저런 끔찍한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부족했던 탓일까.

어쨌든, 그럼 저런 동화들을 어린이들에게 읽히지 말아야 하나. 위의 연구자들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한다. 다만 부모가 옆에서 책의 내용에 대해 어린이들과 꾸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모르고 넘어가면 모를까, 알고보니 또 한 걱정거리가 늘었다.

다행히 많은 현대 동화 작가들이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스토리를 넘어서 어린이들이 살아야 할 세상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동화들은 스테레오타입으로 가득찬 백설공주류의 동화에 대해 좋은 중화 역할을 할 것 같다.

 

덧글

  • deulpul 2004/02/19 13:43 # 답글

    다 쓰고 kinds 를 찾아보니 한겨레신문에 짤막한 기사가 있었네요. 쩝... :[한겨레] 2003-11-29 (국제/외신) 11면 07판 605자
  • Kevin 2004/02/19 14:03 # 답글

    너도 참 꼼꼼하기도 하다. 그래도 요즘 눈에 띄게 떨어진 디즈니류 만화영화들의 인기는 뭔가 다른 점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역시 디즈니가 개입하긴 했지만 가령 Shrek 같은... 재미있게 읽었다. 많이 공감되는 글이었다.
  • graffiti 2004/02/19 14:04 # 삭제 답글

    학교 다닐때, 이런 문제점에 대한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때 동화 다시쓰기를 열심히 강조하고, 이런 책들이 출판되었던 적들도 있지요.
    이런 책들 중에 "누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웠는가"라고 동화다시쓰기는 아니지만, 동화 해석 달리하기 류의 책도 있지요.
    그냥, 오래 전, 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동화를 성토하던 생각이 나는데, 나이들수록 자꾸 동화같은 이야기에 매료되고, 이런 뻔한 드라마들을 즐겨보는 건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살이가 힘겨워서
    꿈꾸고 싶기 때문일까요?

  • 모니카 2004/02/19 17:12 # 답글

    <빨강 모자>는 빨간 두건 아가씨를 말하는 것 같은데요? 어린 소녀가 아픈 할머니의 병문안을 가다가 늑대를 만나는 이야기 말이에요.
  • 善洪最高 2004/02/19 18:12 # 답글

    정말 그렇네요. 동화를 보면 항상 예쁘고 착한 공주가 '선'을 대표하고, 이를 괴롭히는 마녀나 계모가 '악'을 대표하는 것이 거의 비슷하군요. 우리 나라도 그런 것 같아요. 콩쥐는 착하고 예쁜데, 팥쥐와 계모는 못 생긴 것들이 마음보도 고약하잖아요. 우렁각시도 예쁘고... 얼짱 신드롬이 비단 최근에 나타난 현상만은 아니라는 게 사실인듯해요. 착한 마음=예쁜 얼굴=행복한 결말=잘나고 멋진 남자 만나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_- 대부분의 동화에 대입되는 공식이군요.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고정관념이 전해져내려오는 걸 보면, 이건 지구인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어요. 미래라고 해서 이게 바뀔 것 같지도 않고요. -_-
    그리고 저 위에 동화속의 엽기씬 모음이요... 저는 분홍신 이야기가 너무도 끔찍했던 기억이 나요. 벗겨지지 않는 신발 때문에 계속 춤춰야 하니까 발을 잘라버린 이야기요. 일곱살 때였나? 그거 읽고 며칠간 꿈을 꿨다니까요. 그리고 저는 영화나 책 속에서 등장인물이 당하는 육체적고통을 제 몸에 대입해버리는 습관이 있거든요. 그 때도 정말 끔찍했어요. 그래서 <분홍신>은 저에게 결코 아름다운 동화도, 슬픈 동화도 아닌, 끔찍한 동화였어요.
  • deulpul 2004/02/21 11:05 # 답글

    Kevin: 어, 그렇잖아도 저 문제를 발표한 사회학자가 대안적인 동화로 <슈렉>을 들었단다. 난 끝까지 본 기억이 없어서 어떻게 끝나는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데, 흔해빠진 결말이 아니고 어린이들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는 마무리라고 칭찬했더라. 역시... 하하

    graffiti: 늙으면 어린이가 되어 간다는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하핫~ 그렇지요, 어떨 땐 좀 복잡하고 딱딱한 생각은 그만 접고 순진무구하게 살고싶은 때도 있지요. 그런데 그런 순진무구가 누군가에 의해 "기획된" 것이거나 "계산된" 것이거나 하면 좀 불편해지지요. 순진할 땐 순진하더라도 알고나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쑨~ 제생각임.
  • deulpul 2004/02/21 11:06 # 답글

    모니카: 아, 맞아요. 그런 동화 있었죠. 거기서도 아마... 늑대가 할머니를 먼저 잡아먹지 않았던가... 하도 비슷해서 기억이 가물가물... 그러니까, 계모 밑에서 구박받던 신데렐라가 집에 독사과를 들고 찾아온 마녀에게 잘 이야기해서 마법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옷과 호박으로 된 마차를 타고 왕자님의 무도회를 향해 출발했으나 늑대가 중간에 나타나 떡하나 주면 안잡아먹지~ 해서 중요한 것들을 다 넘겨주고 가까스로 과자로 만든 집에 도착했더니 마법이 다 풀려서 영원한 잠에 빠졌다... 개구리 왕자님이 구하러 올 때까지... 개구리 왕자님은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서 신데렐라는 물거품이 되었다... 아 헷갈려~ 하핫~

    善洪最高: 흠.. 그렇죠. 계백장군의 말투도 진실이 밝혀지는 판에, 이제 콩쥐와 우렁각시, 심청이의 외모가 어떠했는지 진실을 밝혀야 할 때... 미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예컨대 몇십년 전 영화나 잡지를 보면 당시 미인들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잖아요? 통실통실하고 복스러운 스타일... 미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꽤 달라지기는 하는 모양이어요. 그러니 우리는 미래나 기대하면서 살아야 할까봐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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