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은 실력이 아니다 말씀言 말씀語 (Words)

"운도 실력입니다."

이번 2010 월드컵과 관련한 기사나 글 곳곳에서 만나는 말이다. 과거에 이런 말을 흔하게 들은 기억이 없는데, 이번에는 유달리 자주 눈에 띈다. 특히 한국이 나이지리아와의 시합을 2 대 2로 비기며 끝내고 16강 진출을 확정지었을 때, 운도 실력이라는 말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찾아보니 이 말은 이 경기뿐 아니라 실력과 운이 모두 작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러 상황, 이를테면 시합, 시험, 경쟁 같은 데서 흔하게 쓰이고 있었다.

운이 실력인가? 아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요 아전인수다.

이 말에 포함된 의미를 분석해 보자.

1. '운도 실력'이라는 말은 실력이 없다, 혹은 실력이 딸린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말이다.
2. 그런데도 결과가 좋으면, 이것은 운이 작용한 것이다.
3. 그러니 운도 실력이다.

1, 2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왜 3이 나오는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모순이 된다. 결국 논리가 빠진 비약이고 딴소리다.

한국 대 나이지리아 경기에서, 나이지리아 선수는 명백한 득점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이것은 한국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명백한 득점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실수, 혹은 실력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편이 그러한 기회를 살리느냐 놓치느냐의 순간에서 한국은 변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운이다. By definition, 이것은 한국 선수의 실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항이다.

다른 예를 보자. 우루과이와의 시합에서는 공이 골대를 맞고 나가는 등 전반적으로 한국에 운이 따르지 않았다(아래 기사 그림). 그럼 운이 안 좋았으니 실력이 없는 것인가? 웬걸, 이 남아공에서의 마지막 경기는 선수들이 정말 잘 뛰어 주어서, 비록 졌어도 그들을 한껏 칭찬해 주고 싶은 경기였다. 박주영의 프리킥은 비록 '운이 따르지 않아서' 골대를 맞고 튕겨 나갔지만, 세워 놓고 찼다 하면 골문을 위협하는 그의 실력은 간담을 서늘케 하는 것이었다. 실력은 좋았지만, 운이 없었다. 운이 없다고 실력이 없는 게 아닌 것이다.



혹은 가령 시험에서 운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어떤 사람이 공부할 시간이 없거나 공부 하기가 싫어서 시험 범위의 3분의 1만 공부했는데, 우연히 거기서 문제가 다 나왔다. 이 사람은 실력이 좋은 것인가, 운이 좋은 것인가. 운이 좋다면 이 운은 이 사람의 실력인가.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자리가 우연히도 맨 뒷쪽 쓰레기통 있는 곳이었다. 시험을 보는데 쓰레기통에서 악취가 솔솔 풍겨와서 제대로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운이 나쁜 것인가, 실력이 나쁜 것인가. 운이 나쁘다면 이 사람의 실력이 나쁘다는 말인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인가에 공을 다 하면 하늘이 감동한다는 말이다. 이를 우리가 이야기하는 주제로 돌려 말하면, 실력을 갖추기 위해 애쓰면 운이 따라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도 실력'이라는 정서에 좀 근접한 것 같지만, 문제는 '지성이면 감천'은 사실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규범적인 말이고 더 나아가 희망사항에 더 가깝다는 점이다. "하늘이 감동할 만큼 열심히 해 보게"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열심히 했으니 반드시 하늘이 감동할 것일세"라고 기약할 수는 없다.

규범으로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사람이 할 일을 다 한 뒤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가 이야기하는 주제로 돌려 말하면, 실력을 갖추도록 최선을 다 하고 운이 따를지 말지는 하늘에 맡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盡하고 나서 기다릴 뿐이지, 반드시 天이 응한다는 보장은 없다. 말하자면 人事의 영역과 天命의 영역, 즉 실력의 영역과 운의 영역을 분명히 나누어 둔 것이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어떤 의도를 배경으로 하여 나왔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 편, 혹은 어떤 편이 열심히 경기했음을 치하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소박한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이 말이, 운이 나빠서 졌을 경우보다는 운이 좋아서 이겼을 경우에 주로 쓰이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기에서 '운도 실력'이라는 레토릭이 나오는 것은 어쨌든 잘 싸워서 16강에 올라간 것을 치하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심정은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 말에 이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가.

운도 실력이라는 비논리적인 말에는 결과 지상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결과가 좋으면 실력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기기만 하면 그것은 실력이다'라는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지금도 믿기 어렵지만 "시험 볼 때 컨닝도 실력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명색 대학원에서 공부를 한다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주장을 떳떳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은 컨닝도 실력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컨닝도 실력'에 비하며 '운도 실력'은 훨씬 소박하고 무해하지만, 결과가 실력을 증거하고 입증한다는 결과 지상주의라는 점에서 같은 뿌리에서 자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운은 운이고 실력은 실력이다. 운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면 모를까, 두 가지를 뒤섞을 수는 없다. 운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우연성의 영역이고, 실력은 나의 행동이 결정하는 인과성의 영역이다. 두 부분은 겹침이 없이 완전히 exclusive한 관계다. 실력이 운인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운도 실력이 아니다.


※ 이미지: Donga.com

 

덧글

  • siva 2010/07/06 12:37 # 삭제 답글

    한 마디로 치환 가능합니다. 이긴 놈이 장땡.(....)
  • siva 2010/07/06 12:37 # 삭제 답글

    이글루스 쑥대밭 되었던데 피해는 없으신지 걱정되더군요.
    혹시 티스토리 초대장 필요하면 드릴까요?(....)
  • deulpul 2010/07/06 12:54 #

    비슷한 말로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하다'는 것도 있죠. 이것도 어디다 끄적거려 둔 적이 있는데...

    피해는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죠? 일단 전체 글 수가 변동이 없고, 비공개글은 원래 거의 없는지라, 해를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티스토리를 간절히 구한 적이 있었는데, 참 구하기 어렵던데요. 지금은 당장 필요하진 않습니다만, 혹시 필요하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이글루스에 대해 충성도가 높은 고객에 속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feed 2010/07/06 13:24 # 삭제 답글

    그러네요. 운은 실력이 아니네요.
    이 글을 읽다 보니, '운도 실력이다.'란 말은 혹시 인간의 자만심에서 나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운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deulpul 2010/07/07 08:05 #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겠네요, 정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하지 않은 일까지 자기 공으로 가로채려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심보라고 생각합니다.
  • 2010/07/06 14:3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0/07/07 08:07 #

    오! 반가운 말씀이지만, 제가 그 귀찮음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하지만 언젠가 꼭 필요할 날이 올 때를 대비해서, 꼭 기억해 두고 있겠습니다.
  • 아인베르츠 2010/07/06 21:35 # 답글

    운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실력을 나타내는 포인트가 아닐까요?
  • deulpul 2010/07/07 08:16 #

    네, 말씀대로 찾아 온 운을 놓치지 않고 잡는 것, 이것은 실력이랄 수가 있겠죠? 이 조합은 크게 봐서 실력의 영역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말 순수한 우연성에서 나오는 운은 행동 주체의 결정이나 행위와 독립적으로 작용하니까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로또의 번호를 통계적으로 오래 연구해서 잘 나오는 매직 넘버를 가지고 복권을 산다고 해도, 매 추첨 때의 확률을 높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랄까요...
  • 미스포츈 2015/09/13 09:41 # 삭제 답글

    운은 실력이 아닌 노력의 결실정도로 생각됩니다.
  • deulpul 2015/09/15 21:47 #

    흥미로운 말씀이지만, 노력을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이 벌어질 때가 있고, 운이란 주로 그런 뜻으로도 쓰인다는 점이 좀 걸립니다.
  • ㅋㅋ 2017/08/11 01:44 # 삭제 답글

    솔직히 다들 알면서 그러는거죠. 말씀대로 과장일뿐 ㅋㅋ
  • deulpul 2017/10/08 12:27 #

    아니 근데 그런 인식이 실제로 있고, 더 나아가 그게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서 곰곰 씹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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