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내가 사는 곳에서는 옷을 홀랑 벗고 자전거를 타는 행사가 열렸다. '관심 있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행사인데, 행사 취지는 석유 의존성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시키고 몸의 이미지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히피스러운 성격의 행사인 셈이다. 이런 행사가 논의된 지는 오래 됐지만, 실제로 구현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참석자 중 일부가 몸에 멕시코 만 원유 유출과 BP에 항의하는 구호를 적은 것으로 보아, 이 사태가 행사 실현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행사에는 남녀노소 75~100명(경찰 추산)이 참석하여, 일부는 홀랑 벗고 일부는 최소한만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시내 번화가 13킬로 정도를 누볐다. 이런 행사가 스스럼없이 열린다는 점, 또 이를 지켜 본 시민들이 1) "하고 싶으면 하게 냅둬야죠. 정 싫으면 고개를 돌리고 안 보면 그만이니까요." 2) "우린 시골에서 놀러 왔는데, 우리가 사는 곳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새로운 문화를 이해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데요." 라고 말했다는 점, 경찰이 행사를 막지 않고 원만히 끝나도록 지켜 보았으며, 참석자들이 종착점에 도착한 뒤에야 옷을 입으라고 종용했다는 점, 참석자 대부분이 이런 지시를 따라 옷을 입었다는 점 등은 내가 사는 도시가 가진 매력이자 저력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누가 나보고 저 행사에 참석하자고 권했다면 나는 머리를 흔들었을 것이다. 물론 행사의 취지에 반대해서도, 자전거를 타기 싫어서도 아니다. 아마 저 행사가 목표의 하나로 내세운 'body acceptance'의 공력이 그다지 높지 않아서이겠지.

평화로운 해변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여가를 즐기고 있다. 휴가철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모두 홀딱 벗었다. 누드 비치인가 싶은데, 두 번째 특이한 점은 모두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를 들고 뭔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원하고 화끈하면서도 너드스러운 게, 21세기 스타일의 천국이 있다면 그 분위기가 바로 이렇지 않을까 싶다.
이번 주 <타임>에는 새로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인 Skinbook.ning.com 기사가 실렸다. 2008년에 생겼다고 하지만 아직 별로 활성화하지 않은 서비스 같은데, 한 쪽이나 할애해서 꽤 비중있게 다뤘다.
스킨북은 서비스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Facebook.com과 유사한데, 차이가 있다면 '누드'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회원들의 누드 사진을 규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 권장한다. 가입하려면 반드시 사진을 올려야 하고, 그 중에서도 벗은 사진을 환영한다, 얼굴을 감추거나 신체 일부만 보여주거나 하면 퇴짜다. 또 포르노그래픽한 이미지도 허용되지 않는다. 페이스북과는 달리, 신청하면 자동 가입되는 게 아니라, 수질을 관리하는 운영진이 사진을 비롯한 신청서 내용을 심사한 뒤에 회원 자격을 부여한다고 한다.
영국의 20대 중반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이 서비스는 하루에 200여 건의 회원 가입 신청을 받는데, 심사를 통과하는 비율은 10% 정도라고 한다. <타임> 기사는 이 서비스를 나체주의(nudism)의 한 사회적 현상으로 보고 있다. 위에 옮겨 온 그림은 이 기사에 딸린 일러스트다. 다 벗고 하는 소셜 네트워크라고나 할까.
사실 나는 이 기사의 내용이나 스킨북의 서비스의 내용보다, 위에 옮겨 온 저 그림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림은 '누드를 권장하는 소셜 네트워크'를 직접 이미지화한 것이겠지만, 내게는 SNS 자체를 상징하는 은유로 이해되었다.
혼자 사는 게 편할 때가 있다. 집안에서 옷을 마음대로 입을(혹은 벗을) 수 있음은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도 안 보는데, 아무도 없는데, 뭐 어떠냐. 집에서 코트를 껴 입고 있든 홀랑 다 벗고 있든, 누구에게 해 되고 폐 끼치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 타인에게 무해한 자유도 드물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럿이 함께 사는 곳, 이를테면 흰색 고양이가 왔다갔다 하는 오피스텔 복도에서는 이런 자유를 실천하기가 좀 어렵다. 심지어 자기가 낳았거나 자기를 낳은 가족과 함께라도 이런 자유를 완벽히 누리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든가.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서비스에 정이 잘 안 간다. 안 써 봤으니 좋은 걸 몰라서 그럴 테고, 일단 한번 써 보시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겠지만, 일단 써 볼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둘 다 계정은 있지만 휴면 계정이나 다름없다. 페이스북은 서비스 초기에, 어떤 서비스 내용인지를 들여다 보기 위해 만든 계정이고, 트위터도 이게 뭔가 싶어 열어 본 것이다. 한때 한국 인터넷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싸이월드도 비슷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가끔, 다른 분들은 다 좋다고 하고 즐겁고 편하게 이용하는 이 서비스들을 나는 왜 그렇게 싫어하는가 곰곰 생각할 때가 있다. <타임>의 기사에 나온 저 그림을 보면서, 나는 내 기피증의 의문이 스스로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아직도 익명의 가능성을 믿고 그 건강성을 사랑한다. 실망스러울 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나에게 있어 익명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1) 내 아이덴티티, 2) 내 삶과 생각, 3) 내 관계의 셋이라 할 수 있다. 2)번은 블로그 글이라는 채널을 통해 좀 드러나기도 한다.
이 세 가지는 곧 개인 자신이고, 말하자면 옷을 덮어 가리지 않은 알몸뚱이라 할 만하다. 아이덴티티는 얼굴, 삶이나 생각은 골격과 근육과 살, 관계는 머리털이 짧다든가 가슴에 터럭이 났다든가 엉덩짝에 문신을 했다든가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데 SNS는 이 세 가지가 대부분 드러나도록 되어 있다. 얼굴도, 뼈대와 살집도, 엉덩짝의 문신도 그냥 다 남에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몹시 불편하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홀랑 벗고 돌아다니는 것은 자유의 만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다 보고 있는 데서는 도저히 그럴 마음이 나지 않고 용기도 나지 않는다. 내가 SNS를 불편해 하는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 말은 내 자신을 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을 하고 트위터를 하고 싸이월드를 하시는 분들은 물론 노출광들이 아니다.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사람도 있고,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이것은 취향이고, 우리가 잘 알듯이, 남에게 무해한 취향은 온전히 개인의 자유 영역으로 존중해야 할 일이다. 나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시는 분들의 자유 의사와 취향을 절대 존중한다.
뭘 감추면 사람들은 흔히 뭔가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꺼내놓지 않는 게 항상 뭔가 감출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보여 줄 게 없는 경우 더 그렇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면, 나는 남에게 자신 있게 보여 줄 얼굴도, 근골도, 엉덩짝에 문신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나의 바디 억셉턴스는 점차 나아질지 몰라도, 소셜 네트워크 억셉턴스는 아마 갈수록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 이미지: <타임> 스캔. 본문에 링크된 웹 버전에는 다른 게티 이미지가 올라와 있다.
행사에는 남녀노소 75~100명(경찰 추산)이 참석하여, 일부는 홀랑 벗고 일부는 최소한만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시내 번화가 13킬로 정도를 누볐다. 이런 행사가 스스럼없이 열린다는 점, 또 이를 지켜 본 시민들이 1) "하고 싶으면 하게 냅둬야죠. 정 싫으면 고개를 돌리고 안 보면 그만이니까요." 2) "우린 시골에서 놀러 왔는데, 우리가 사는 곳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새로운 문화를 이해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데요." 라고 말했다는 점, 경찰이 행사를 막지 않고 원만히 끝나도록 지켜 보았으며, 참석자들이 종착점에 도착한 뒤에야 옷을 입으라고 종용했다는 점, 참석자 대부분이 이런 지시를 따라 옷을 입었다는 점 등은 내가 사는 도시가 가진 매력이자 저력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누가 나보고 저 행사에 참석하자고 권했다면 나는 머리를 흔들었을 것이다. 물론 행사의 취지에 반대해서도, 자전거를 타기 싫어서도 아니다. 아마 저 행사가 목표의 하나로 내세운 'body acceptance'의 공력이 그다지 높지 않아서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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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해변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여가를 즐기고 있다. 휴가철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모두 홀딱 벗었다. 누드 비치인가 싶은데, 두 번째 특이한 점은 모두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를 들고 뭔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원하고 화끈하면서도 너드스러운 게, 21세기 스타일의 천국이 있다면 그 분위기가 바로 이렇지 않을까 싶다.
이번 주 <타임>에는 새로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인 Skinbook.ning.com 기사가 실렸다. 2008년에 생겼다고 하지만 아직 별로 활성화하지 않은 서비스 같은데, 한 쪽이나 할애해서 꽤 비중있게 다뤘다.
스킨북은 서비스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Facebook.com과 유사한데, 차이가 있다면 '누드'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회원들의 누드 사진을 규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 권장한다. 가입하려면 반드시 사진을 올려야 하고, 그 중에서도 벗은 사진을 환영한다, 얼굴을 감추거나 신체 일부만 보여주거나 하면 퇴짜다. 또 포르노그래픽한 이미지도 허용되지 않는다. 페이스북과는 달리, 신청하면 자동 가입되는 게 아니라, 수질을 관리하는 운영진이 사진을 비롯한 신청서 내용을 심사한 뒤에 회원 자격을 부여한다고 한다.
영국의 20대 중반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이 서비스는 하루에 200여 건의 회원 가입 신청을 받는데, 심사를 통과하는 비율은 10% 정도라고 한다. <타임> 기사는 이 서비스를 나체주의(nudism)의 한 사회적 현상으로 보고 있다. 위에 옮겨 온 그림은 이 기사에 딸린 일러스트다. 다 벗고 하는 소셜 네트워크라고나 할까.
사실 나는 이 기사의 내용이나 스킨북의 서비스의 내용보다, 위에 옮겨 온 저 그림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림은 '누드를 권장하는 소셜 네트워크'를 직접 이미지화한 것이겠지만, 내게는 SNS 자체를 상징하는 은유로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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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게 편할 때가 있다. 집안에서 옷을 마음대로 입을(혹은 벗을) 수 있음은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도 안 보는데, 아무도 없는데, 뭐 어떠냐. 집에서 코트를 껴 입고 있든 홀랑 다 벗고 있든, 누구에게 해 되고 폐 끼치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 타인에게 무해한 자유도 드물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럿이 함께 사는 곳, 이를테면 흰색 고양이가 왔다갔다 하는 오피스텔 복도에서는 이런 자유를 실천하기가 좀 어렵다. 심지어 자기가 낳았거나 자기를 낳은 가족과 함께라도 이런 자유를 완벽히 누리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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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서비스에 정이 잘 안 간다. 안 써 봤으니 좋은 걸 몰라서 그럴 테고, 일단 한번 써 보시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겠지만, 일단 써 볼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둘 다 계정은 있지만 휴면 계정이나 다름없다. 페이스북은 서비스 초기에, 어떤 서비스 내용인지를 들여다 보기 위해 만든 계정이고, 트위터도 이게 뭔가 싶어 열어 본 것이다. 한때 한국 인터넷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싸이월드도 비슷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가끔, 다른 분들은 다 좋다고 하고 즐겁고 편하게 이용하는 이 서비스들을 나는 왜 그렇게 싫어하는가 곰곰 생각할 때가 있다. <타임>의 기사에 나온 저 그림을 보면서, 나는 내 기피증의 의문이 스스로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아직도 익명의 가능성을 믿고 그 건강성을 사랑한다. 실망스러울 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나에게 있어 익명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1) 내 아이덴티티, 2) 내 삶과 생각, 3) 내 관계의 셋이라 할 수 있다. 2)번은 블로그 글이라는 채널을 통해 좀 드러나기도 한다.
이 세 가지는 곧 개인 자신이고, 말하자면 옷을 덮어 가리지 않은 알몸뚱이라 할 만하다. 아이덴티티는 얼굴, 삶이나 생각은 골격과 근육과 살, 관계는 머리털이 짧다든가 가슴에 터럭이 났다든가 엉덩짝에 문신을 했다든가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데 SNS는 이 세 가지가 대부분 드러나도록 되어 있다. 얼굴도, 뼈대와 살집도, 엉덩짝의 문신도 그냥 다 남에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몹시 불편하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홀랑 벗고 돌아다니는 것은 자유의 만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다 보고 있는 데서는 도저히 그럴 마음이 나지 않고 용기도 나지 않는다. 내가 SNS를 불편해 하는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 말은 내 자신을 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을 하고 트위터를 하고 싸이월드를 하시는 분들은 물론 노출광들이 아니다.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사람도 있고,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이것은 취향이고, 우리가 잘 알듯이, 남에게 무해한 취향은 온전히 개인의 자유 영역으로 존중해야 할 일이다. 나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시는 분들의 자유 의사와 취향을 절대 존중한다.
뭘 감추면 사람들은 흔히 뭔가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꺼내놓지 않는 게 항상 뭔가 감출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보여 줄 게 없는 경우 더 그렇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면, 나는 남에게 자신 있게 보여 줄 얼굴도, 근골도, 엉덩짝에 문신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나의 바디 억셉턴스는 점차 나아질지 몰라도, 소셜 네트워크 억셉턴스는 아마 갈수록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 이미지: <타임> 스캔. 본문에 링크된 웹 버전에는 다른 게티 이미지가 올라와 있다.
덧글
kirrie 2010/07/16 09:25 # 삭제 답글
'어차피 이 마을에서 프라이버시를 지키기란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나는 다 벗기로 했어. 내 모든걸 보여주는거야. (지켜야 할 프라이버시가 없으니 역설적으로 나는 내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거야.)'
괄호 안의 내용은 제가 그냥 첨언한 것입니다만.
개인 정보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하다면, 오히려 개인 정보를 과도하게 발설함으로써 각각의 정보들의 가치 밀도를 낮추는 것도 전략적인 선택, 그러니까 말씀하신 누디즘의 욕망을 이런 식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음, 말이 되는 이야긴지 모르겠네요. ㅎㅎ;
deulpul 2010/07/16 14:51 #
siva 2010/07/16 12:28 # 삭제 답글
deulpul 2010/07/16 14:52 #
2010/07/17 00:0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deulpul 2010/07/18 00:47 #
ambergate 2010/07/18 11:34 # 삭제 답글
SNS에 점점 끼어들면서 노출과 감춤의 수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점점 늘어가는 처지라.
스킨북에 대한 기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SNS에 대한 생각만 잔뜩 했습니다.
deulpul 2010/07/19 12:24 #
deca 2010/07/20 05:39 # 삭제 답글
deulpul 2010/07/23 14: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