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의 백색 테러 때時 일事 (Issues)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88년 8월 어느 날 아침, 당시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은 아침 출근길에 집 앞 큰길에서 괴한 세 명에게 둘러싸였다. 오홍근이 집에서 나온 뒤 그를 계속 따라오던 이들은 택시를 잡으러 나서는 그를 불러 세웠다. 이들은 "대공에서 나왔는데, 같이 가야겠다"라고 했다. 오부장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며 뿌리치고 나가려 하자, 한 괴한이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했고, 오홍근은 정신을 잃었다.

그가 깨어난 것은 병원이었다. 깨어난 뒤 그는 자신의 왼쪽 다리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음을 깨달았다. 의사는 오홍근의 왼쪽 허벅지가 칼에 찔려 깊이 3cm, 길이 30cm의 상처가 나서 35바늘을 꿰맸다고 말했다.



오홍근 부장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이유는 쉽게 짐작이 되었다. 한국기자협회에 실려 있는 기록을 보자.

그날 악몽의 전조는 진작부터 보였다. ‘월간중앙’에 ‘오홍근이 본 사회’라는 칼럼을 게재한 그해 4월말부터 “그렇게밖에 못 쓰겠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 나라를 지킨 게 누군데…” 등의 협박전화가 회사와 집으로 여러 차례 걸려왔다. 특히 8월호에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란 글을 쓴 뒤 회사로 항의편지가 오고 테러 1주일 전부터는 그의 주소와 신원을 확인하는 전화가 집으로 걸려오기도 했다.

애초에 경찰은 기사 내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폭행이라고 보았지만, 수사 과정에서 군부대가 직접 관여한 것이 드러났다. 수상한 차량이 주차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아파트 경비원이 기록해 둔 차량 번호가 육군 정보사령부 소속으로 밝혀진 것이다. 물론 군 당국은 테러에 개입한 사실을 부인했다. 문제의 번호판을 단 차는 외양이 이미 달라진 상태였다.

경비원 등 목격자들의 용감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지지부진하여 자칫 미궁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사건 발생 17일 뒤에 한 '익명의 제보자'가 중앙일보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육군 모 부대 소속인 범인들의 인적 사항을 알려주었다. 이 제보 내용은 국방부에 전달되었고, 육군범죄수사단은 관계자들을 연행해 추궁한 끝에 범행 사실을 자백 받았다.

이들은 왜 오홍근 부장을 주먹으로 때리고 칼로 찔렀을까. 기자협회 사이트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보자.

수사단은 이들의 범행동기에 대해 “오홍근 부장이 복간된 월간중앙 4월호부터 연재해 온 ‘오홍근이 본 사회’ 칼럼이 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두드러져 불만을 품어오다 특히 8월호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란 칼럼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가 군사문화의 병폐에서 기인했다’고 지적한 데 흥분, 부대원들끼리 ‘한번 혼을 내주자’며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들은 사전에 5차례에 걸쳐 현장답사를 하고 오홍근의 가족사항과 아파트 평면도까지 연구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수사 결과, '부대원끼리 한번 혼을 내주자며 저지른 범행' 이상이었음이 드러났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육군정보사령부 예하부대장 이규홍 준장은 오홍근의 월간중앙 8월호 칼럼에 분개해 7월22일 부하 박철수 소령에게 ‘오 부장을 혼내주라’고 지시했고, 박 소령은 부하인 안선호 대위, 남정성 김웅집 이우일 하사 등 4명의 행동대원을 동원해 사전 답사를 거쳐 구체적인 범행계획을 수립했다.

박 소령은 8월2일 이 준장에게 범행계획을 보고한 뒤 4일 하사 3명에게 소속부대에서 사용하는 길이 25㎝의 칼을 나누어 주고 ‘죽이지는 말고 혼만 내라’고 지시했다. 범행 당일인 8월6일 안 대위는 하사 3명과 함께 오전 6시쯤 서울1라 3406호 포니2 승용차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고, 박 소령은 오전 7시쯤 서울1거 6873호 포니엑셀 승용차를 타고 현장에 합류해 오 부장을 테러했다. 이 준장은 범행 이틀 후인 8월8일 사령부 참모장 권기대 준장에게 관련 사실을 통보했고, 권 준장은 목격자들이 진술한 ‘서울1라 3406호 포니2’ 운행일지를 변조하도록 지시하는 등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육군정보사령관 이진백 소장은 범행 발생 5일 후인 11일 이 준장과 권 준장으로부터 사건 전모를 보고받고도 묵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오홍근 사회부장 공격 사건은, 언론인의 기사 내용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군 관계자가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한 개인에 대해 저지른 테러였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를 여기서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범인들은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받지 않았다.

그해 9월29일 열린 첫 공판에서 이 준장과 박 소령에게 각각 징역 3년, 안 대위에게 징역 2년이 구형됐다. 그러나 그해 10월10일 육군보통군사법원 심판부는 이 준장과 박 소령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안 대위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죄질로 봐서는 엄중 처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범행 동기가 개인에 사리사욕이나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군을 아끼는 충정에서 비롯됐고 피해자의 피해 정도가 가볍기 때문에 이를 참작해 집행유예와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다”고 밝혔다.

가해자를 옹호하는 듯한 판결이 나오자 당시 언론계를 비롯한 각계에서 비판 여론이 빗발쳤다. 중앙일보 노조는 성명에서 “군의 명예가 실추될 것조차 판단하지 못한 일부 군인의 범죄행위를 두둔하는 것은 제2, 제3의 반역사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계획적인 의도”라고 했고, 민주변호사회는 “군법회의가 피해 정도를 경미하다고 판단하는가하면 언론에 대한 군의 제재 필요성과 범행 관련자들의 범행동기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뜻까지 표시하고 있는 것은 언론에 대한 제2의 테러행위”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 판결마저 가벼웠던지 고등군사법원은 그해 12월28일에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이 준장과 박 소령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고, 안 대위에 대한 검찰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리고 이 판결은 1989년 1월12일자로 확정됐다.

"겁도 없이, 왜 그딴 글을 올리는거야" 귀갓길 괴한 3명이 다짜고짜 주먹질

이 기사를 보니 벌써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22년 전 테러 생각이 난다. 범행 주체나 객체의 성격이 모두 다르지만, 입에 재갈을 채우기 위해 테러를 가했다는 점은 똑같다. 우리 사회는 그 동안 많은 희생을 치르며 힘겹게 민주화의 영역으로 진입해 왔다. 그러나 반민주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 기관이 먼저 나서서 멀쩡한 민간인을 마음대로 사찰하고, 인터넷 서비스 회사들을 통해 개인의 신상 정보를 얼마든지 입수할 수 있는 지금 세상은 '백색 테러 권하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오홍근 테러 사건은 비록 그 전모가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고 처벌도 기막히게 끝나고 말았지만, 어쨌든 범인과 그 배후를 대충 밝혀 낼 수 있었다.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시절에도 이 정도의 상궤는 유지되었다.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양식이 개인과 사회 모두에서 유지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보다 더 개명되었다고 해야 할 지금은 오히려 그런 기대를 할 수가 없다. 은폐와 강변, 짬짜미와 후안무치가 국가의 기풍이 되어 버린 지금은,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잘못이 벌어져도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기를 기대하기조차 힘들다. 원칙과 양심은 잠식되고, 그러한 잠식에 기대어 권력 기관이나 힘 가진 자의 편법과 탈법은 독버섯처럼 발호한다. 이것은 지나치게 비관적인 생각인가. 이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그 답을 알려줄 것이다.


※ 이미지: 한국기자협회 (본문에 링크)

 

덧글

  • 가람온 2010/07/23 14:46 # 답글

    대한민국은 검열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까요.
  • deulpul 2010/07/24 08:10 #

    자유를 지나서, '검열의 의무'로까지 여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 2010/07/23 15:45 # 삭제 답글

    1988년은 군사독재 시절이 아니었지요.
    87년 항쟁이 있고 나서야 저런 칼럼이나마 쓸 수 있었으니...
  • 백범 2010/07/23 16:05 #

    노태우가 군출신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선거로 뽑힌 대통령은 맞습니다. 군사독재는 사실 박정희, 전두환 26년인데 어떻게 선거를 통해 뽑힌 노태우까지 군사독재로 몰고갈수 있는지...

    거기다가 김영삼까지 끼워넣는 초개념을 갖춘 부류들도 있더군요. ㅋ
  • asdfzxcvre 2010/07/23 17:02 # 삭제

    하나회 박살의 김영삼을 넣는건 오버. 영삼이가 IMF삽질말고는 괜찮은것도 많이 했는데....

    노태우는 조금 애매? 군부, 그리고 이전 정권의 적자로써 군부독재의 득을 많이 본 인간이긴 한데 어찌되었건 선거로 뽑히기는 했으니.

    근데 이건 본 내용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고.

    암튼 발전하기는 커녕 퇴보하는건 진보고 보수고 용납못할일. 일반 사회인 개개인이 법을 안지키는 것은 그 개개인이 범법자인것 뿐이지만, 국가기관이 위법과 무법을 우습게 행한다는건 진짜 심각한 문제인데.
  • ㄷㄷ 2010/07/23 17:37 # 삭제

    87혁명이 한국 정치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분리되는건 아니지요. 또 당시는 민주화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다시 권위주의로 퇴보할 가능성도 많은 상황이었구요.
  • rumic71 2010/07/23 19:46 #

    노태우는 분명히 양김씨의 삽질을 업고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죠. 그러나 전두환과 나란히 쿠데타의 주연배우임에도 틀림이 없습니다.
  • 호모싸이코스 2010/07/23 21:17 #

    @백범

    엄연히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라서 군부세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인민민주주의"가 실현되는 people's democracy 국가네요.ㅋ
  • 피타고라스 2010/07/23 23:47 # 삭제

    6공을 북한과 비교하는 저런 무개념은 어디서 나온걸까??
  • 호모싸이코스 2010/07/24 00:05 #

    @피타고라스

    형식적 민주주의도 민주주의라며?
  • 사이먼 2010/07/24 08:56 # 삭제

    @배뽕인지 니뽕인지

    그 직선제 하늘에서 떨어진거냐?
    아 진짜 이자식 무식 옮아 ..
  • 백범 2010/07/24 11:26 #

    사이먼 저 종북빠는 언제부터 민주주의를 좋아한다고 민주주의 타령이냐? 종북주의자 주제에...
  • 천지화랑 2010/07/24 12:22 #

    김영삼이 하나회 박살내기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6공 내내 재쿠데타의 위협 속에서 불안한 민주주의를 영위해야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 참 많지요 -_-;;
  • 2010/07/23 17:0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0/07/24 08:24 #

    네, 사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발생부터 뒷처리까지 기막힌 구석이 한둘이 아니지요. 이제 그런 꼴 좀 안 보며 살까 했는데, 너무 큰 기대였나요. 마지막에 하신 말씀은 큰 일 아니었기를 바랍니다. 이 넘의 넷세상이란 게 어떨 땐 참 어이없습니다.
  • 안디슨 2010/07/23 19:08 # 답글

    87혁명 이후에 칼자르듯이 딱 바뀐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전두환의 오른손이 노태우였고 그 군부 권력을 형식적 민주주의로 포장해서 내놓은 기획 상품일 뿐이죠.

    알지못하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 미루 2010/07/23 21:55 # 답글

    최근 기사가 아니였군요. ...요즘이랑 비슷한 일이 옛날에도 있었네요
  • 알렉세이 2010/07/23 22:34 # 답글

    하지만 이 판결마저 가벼웠던지 -> '무거웠던지' 가 문맥상 맞아보입니다.
  • deulpul 2010/07/24 08:26 #

    동의합니다. 급하게 옮겨 오면서 무심코 넘어갔는데, 글눈이 아주 날카로우시군요!
  • -_- 2010/07/23 22:56 # 삭제 답글

    4대강 관련된 건설조폭들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 바보이반 2010/07/24 10:08 # 답글

    Udis가 저런 걸 따라하겠다고 맨날 써제끼니..
  • 들꽃향기 2010/07/24 19:57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 2010/07/24 20: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LaJune 2010/07/24 23:21 # 답글

    지금도 지 비위에 조금만 안 맞으면 '삼청교육대'를 부활시켜야한다느니 하는 인간도 있지요. /두숨....
  • 아싸가오리 2010/07/25 09:46 # 답글

    진짜 나라가 어찌 될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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