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난성에는 후난 치킨이 없다 미국美 나라國 (USA)

집에 오는 길. 버스 탈 때부터 날이 심상치 않았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폭우가 쏟아졌다. 다행히 작은 우산을 하나 가져왔다. 얼른 펼쳐 썼다. 길을 건너려고 섰는데, 같은 버스에서 내 뒤에 내린 동양인 하나가 비를 줄줄 맞고 섰다. 일단 길을 건너고 보니 내가 가는 방향으로 온다. 조금 앞서 가다가 뒤를 돌아 보았다.

"이거 같이 쓸래? 작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거다."

동양인은 잠깐 망설이다가 고맙다며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이런 비 속에서는 얼굴만 가릴 수 있어도 다행일 것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산다고 한다. 잘 됐다. 물어보니 중국인이다. 중국인과 한국인은 물을 철벅이며 걸으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 어디서 왔냐"
"여기 오기 전에는 베이징에 있었고, 원래 고향은 후난이란 데다."
"오, 후난!"
"너 거기 아냐?"
"물론이지."

후난성. 내게는 호남성(湖南省)으로 더 익숙한 이 곳을 가 본 적은 없지만, 동정호 남쪽에 있는 성이고 양쯔강의 남쪽이기도 하며 삼국지연의의 주요 무대이기도 한 탓으로 아주 익숙한 곳이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참 멀리서 왔구나. 하지만 내가 여기 살면서 이 중국 지명이 낯설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중국 식당의 '후난 치킨' 때문이다. 미국식 중국집에서 내가 즐겨 먹는 메뉴다.

"후난 치킨이 중국 음식 중에서 내 훼이버릿이다."
"아... 근데 후난 치킨은 후난에 없다."
"뭐? 정말?"
"응. 후난 치킨은 후난성에 없고, 미국에만 있다."

그런 것이었구나. 중국집 짜장면이 중국에 없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중국 식당 메뉴에 잔뜩 나와 있는 온갖 지명은 모두 미국화된 지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난에는 후난 치킨이 없고, 몽골에는 몽골리안 비프가 없고, 쓰촨성에는 쓰촨 포크가 없고. (위키에 묘사된 후난 요리의 특징은 내가 아는 '후난 치킨'과 대개 잘 맞는다. 그러니 그런 특정한 이름이 붙은 요리(이를테면 '湖南鸡')는 없더라도, 후난 방식으로 요리한 음식이라는 점은 인정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삼계탕에 '한국 치킨'이라는 이름을 붙여 파는 격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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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에서 유명하다는 중국 식당엘 가 보면 중국인들이 별로 없다. 언제나 미국인(백인) 손님만 와글와글한다. 그래서, 사실 유명하다는 말은 주류(숫적으로) 백인들 사이에 유명하다는 뜻이 된다.

언젠가 우연히, 중국인들이 가는 중국 식당을 알게 되어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음식 맛에 예민하지 못한 나도 다른 중국 식당과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맛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일단 뭔가 화끈했다. 그저 달달한 미국식 중국 음식과는 달리, 매운 것은 확실하게 맵고 향도 강했다. 같은 동양인이라서 그런지 내 입맛에는 이 쪽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 미국인 입맛을 맞추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되는 것인지, 이 식당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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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베트남에서 오신 노부부가 산다. 이 부부 이야기는 언젠가 따로 해야 한다. 통일되기 전에 남베트남에서 군의관을 하다 공산화한 뒤 고초를 겪고, 프랑스와 독일을 거쳐 미국에 안착한 이 할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은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어쨌든 아주 지성적이고 친절하면서도 또 어린아이 같은 분들이다.

언젠가 이 분들과 함께 베트남 식당에 간 적이 있다. 밥을 먹으러 함께 간 계기는, 무슨 이야기 끝에 내가 잘 가는 월남국수집 이야기가 나와서였다. 여기서 나름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 저녁이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베트남 식당인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구동성으로, 젊은 애들 식으로 표현하자면 "잇 썩스!" 했던 것이다.

아니 그런 대로 먹을 만한데? 먹을 만한게 다 뭐냐. 시원한 국물이며 쫄깃한 면발이며 없어서 못 먹지. 그런데 썩스라네?

할아버지가 "내가 원단을 보여주지" 하시며 데려 간 데가 또 다른 베트남 식당이었다. 내가 알던 식당보다 훨씬 덜 알려진 곳이었으며, 나로서도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여기도 맛의 차이랄까가 분명히 존재했는데, 역시 향이 강하고 국물 맛이 깊었다. 내장, 곱창 따위가 들어간 쌀국수... 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할아버지는 그게 원단이라며 굳이 그걸 시켜 주었다. 하긴 국수뿐만 아니라, 흔한 월남쌈도 맛이 좀 달랐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향 음식을 먹고 싶으면 이 식당엘 오지, 내가 알고 있던 그 유명한 식당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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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지나치게 진부한 표현이 되었지만, 미국을 흔히 멜팅 폿이라고 한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인간을 따라 오는 음식도 그리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 음식들은 미국식으로 현지화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한다. 인간이 그렇듯이. 그게 진화든 퇴화든 말이다.

그래서 미국에 존재하는 온갖 나라의 음식은 모두 Americanize된 음식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미국인, 혹은 다른 민족에게 대중적이 될수록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원래의 특수한 맛을 깎아 내고 되도록 많은 사람의 혀에 어필하는 공통 분모가 되는 맛을 넓혔다고 할까.

그런데 원래 있던 게 바뀌는 것은 그렇다치고, 후난에도 없는 후난 치킨은 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나도 모르고, 후난에서 온 중국인도 모른다. 어쩌면 음식에 고착된 지명은 지명으로서의 의미를 잃고 그저 음식 이름으로서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제너럴 초 치킨'을 먹으며, 초장군이 누구였을까 생각하는 일은 드무니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닭요리도 중국, 대만, 심지어 뉴욕 세 곳에서 각기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을 한다고 하고, Tso(혹은 Tsou)를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통일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인도 각기 다르게 발음한다나. 만일 '이순신장군탕'이라는 음식이 있어서, 탕보다 이순신장군 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면 이름을 잘못 발음할 리 없다. 음식 이름에 붙은 고유명사의 원래 의미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나야 '또'와 '초' 중간쯤으로 발음하면 같은 동양권이어서 그런지 다 잘 알아듣는다. 어디서 보니, 음식 주문을 받는 중국인은 또든 초든 도든 쏘든 상관않고 '제너럴'로만 판단한다는 설득력 있는 설도 있더라.

 

덧글

  • 검투사 2010/09/07 15:56 # 답글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600 관련 글 소개입니다.

  • deulpul 2010/09/07 23:19 #

    링크해 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정말 음식 한 그릇에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담겨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디 실린 글인지, 번역은 누가 하셨는지도 궁금하네요.
  • 소리 2010/09/11 04:22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들풀님과 같은도시에 사는 블로그 애독자 입니다.

    혹시 가보신 중국집과 베트남 식당이 어디인지 알려주실수 있을까요? 저도 이 도시 사람들이 많이 가는 중국집과 베트남 식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미료 맛이 너무 강하고, 재료들의 풍미가 전혀 안느껴져셔요. 스테잇 스트릿에 얼마전에 문을 연 사천식 중국집은 그나마 괜찮던데...혹시 거기를 말씀하시는것인지... 진짜 베트남 식당을 못 찾아서 참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이도시에 그래도 그런 식당이 있다는 정보에 귀에 쫑긋해졌습니다.
  • deulpul 2010/09/11 23:42 #

    아앗, 놀랐습니다. 제가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은 극히 드문데... 흠... 아, 어쨌든 deulpul@ 지메일로 같은 내용을 복사해 보내주시면 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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