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주장에 침을 뱉으마" 때時 일事 (Issues)

안병직 교수가 현직으로 경제사를 가르칠 때, 한 수업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한창 수업이 진행되는 도중에 한 학생이 벌떡 일어서서 질문을 했다. 하지만 학생의 질문은 궁금한 사항에 대한 문의라기보다 안병직의 주장에 반론을 펴는 것이었고, 비판을 하며 자기 주장까지 개진하려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안병직은 고개를 숙이고 교단을 왔다갔다 하며 학생의 웅변 같은 질문을 묵묵히 듣다가, 갑자기 강의실 앞쪽 출입구로 휙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질문을 받는 사람이 사라졌으니 질문하던 학생은 난처하고 멋적게 됐다. 그렇다고 한창 토하던 열변을 그칠 수도 없어서, 난처한 대로 계속 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 없는 질문이 이어지고 강의실이 약간 술렁이기 시작할 때쯤, 강의식 밖 복도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 왔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퇫!!!!!!"

안병직이 강의실 밖에서 큰 소리로 침을 뱉은 것이다. 조용한 복도에 메아리가 쳤다. "퇫퇫퇘퇘퇘퇘ㅌㅌㅌㅌㅌㅌㅌ---"

이것은 아주 인상적인 에피소드였다. 교수 안병직은 그저 목을 가다듬기 위해 침을 뱉었겠지만, 그 타이밍과 강도(强度) 때문에, 여러 의미에서 매우 상징적인 행동인 것처럼 느껴졌다.


--- ** --- ** ---


지난 9월에 안병직과 조갑제가 반공을 주제로 하여 잠깐 논쟁을 벌였다. 논쟁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동안 진행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발단: 안병직 - 보수는 반공주의, 진보는 종북주의를 버려야 한다
2. 반론: 조갑제 - '보수는 反共을 버려야 한다'는 안병직씨의 주장은 틀렸다!
3. 재반론: 안병직 - 반공자유민주주의, 국가이념으로 적절한가?
4. 재재반론: 조갑제 - 敵과 惡에 맞선 反共은 愛國이고 正義!

여기서 나는 두 사람의 논쟁을 자세히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독일이 통일된 뒤에도 공산당의 불법화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을 보라"(그런갑제) 같은 정신 나간 헛소리들을 모두 평가하자면, 사회과학적 지식보다는 정신과 의사 면허가 필요할 것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안병직의 첫 번째 주장, 보수는 반공주의를, 진보는 종북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부분이다. 그 맥락은 1번과 3번을 읽어 보시면 쉽게 이해가 되시리라고 믿는다.

나는 조갑제와 같은 선동꾼들의 아이디어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 지금은 펄펄 뛰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사라져 갈 영역에 가깝다고 본다. 오히려 고마운 점도 있다. 상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는 반면교사의 최적 모델이자, 진보에게 생명력을 꾸준히 공급하는 발전소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 한 귀퉁이에 구질구질한 양상으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다.

정작 무서운 사람들은 안병직과 같은 사람이다. 혹은 안-조 논쟁에 대해 '조갑제도 틀렸다, '반공'과 '반공주의' 구별해야'라는 말로 참여했던 이재교 변호사 같은 이들이다.

안병직은 이렇게 말한다:

반공주의와 권위주의가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다른 편에서 보면 자유민주주의가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에 의하여 심각하게 제한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국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을 제정·시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은 공산주의 세력이 폭력으로써 국가를 전복하는 행위만 처벌 대상으로 했던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 이론에 관한 학습도 금지했던 것이며, 더 나아가 심지여 온전한 자유민주주의의 실천을 요구하는 야당과 국민의 정치적 활동까지도 탄압하였다. 이러한 금지와 탄압을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대가(代價)라고 한다면 그러한 측면이 있기도 했지만, 금지와 탄압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금지와 탄압이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3)

안병직이 있는 '시대정신'의 상임이사이기도 한 이재교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공산주의(또는 사회주의)에 반대한다. 공산주의는 인민의 낙원을 이루겠다지만 이는 인간의 본성상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는 특권지배층만 배부르고 나머지 인민은 자유도 없이 평등하게 빈곤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체제라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나는 반공에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반공주의에는 반대한다. 조(갑제) 대표의 주장을 보면, 반공과 반공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지만 양자는 전혀 다르다. 반공은 공산주의가 옳지 않다고 반대할 뿐이지만 반공주의는 반공을 이념화하여 공산주의자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와 공존을 거부한다. 척결의 대상일 뿐이다. “공산주의는 惡의 세력이다. 그 惡의 세력이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죽이려고 하는데 거기에 반대하지 말라고 한다면 죽으라는 이야기인가?”라고 묻는 조 대표의 말에서 반공주의를 읽을 수 있다.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되, 공산주의를 주장할 자유는 인정해 주자고. 선거로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겠다는 정당이라면 활동이 보장되어야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에 충실한 것이라고. 단, 공산혁명을 하겠다고 폭력을 사용하거나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지 않는 한.

이것은 말하자면 근대적 민주 국가의 상식적 기초 중 일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민주 국가의 체제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정치 사상의 기저로서 공유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안-조 논쟁은 우리 사회의 '꼴통 보수'가 보수로 진화하는(혹은 꼴보수와 좀더 교과서적인 보수로 분기되는)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행스러운 소식이면서도 동시에 걱정되는 소식이다. 극우에서 우익으로, 꼴보수에서 원론적인 보수로 변모하며 상식의 틀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폭력 혁명이 아니라 국민의 표와 지지를 놓고 겨뤄야 하는 현대 민주 체제의 진보 진영에게는 더욱 힘겨운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 상식적 보수주의자들은 꼴통 보수보다 몇 배나 무섭다.

지난 6월 사노련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던 김세균의 증언이 화제가 됐었다. 검찰의 순진무구하면서도 집요한 학구열 때문에 증인 김세균은 많은 이야기를 해야 했지만, 그 출발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와 정치 활동의 자유를 존중하고 누구나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입니다. 인권의 보장이 큰 성취를 이룬 사회는 사상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북한의 최대 약점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회체제든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정치 활동의 자유야 말로 일반민주주의의 원리가 실현된 사회입니다. 동시에 이런 일반민주주의의 원리를 가지고 자유주의가 사회통합을 해온 과거가 있습니다.

(중략)

우리 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냐 아니냐의 판별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냐가 관건이고, 종국으로는 사회주의 정치 활동 보장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헌법의 기본 정신은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에 있습니다. 이제 외부의 적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의 국보법이 필요 없는 시기에 국보법을 잣대로 국민의 일부를 내부의 적으로 규정해 탄압하는 것은 헌법 제1조를 위배하는 조치입니다. 만약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자본에 있고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면 사회주의는 내부의 적이 맞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국민이 그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모든 운동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민주공화국에서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것이어서 중학교 사회 시간쯤에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불행은 이런 상식이 중학교 학생의 입에서가 아니라, 법정에서 검찰의 반대측 증인으로 선 정치학 교수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이야기가 보수 진영에서 나오고 있으니,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국민 한 사람으로서는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현실적으로 진보 진영의 입지를 고려하면 우려스러운 것이다. 꼴통 보수들은 이것을 놓고 "진보의 논리가 보수 진영으로 흘러들어 왔다"라고 강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을 상식으로 보지 않고 견강부회하고 아전인수하기 때문에 '꼴'이라는 접두사, '꼴통'이라는 관형어가 붙는 것이다.

안병직은 한국에서, 더구나 보수 진영에서 '반공을 버려라'라는 주장을 꺼내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점잖은 언어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치열하게 싸울 준비쯤은 이미 해 두고 꺼낸 말일 것이다. 그래서, 느낌표까지 찍어대며 토론이라기보다 선동에 가까운 톤으로 권위주의와 폭압적인 반민주의 역사까지 합리화하는 조갑제의 우악스럽고도 막무가내식인 주장을 들으며, 속으로는 침이라도 카악 뱉고 싶었을지 모른다. 정치적 스탠스에 상관없이, 몰상식과 이야기하기란 이렇게 힘이 든다.

 

덧글

  • 夢影 2010/10/09 16:57 # 답글

    말씀하신 '꼴통 보수'들의 경우 자신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하지만 사실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슬픕니다. 근데 문제는 사회 전반의 사고 방식이 죄다 그렇다는 거.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키려 한다고 말하는 진보..-라고 하고 싶지 않은 일부 사람들도 그 논리에 결국 함몰되어 있다는 게 더 슬픕니다.
  • deulpul 2010/10/12 12:48 #

    그러게 말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독특한 경험에서 나온 것임은 잘 알지만, 그 경험이 이제 무덤에서 썩어 진토가 되었을 정도니까 이제 좀 정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들꽃향기 2010/10/09 20:26 # 답글

    안병직-이영훈 대담집을 보면 그들 스스로가 현대한국의 정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공정한 대결'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한 부분에서, 다행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전율'을 느꼈기에 말씀에 진정으로 공감합니다.

    더욱이 계열(?)로 본다면 안병직 교수 스스로가 진보계열의 주도 이데올로그였던 만큼, 이런 논쟁이 자칫 잘못빠지면 자신의 과거 이력까지 들먹여지면서 보수계열의 폭풍같은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잘 통감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요. ㄷㄷ

    그런 점에서 이제 보수가 언급하신대로 자유민주주의의 '상식적 틀'을 존중해가는 논리로 바뀌어가는 만큼, 진보 스스로도 종전과 같은 '독재타도'식의 프레임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하고, 이런 '무서운 보수'만큼이나 자기 혁신을 해야할텐데...과연 얼마나 가능할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 deulpul 2010/10/12 12:57 #

    그런데 '시대정신' 앞에 꽹과리나 가스통 들고 모였다는 소식은 아직 나오지 않으니 좀 신기합니다. 사실 보수주의자들이 반공을 떨구자고 주장하는 데에는 전술적 고려도 들어 있다고 봅니다만, 어쨌든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진화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동안에도 아주 없던 이야기는 아니었겠습니다만. 진보쪽은 우선 무기력증을 극복하는 일이 우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혁신을 통해 대중과 호흡하면서도 순수성을 잃지 않는 진보, 이것은 참 어려운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 Poly 2010/10/09 22:19 # 답글

    말씀하신 데로, 진보 진영의 입장에서야 우려스러울 만한 일이겠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런지요..
  • deulpul 2010/10/12 13:01 #

    다행이지요. 상식적인 세상에서 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에게는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콩사탕 2010/10/10 02:04 # 삭제 답글

    제가 알기로 이 세상에 공산주의만큼 해로운 건 역사상 반공주의밖에 달리 없습니다.
  • deulpul 2010/10/12 13:04 #

    테제와 안티테제가 모두 최악이라는 결론이 되는군요. 형식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죠.
  • 措大 2010/10/10 09:24 # 답글

    근자에 벌어진 민노당 경향신문 논란과 비견하여 볼때 참 한숨이 나오는 일입니다.
  • deulpul 2010/10/12 13:06 #

    "마음을 편안하게 먹어요. 기왕에 된 거니까. 편안하게."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