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미각, 청각 섞일雜 끓일湯 (Others)

사무실에 있다가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가면 순간적으로 눈이 먼다. 눈을 파고드는 밝은 햇살 때문에 그렇다. 눈이 밝음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세상은 차츰 정상으로 돌아 온다.

명암만 그런 게 아니라 원근도 그렇다. 오전 내내 모니터만 들여다 보며 50cm 거리의 세계에 몰두하다 밖에 나가면, 먼 것들은 실제보다 더 멀어 보이고 작은 것들은 실제보다 더 작아 보인다.

이런 현상도 곧 회복되지만, 시력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둠과 밝음, 모니터와 원경을 반복하면서 내 눈은 조금씩 퇴화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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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노안이 왔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일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한 선배가 찾아와서 "큰일났다. 가까운 게 안 보이기 시작했어" 하고 말하던 일을 잊을 수 없다. 나이가 들면 시력이 떨어져 노안이 된다.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반갑지 않은 일이라도, 누구나 다 그런다면 좀 위안이 된다.

언젠가 마케팅쪽에서 나온 설문 조사를 하는데, 자신이 나이가 들면서 발생하는 여러 신체 증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선택지의 왼쪽 끝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오른쪽 끝은 매우 걱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담긴 뜻은 뻔해 보였다. 자신의 몸이 낡아가는 데 대해 매우 걱정하는 사람일수록 뭔가를 팔기 좋은 사람이다. 나는 왼쪽 끝에서 두 번째 동그라미를 선택해 X 표시를 했다.

나이가 들면 시각뿐 아니라 미각의 감각도 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맛을 잘 모르게 된다고 한다.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된장찌개가 어느 순간부터 평소와는 달리 짜거나 싱겁게 느껴질 경우, 투정을 하기에 앞서 그이가 살아 오신 삶을 잠깐 되돌아 보아야 하는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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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처럼 알면서 퇴화하는 감각도 있지만, 미각처럼 모르는 채 퇴화하는 감각도 있다. 나는 내 시각이나 미각이 퇴화한다 해도 크게 걱정스럽지 않다. 눈은 그 동안 정말 고맙게 잘 썼다. 게다가, 기능이 떨어져도 아쉬운 대로 보완할 수 있다. 미각은 원래 섬세한 맛 같은 데 예민하지도 않으니, 감각이 떨어진다고 해서 특별히 아쉽거나 하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은 무척 슬프다. 여린 막과 작은 뼈들로 이루어진 기계적 시스템을 통해 인식되는 소리는, 기계들이 낡아가면서 분명히 흐려질 것이다. 세밀한 음감에 둔해지는 것은, 모든 재료가 적절히 들어가야 제 맛이 나는 비빔밥에서 참기름이나 고추장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그렇게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좀 우울하고 동시에 조바심이 난다.

나이가 들면 뽕짝이 좋아진다고 한다. 나는 이게 세대 효과(cohort effect, 나이 든 분들은 젊었을 때부터 뽕짝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늙어서도 좋아한다)인지, 연령 효과(어떤 노래를 듣고 자랐든, 나이가 들면 뽕짝을 좋아하게 된다)인지 늘 궁금하다. 한때는 신중현이나 김정호나 한대수나 트윈 폴리오를 들었음직한 택시 운전사가 '아싸 아싸'를 즐겨 듣는 걸 보면, 후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서태지의 팬도 언젠가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힙합의 팬이 나중에 설운도를 좋아하게 될지는 좀 자신이 없다.

생각해 보면, 뽕짝이란 노후한 귀에는 들리지 않는 부분을 제거하고 그런 귀가 들을 수 있는 음역만의 자극을 최대로 활성화한 음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뽕짝이 좋아지는 것은 물리적 현상인지도 모른다. 혹은, 아련하고 가슴 시린 섬세한 사랑의 이야기들을 모두 깎아 내고, 노후하고 굳은살이 박혀 무디어진 정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고 명료한 사랑 이야기들로 채워진 가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뽕짝이 좋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귀가, 마음이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게 될까봐 조바심이 난다.

 

덧글

  • 2010/10/31 01:5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0/10/31 05:26 #

    그러게 말입니다. 늙기는 쉬워도 잘 늙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밤비마마 2010/10/31 03:37 # 답글

    나이가 든다고 다 뽕짝을 좋아하게 되는건 아닌것 같아요. 저보다 나이많은 분들- 저희 부모님은 뽕짝 전혀 안 좋아 하시거든요
  • deulpul 2010/10/31 05:34 #

    물론이죠. 사람에 따라 취향이 다르다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음악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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