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와 건이, 모건과 게이브 섞일雜 끓일湯 (Others)

영문학자 이양하의 수필 중에 '경이와 건이'라는 게 있다. 친구의 두 아들에 대해 쓴 유머러스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수필이다. 수필에 나오는 세살짜리 건이가 고건 전 국무총리라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 집에도 경이, 건이에 필적할 두 놈이 있다. 옆집에 사는 두 녀석이다. 한 녀석은 우리 집 바로 옆에 사는 게이브라는 놈이고 다른 녀석은 오른쪽으로 한 집 건너에 사는 모건이라는 놈인데, 둘 다 초등학교 5학년이고, 둘 다 형제자매 없는 외아들이다. 같은 학년이라도 게이브는 모건보다 한 살이 많다. 9월에 학년을 시작하는 제도 탓이다.

얘들은 심심하면 우리 집을 찾아오고,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이나 방학 때면 아침부터 우리 집에 죽치고 있는 날도 있다. 우리 집에 이들이 자주 놀러오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뒷 베란다가 연결되어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건과 게이브 둘 다 아버지가 없이 싱글맘이 키우는 아이들이고 따라서 엄마가 바쁘다는 것이다.

모건의 엄마는 정원사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 고용되어, 철마다 꽃을 심고 화단이며 정원을 돌보는 일을 한다. 이 아파트뿐만 아니라 주변의 몇몇 아파트 일도 함께 한다. 이 분은 정말 바쁘다. 특히 하늘과 땅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초봄이 되면 거의 언제나 이 분을 볼 수 있다. 일 하시는 양을 보면 절로 개미가 생각난다. 그렇게 열심히 산다. 집에도 식구가 많다. 고양이 두 마리, 개 한 마리, 기니아 피그 두 마리, 어항에 물고기 몇 마리, 거북이 한 마리가 모두 이 집 식구다. 집 안에 거두어 키울 수 있는 동물치고 없는 것은 어른 남자밖에 없다.

게이브의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다. 이 분은 게으르다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만사를 좀 귀찮아 하는 스타일이다. 돈을 좀 더 버는 것보다 몸이 편한 것을 택한다. 연애도 귀찮아서 안 한다고 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생활을 고려하면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사고는 열려 있어서, 게이브의 아빠는 프랑스인이었고, 옛날에는 남미 출신 남자에게 시민권을 받도록 해 주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야기"라고 한다. 돈 버는 것을 귀찮아 하는 표는 겉으로 쉽게 드러난다. 이 집 차는 우리 아파트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낡은 차 중에 하나다.

엄마들이 성격이 달라서인지, 모건과 게이브도 성격이 판이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 점은 이양하의 수필에 등장하는 경이, 건이 형제의 성격과 거의 비슷한 구조다.

게이브는 한 살이 더 많아서 그런지 모든 면에서 계산이 빠르다. 내 눈치도 좀 볼 줄 알고, 나를 이용할 줄도 안다. 이 놈이 내게 자주 가져오는 문제는 자기 집 컴퓨터다. 인터넷을 하면서 별별 걸 다 까는 통에 컴퓨터가 얼어버리거나, 무선 인터넷처럼 새 주변 기기를 달다가 문제가 생기면 당장 우리 집 문을 쾅쾅 두드린다. 게이브네 집 책상 밑의 먼지 구덩이를 들락달락한 횟수는 게이브나 그의 엄마보다 내가 훨씬 많을 것이다. 게이브는 성격도 활달하고 잘 까불고 논다. 모건이랑 놀 때에도 자기가 늘 왕초 노릇을 한다.


(왕초 게이브)

모건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다. 이 놈은 종종 언제 왔나 싶게 있다가 언제 갔나 싶게 사라진다. 말수도 적다. 게이브를 따라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때도 있지만, 그럴 때에도 게이브가 늘 앞장을 서고 자신은 옆이나 뒤를 따라 다닌다. 모건은 이처럼 활달하지는 않은데, 예술적인 감각은 놀라운 데가 있다.

두 놈이 할로윈 때 의상을 입고 우리 집에 쳐들어 온 적이 있다. 게이브는 흔한 '절규하는 해골' 마스크를 썼지만, 모건은 아래 사진처럼 창의적인 예쁜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


(예술가 모건)

언젠가 우리 집에 아이 손바닥만한 장난감이 굴러 다닌 적이 있다. 작은 흑백 스크린이 있고 각각 상하와 좌우를 통제하는 다이얼이 있어서, 다이얼을 돌려 스크린에 (아마도 철가루로 그려지는) 그림을 그려 보고 흔들어 지우는 장난감이다. 원래 크기도 작고 조악한 데다, 오래 되어 다이얼도 거의 망가지다시피 해서 마음 먹은 대로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운 장난감이었다.

어느 날 모건이 소파 한 구석에 찌그러져서 뭔가를 열심히 주물러대길래 그런갑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장난감에 빠져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 이 놈이 배시시 웃으며 내민 장난감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결과물을 보고 등짝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종류의 장난감을 갖고 놀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것은 거의 초인적인 집중력과 참을성의 결과다. 하도 놀라서 사진까지 찍어 두었다.

이양하가 경이, 건이 중에서 경이를 더 좋아했듯, 나도 둘 중에 정이 더 가는 놈이 있다. 둘이 놀다가 우리 집에서 무언가를 깬 적이 있다. 놀라서 나가서 괜찮다고 하며 치우는데, 두 놈의 반응이 달랐다. 게이브는 뭔가 군시렁대더니 스윽 하고 자기 집으로 사라졌다. 반면에 모건은 얼굴이 빨개진 채, 내가 파편을 다 치우도록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니까, 왕초 게이브는 공리주의자 건이처럼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재빨리 자신의 처신을 결정하는 데 비해, 예술가 모건은 순진하고 여린 성품으로 벌어진 일을 다 받아 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건이 더 좋다.

이 두 놈들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 어떤 유행이 있는지도 이들을 통해서 알게 된다. 하루는 두 놈이 어디서 구했는지 나무 젓가락을 서로에게 휘젓는 수선을 피우며 방에까지 들어 왔는데(틀림없이 우리 집 부엌에서 찾아냈을 것이다), 해리 포터의 새 시리즈가 나왔을 때다. 이렇게 휘젓고 놀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시체 놀이를 할 때도 있다.

어느 날 두 놈이 CD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위어드 알 얀코빅(Weird Al Yankovic)의 노래가 담긴 복사 CD였다. 나는 이런 가수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알고 보니 마이클 잭슨 패러디 'Eat It'을 비롯해, 자신이 직접 만든 곡들도 여럿인 인기 가수였다.

이 얀코빅의 노래가 또래 사이에 대유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에게 CD를 빌려 왔으니 두 장을 카피해 달라는 거다. 들어 보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복사 CD를 또 복사하여 두 장을 만들어서 건네 주었다.

이틀인가 지나서 모건이 CD를 들고 찾아왔다. 엄마가 돌려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음악이 좋으면 CD를 사야 한다고 했다는 거다. 나는 속으로 '아차' 하면서도, 모건네 엄마는 진짜 교과서적으로 사는구나 하고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본인은 그렇지 않더라도 아이에게는 그렇게 가르치고 키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게이브의 엄마는 이를 몰랐는지 알았어도 귀찮아서인지, 그 집에서는 별다는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엄마 옷을 입고 와서 놀던 개구장이 아이들. 아빠 옷은 없었으니 그랬을 게다. 내 방에서 선글라스와 헤드폰을 찾아내서 저러고 놀고 있다.

모건과 게이브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서, 벌써 애 다운 모습이 없어질 지경이다. 옆집 게이브네에서는 가끔 엄마와 아이가 싸우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 (엄마가 아이를 야단치는 게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싸운다'.) 게이브는 목소리도 걸걸하게 바뀌고 있다. 두 놈이 우리 집에 와서 노는 일도 점점 줄었다. 친한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종종 서운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미국에서 정말 고맙게 배운 것 중 하나는 친구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과 손자뻘 되는 사람이 서로를 친구로 부르고, 친구가 되어 산다. 이를테면 영화 <그랜 토리노>의 두 주인공이 그렇다. 나의 지도교수에게 당신은 내 좋은 친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지도교수는 무척 흐믓해 했다. 지도교수는 물론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위치도 다르다. 한국에서 지도교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건방진 자식이라는 딱지가 붙고 학계에서 매장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두 놈들은 나의 좋은 친구였다. 나의 인생에서나 그들의 인생에서나, 삶의 어느 시기에 우연히 시간과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생긴 인연이다. 이들이 이런 인연을 앞으로도 기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한 놈은 계속 씩씩하고 명랑하게, 다른 한 놈은 계속 여리고 감수성 있게 자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덧글

  • 우유차 2011/01/26 08:30 # 답글

    멋진 소년들로 자라 주기를! 기분이 좋아져요- ^^
  • deulpul 2011/01/26 13:56 #

    벌써 청년으로 자라고 있다는...
  • Poly 2011/01/26 10:29 # 답글

    애들 사진이 정말 귀엽네요 ㅎㅎ
  • deulpul 2011/01/26 13:59 #

    징그러워지기 시작하고 있다는...
  • 러움 2011/01/26 15:56 # 답글

    어릴땐 이웃집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다니고 그랬는데 요샌 그런게 없어서 가끔 쌔-할때가 있어요. 우리집에 핵이 떨어져도 앞집은 모르겠지.. 이런 생각요; 물론 뒤집어서 생각해도 같겠죠. 그래서 그런지 이 글을 읽고 있으려니 굉장히 정감있고 따뜻하고 그렇습니다. :)
  • deulpul 2011/01/28 08:46 #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아지고 사람 간의 관계가 온라인으로 대치되면서 그런 현상이 보편적인 게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망해가는 직접적인 이유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따위를 지적하는 학자도 있죠. 사람을 만나면 친해지기보다 경쟁부터 해야 하는 상황도 관련이 있겠고요. 그러나 이런 게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고 보기 때문에, 언젠가는 분명 반성적인 움직임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키코모리가 많아지면 그것도 어렵긴 하네요...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