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방식으로서의 정치 미국美 나라國 (USA)



내가 사는 곳의 한 유서 깊은 거리에 있는 벽화다. 사랑과 평화와 희망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던 1970년대에 이 도시와 거리를 빛내던 예술가와 활동가들을 그림에 담았다.

이 벽화의 오른쪽 부분에는 'Day-Glow Sheriff'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있다(아래 그림). 그는 당시 사회 운동을 하던 미술가였으며 이 지역에서 종업원 소유로 운영되던 식품업체의 노동자이기도 했다. 그의 본명은 Bob Linn이었는데, 그보다는 Day-Glow Sheriff로 더 자주 불렸다. 이런 이름은 그가 70년대의 어느 시기에 Sheriff, 한국으로 치면 경찰서장 선거에 출마를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말하자면 데모꾼이 지역 경찰 총수로 출마를 한 셈이다.




벽화의 설명에서 그를 묘사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Day-Glow Sheriff
공직에 출마하는 것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한 방법이었다. 당선 가능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선거 과정에서 중요한 이슈를 제기할 수 있었다. 지역 예술가인 'Day-Glow Sheriff'가 그 한 예이다. 그는 자신이 경찰서장으로 당선되면 "교도소를 교육 기관으로 바꾸겠다"라고 공약했다.

그는 당선되지는 못했으나, 선거 과정에서 많은 이슈를 제기했으며, 민주 사회에서 공권력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덕분에 그는 영원히 '경찰서장'으로 불리는 영광을 얻었으며, 이렇게 벽화로까지 기록되었다.


--- ** --- ** ---


한국의 80년대 학생 시위에는 흔히 과격하다는 딱지가 붙는다. 돌멩이와 화염병이 날아다녔고 분신 자살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과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편에는 탄압과 검거와 고문 살인과 가공할 위력의 최루탄과 무자비한 경찰력이 있었다. 이것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과격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 학생 시위의 과격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흔히 서구의 시위를 반대 사례로 들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백악관 앞에서 자기 주장이 적힌 피켓을 들고 맴돌이를 하는 시위를 보면, 한국의 학생 시위는 폭력에 길든 불순분자들의 사회 파괴 행동으로 보인다. 선진 미국의 학생 운동은 후진국 한국과는 달리 참으로 평화스럽지 않은가.

웃기지 말라고 해라. 미국에서 학생 운동의 일부는 화염병 정도가 아니라 사제 폭탄을 제조해 정부 건물을 폭파할 정도로 과격하다. 70년대 초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시위 때 벌어진 몇 가지 사건이 그런 양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1970년 8월24일 새벽 3시42분, 미국 위스콘신 대학 캠퍼스의 한 건물에서 강력한 폭탄이 터졌다. 엄청난 폭발력으로 인해 해당 건물은 풍비박산이 났고, 손상을 입은 인근 건물은 26개에 달했다. 폭발에 사용된 포드 밴 자동차의 잔해가 두 블럭 떨어진 8층 건물의 옥상에서 발견되었을 정도였으므로, 얼마나 강력한 폭탄 공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심야에 발생한 이 폭발로 건물 안에 있던 연구원 한 명이 숨졌고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


폭탄 공격으로 파괴된 대학 건물


이 폭탄 공격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 조직의 일부 조직원들이 가한 것이었다. 해당 건물에는 이 학교의 수학과 교수가 지휘하는 미육군 수학연구소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목표는 바로 이 군사 연구소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인명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폭탄이 심야에 터지도록 장치했으나, 마침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을 일으킨 학생들은 1969년 12월에는 비행기로 군수공장을 '폭격'하기도 했다. 이들은 경비행기를 훔친 뒤 이를 타고 인근에 있던 미군 탄약 공장 상공으로 날아갔다. 비행기가 군수공장을 선회하는 동안, 이들은 사제 폭탄을 여러 개 공장 건물로 떨어뜨렸다. 폭탄들은 모두 불발되었다고 한다.

당시 많은 학생이 자기 집에 총기를 은닉해 두고 있었는데, 조만간에 거리에서 경찰과의 총격전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 5월4일에 켄트 대학에서, 그리고 5월15일에 잭슨 주립대학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총을 발포하여 학생들이 여러 명 숨지는 일이 벌어지던 때라, 이러한 생각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작으로 뽑히기도 했던 다큐 영화 <집 안의 전쟁(The War at Home)>에 잘 그려져 있다.


--- ** --- ** ---


베트남 반전 운동 시기의 급진 반정부 조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웨더맨(Weatherman)' 혹은 '웨더 언더그라운드(Weather Underground)'로 불리는 지하 조직일 것이다. 1969년에 학생 운동의 하부 조직으로 시작된 이 조직의 목표는 미국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들은 1970년에 미국 정부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정부 건물과 은행들을 목표로 하여 일련의 폭탄 공격을 가했다. 실제 폭탄을 터뜨리기 직전에 경고를 보내 사람들이 건물을 비우도록 했고, 공격이 미국 정부에 항의하는 것임을 밝히는 성명서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들이 공격한 건물에는 경찰서, 교도소, FBI, 뉴욕 경찰본부, 국방부(펜타곤), 국무부, 미국 국회의사당 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각각의 공격의 규모는 크지 않았어도, 그 목표물의 상징성에서 볼 때 미국 정부를 향한 전방위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1972년에 웨더맨의 공격을 받은 미국 국방부 건물


웨더맨 운동은 1973년부터 미국이 베트남에서 손을 빼기 시작하면서 함께 쇠퇴하였다. 이렇게 과격한 폭탄 공격을 주도했던 조직원들은 큰 처벌을 받지 않았을까.

아니다. 물론 반정부 조직으로서 정부 기관을 대상으로 하여 폭력 공격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이 조직 핵심 인원들은 주요한 수배자가 되었고 수사기관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문제는 수사기관의 수사 방식이 적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FBI가 정부의 지침을 어기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좌익 조직을 수사하던 행태(COINTELPRO)가 폭로된 뒤, 웨더맨 조직원들에 대한 수사는 대부분 중지되었다. 이러한 불법 수사 방식에는 수사관을 신분을 위장하여 조직 내부로 잠입시킨다든가 조직원의 친척이나 친지들의 집을 영장 없이 수색하는 일 등이 포함되었다. CIA가 FBI와 함께 국내 정치 활동을 불법적으로 감시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도 웨더맨 조직의 수사를 중지시키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사법 당국이 수사 과정에서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그 결과로 얻어낸 증거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법의 엄정함이 좌익의 과격 정치 활동에 대한 수사에서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폭탄이나 무기와 관련한 혐의가 없어지자 웨더맨은 더이상 지하 그룹이 될 이유가 없었다. 웨더맨 조직원들은 스스로 수사 당국에 출두하여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현재 60대의 나이가 된 이들은 각자 사회 곳곳에서 건전한 시민으로 자기 활동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예컨대 웨더맨 출신으로 일리노이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초등 교육 개혁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윌리엄 아이어스가 그렇다. 그는 오바마가 시카고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오바마와 잠깐 함께 일하기도 했는데, 2008년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은 이러한 사실을 트집 잡아 '오바마는 테러리스트와 친구다'라는 흑색 선전을 퍼뜨리기도 했다.


--- ** --- ** ---


학교 건물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것과 같은 과격한 학생 운동이 벌어졌던 도시에서 정치를 하는 폴 소글린도 이 시기 학생 운동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캠퍼스에서 벌어진 반전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 운동 지도자 중 하나였다. 그가 관련한 시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다우 케미컬 반대 시위였다. 1967년, 베트남 전쟁에서 쓰이는 네이팜탄과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를 생산하던 이 회사가 직원을 모집하기 위해 대학에 왔을 때, 소글린은 동료 학생을 조직하여 이들의 활동을 저지했다. 그는 경찰에 끌려가 두들겨 맞았으며, 이후 일련의 학생 파업을 주도하는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러한 활동과 당대의 분위기 덕분에 그는 대학생 신분으로 이 도시의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맨 위의 벽화에 나온 "공직에 출마하는 것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한 방법이었다. 당선 가능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선거 과정에서 중요한 이슈를 제기할 수 있었다"의 정신이라 하겠는데, 그는 당선까지 된 셈이다.

소글린은 시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두 번이나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와 재판이 거듭되자 그는 아예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 뒤에도 시의원으로 두 번 더 연거푸 당선되었으며, 1973년에는 이 도시의 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의 나이 28세 때 일이다.

그는 1973년부터 79년까지 3선, 그리고 1989년부터 97년까지 다시 3선으로 시장을 역임했다. 모두 6선을 하며 14년 동안 시장을 지낸 셈이다. 2003년에 다시 시장으로 도전했지만, 현 시장인 데이브 체즐러비치에게 51대 49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패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거에서 전설적인 학생 운동 지도자 소글린은 환경 운동가 출신인 체즐러비치에 비해 보수적인 후보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다음주인 4월5일 벌어질 시장 선거에서 반전 운동가 출신 소글린과 환경 운동가 출신 체즐러비치가 다시 맞붙는다. 강력한 진보적 사회 운동의 기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도시의 시장 선거에서 공화당 따위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데, 공화당 주지사 스캇 워커의 예산 법안 반대 시위에 함께 나온 두 경쟁자의 모습이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 ** --- ** ---


공직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한 방식임에 틀림없다. 설령 당선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1987년, 길게는 수년 동안의 반독재 투쟁, 직접적으로는 6월 민주화 대투쟁의 결과로 탄생한 직선제 공간에 벽력같이 나타난 대통령 후보 백기완의 존재가 그러한 사례일 것이다. 외모부터 좌익스럽고 불순하게 생긴 사람이, 땡전으로 떡칠되던 텔레비전 수상기에 나와 금단의 말들을 구어체로 콸콸 쏟아내는 장면은 많은 사람에게 신선하면서도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선거에 나서는 것은 제도 정치에 들어간다는 말이며, 이것은 운동의 확장으로도, 운동의 변질로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든 분명한 것은 제도 정치 영역은 사회 운동의 폭력성과 과격성을 탈각시켜 왔다는 것이다. 이른바 과격 운동은 사회가 그 운동을 촉발한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더구나 운동의 에너지를 정규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포용력을 갖지 못하면 극단적으로 폭력화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합리적이고 포용력 있는 정치 시스템은 과격한 급진 운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순치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급진적인 사상조차 공식 정치의 영역으로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는 시스템에서 급진주의자들의 무장은 스스로 해제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총을 잡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저력은 이런 포용력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 대학 건물 폭파 이미지: 위키, 국방부 폭파 이미지: 위키.

 

덧글

  • 마하트마 2011/03/29 01:37 # 삭제 답글

    둘중에 누굴 찍어야 할지 고민됩니다.
    "공화당 따위" -- 통쾌한 글 솜씨입니다.
  • deulpul 2011/03/29 17:55 #

    선거란 대개 덜 나쁜 자를 골라야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 경우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죠. 하긴 공화당이나 보수 쪽에서는 둘 다 최악이라서 투표 거부 말고는 수가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 양자가 한 측의 표를 분산시키고 상대편이 어부지리를 얻는 결과가 되기 십상인데,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지역 특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도 되겠네요.
  • 담요 2011/03/29 08:59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deulpul 2011/03/29 17:55 #

    고맙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