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비지 러브, 새비지 가족 섞일雜 끓일湯 (Others)

미국의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독자가 보내 온 고민을 듣고 조언을 해주는 칼럼(advice column)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분야의 얼굴 마담으로서, 수십 년 동안 독자들의 크고작은 일에 대해 상담을 해 준 앤 랜더스(필명)의 'Ask Ann Landers' 같은 칼럼이 대표적일 것이다.

댄 새비지도 그런 어드바이스 칼럼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다른 칼럼니스트들이 대개 폭넓은 인간 관계를 모두 조언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새비지는 조금 독특하다. 그는 성(性) 관련 문제만을 전문으로 다룬다. 성과 관련한 직접적인 문제에서부터 성으로 인해 벌어지는 인간적 갈등까지 모두 상담 대상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성 칼럼니스트들하고도 좀 다르다. 성 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이 동성애자의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게이이기도 하다.

처음에 그의 칼럼 'Savage Love'에서 '우리 남편(my husband)'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여느 사람처럼 헤테로의 고정관념을 갖고 사는 나는 이 칼럼니스트가 당연히 여자인 줄 알았다. 미국의 성 칼럼니스트는 이상하게도 대부분이 여자다. 남자들은 성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인지, 그 분야에서는 원체 무능하고 비전문가라서인지, 여하튼 여성들이 필명을 날리는 영역이다. 한국에서 성 칼럼이 비뇨기과 의사들의 전유물처럼 된 것이나 비슷하다. 그래서 새비지도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남자였다.

그가 20년 전에 성 상담 칼럼을 쓰기 시작한 것도 말하자면 성 소수자의 권익 운동인 LGBT 운동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의 칼럼에서는 그런 구분이 크게 중요하지 않으며, 동성애자, 이성애자, 양성애자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이 상담을 요청해 온다. 이 때문에, 그의 칼럼에서는 상당히 다채롭고도 혼돈스러운 미국인의 성 실태를 볼 수 있다. 나는 이게 꼭 혼란스러운 실태를 반영한다기보다, 상담이란 잘 나가는 사람보다는 문제와 갈등을 가진 사람들이 해 오게 마련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그의 칼럼에는 다음과 같은 독자의 고민이 올라왔다.




죽이는 약혼자가 있는데, 욱 하고 성질(tantrum)을 잘 내는 모양이다. 열쇠를 잃어버린다거나 지하철을 놓치는 것 같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도 불 같이 화를 내고, 그 때마다 뭔가를 집어 던지거나 물건에 대고 주먹질을 한다고 한다. 지금은 약혼녀이고 결혼하면 아내가 될 자신을 때리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어릴 때 아빠로부터 학대를 당한 경험을 가진 고민녀는 약혼자가 성질 부릴 때마다 그 생각이 나서 괴롭다고 한다. 치료를 받아보자고 해도 별로 응하지를 않는다고 한다.

새비지 칼럼에 보내 오는 고민치고는 매우 소프트하다. 이 정도면 성 관련 칼럼이 아니라 일반 relationship advice 칼럼용이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그러나 한편, 헤테로 관계의 야만성이 드러난 사례라고 생각하면, 새비지가 설정하고 있는 이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이런 고민에 대해 새비지가 해준 조언은 나의 생각과 아주 비슷하다.

"그가 당신을 때리지 않는 것은 지금뿐입니다. 그가 나중에 반드시 당신을 구타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지하철을 놓쳤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은 조만간에 아내에게도 그런 화를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혼 생활은 지하철로 통근하는 것보다 훨씬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조심스럽게 그 문제를 꺼내 보았다"라고 하는 말은 당신이 이미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며, "약혼자가 나를 때리거나 학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말은 이미 당신이 그를 변명해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응급실, 이혼 법정, 묘지에 가면 "나를 때리거나 학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던 사람들을 숱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새비지는 그에게 치료를 통해 성질을 고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보고, 그게 안 된다면 아무리 오썸하더라도 결혼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동의한다. 오썸은 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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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가을에 지구를 강타한 월 스트리트발 금융 위기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의 생활을 옥죄고 있다. 2009년 4월, 한국에서는 경기 불황 속에 화투가 많이 팔린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2009년 1/4분기에 팔린 화투가 그 전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46%나 늘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조사는 아니었겠지만, 경제 위기 한파의 위력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지만 투명한 창(窓)이 아닐 수 없다. 짤막한 기사를 보면서 한참 우울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보다 더 우울한 소식이 있었다. 경제 위기의 여파로 가정에서 매 맞는 아내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2008년 하반기에 불어닥친 경제 한파는 건설, 중공업, 자동차 같이 주로 남성들이 활동하는 경제 부문을 우선적으로 강타했다. 반면 공공 서비스, 보건, 교육 같이 여성이 적극 활동하는 산업은 타격을 덜 입었다. 미국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2008년 11월 이래 미국에서 사라진 일자리의 80%가 남성의 것이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주로 실업으로 내몰리기 때문에, 불황을 의미하는 리세션(recession)은 '히세션(he-cession)'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사와 연구에 따르면, 실업은 불행하게도 가정 폭력과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 예컨대 제너럴 모터스의 조립 공장이 있는 한 인근 도시의 YWCA 가정폭력 피신처에서는 다음과 같은 통계가 나왔다. 경제 위기 전인 2008년 3월의 한 달 기간에 이 피신처에서 밤을 보낸 사람은 연인원으로 232명이었다. GM 공장은 2008년 말에 문을 닫았는데, 그 뒤인 2009년 3월에 피신처를 이용한 사람은 640명으로 세 배 가까이나 급증했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이처럼 단일 직장의 대규모 해고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실업률 상승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였다. 그에 따라 가정 폭력도 역시 함께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지역의 관련 기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9년 1/4분기에 가정 폭력으로 상담을 받은 사람은 그 전해에 비해 124%나 늘었으며, 1~3분기를 합치면 144%가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가정 폭력을 호소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양상이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전역에서 비슷하게 관찰되었다. The National Network to End Domestic Violence의 자료(pdf)에 따르면, 1) 부부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3배 이상 가정 폭력이 많으며, 2) 5년의 조사 기간 중에 남편이 두 번 이상 실업을 경험한 가정의 아내는 남편이 안정된 직장을 가진 경우보다 3배 가까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3) (경제 위기가 시작된) 2008년 9월 이래 피신처를 찾는 사람이 늘어난 피신처는 75%에 이르렀으며, 4) 피신처 직원들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92%가 2008년 이래 희생자들이 늘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현장 직원들에 따르면 최근의 가정 폭력은 그 양이 증가하는 것과 더불어 폭력의 양상도 심해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과거에 피신처를 찾아 오는 여성들은 멍이 든 몸을 옷으로 감추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코가 부러지고 턱이 깨져서 오는 여성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피신처의 집계에 따르면, 방문과 전화를 포함한 전체 상담 건수는 크게 늘어났는데 전화 상담은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은 가해자(남편)가 실업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에, 집에서 전화를 하기가 곤란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불황의 그림자를 이렇게 세밀하게 반영하는 척도도 드물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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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가정의 경제 상황과 가정 내 폭력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펴곤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도 배우자간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정 폭력이 돈보다는 권력과 통제를 놓고 벌어지는 다툼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경제 위기 이후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현장 근무자들의 체험적 진술에 어긋난다. 살림이 쪼들리게 된 것이 가정 폭력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를 부추기고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새비지 러브'의 고민 상담에 나온 약혼자 남성은 걸핏하면 욱 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불안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있다. 집에서 아내(혹은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곧 꿈과 희망과 덕이 되어 버린 지금 사회에서, 이러한 자원을 가지지 못한 인간에게 꿈과 희망과 덕이 없다고 무조건 나무랄 수 있을 것인가. 열심히 일만 해온 죄밖에 없는 가족이 경제 자원을 박탈당한 뒤, 시시각각 목을 죄며 다가오는 고지서 더미 속에서 얼마나 큰 분노와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패지만, 어떤 사람은 옥상에서 뛰어 내린다.

가정 안에서 배우자를 대상으로 하여 벌어지는 폭력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어떤 말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 한편, 가정 폭력이나 배우자 폭행이 증감하는 사회적 맥락도 유심히 보아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서, 문명으로 순치되었던 우리 안의 야만성을 불러내는 것은 돈벌이에 혈안이 된 월 스트리트의 탐욕스런 금융 자본가들과 그들의 이익만을 챙겨 주는 정치인들이 만든 야만적 시스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덧글

  • 2011/04/03 00:51 # 삭제 답글

    한국에서도 실직한 남편이 자격지심을 못이겨 돈벌어오는 아내를 구타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회자되지요. 경제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겠지만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 deulpul 2011/04/05 09:53 #

    아니 업고 다녀도 시원찮을 판에 때리다뇨... 하지만 사람 사이의 화학 작용이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문제인 모양입니다.
  • Silverwood 2011/04/03 19:57 # 답글

    1998년에 IMF 터졌을때가 생각나네요. 그때 제 아버지는 하루종일 주무시던 모습 뿐이라 마음이 아팠는데, 이 글을 읽고보니 때리는 것보다 차라리 주무셨던게 다행이라 생각하는...음?ㅋ
  • deulpul 2011/04/05 09:56 #

    하하, 웃음이 나는 말씀이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네요. 그 때 많은 남성들이 가족 대신 등산로를 짓밟고 다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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