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손님 섞일雜 끓일湯 (Others)



새 식구인 벌새(hummingbird)입니다. 새[新] 식구이기도 하고, 새[鳥] 식구이기도 합니다. 같이 생활하지는 않으니 식구라기보다 손님이라고 해야 맞겠네요.

벌새에 대한 별다른 지식 없이 급식기(feeder)를 구해 창 밖에 설치해 둔 게 4월 중순쯤. 거의 한 달 가까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내심 꽤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건만 갖추어지면 이 곳에도 벌새가 날아 온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두어 해 전에 바로 저 자리에 진짜 꽃나무가 있었을 때, 벌새들이 날아와서 날개를 휘저으며 공중에 정지한 채 꽃에 부리를 넣고 꿀을 빠는 경이로운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 급식기는 사용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평이 좋은 제품이었습니다. 꽃과 비슷한 모양을 함으로써 벌새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게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새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죠.

여하튼 새를 실제로 본 적이 있고, 사용자들이 인정하는 급식기이니까, 달아만 두면 새들을 곧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씨 나쁜 거인의 집에는 어떤 아이도 놀러가지 않는다는 옛날 동화 생각도 나고, wicked and mean한 왕의 나라에는 꽃도 피지 않는다는 노래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 생각도 나면서 좀 우울했습니다.

그런데 5월 중순부터 급식기 안의 액체(의 정체는 아래에 설명함)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습니다. 이 액체는 벌새들이 먹든 안 먹든 일주일 정도 지나면 갈아줘야 하는데, 따로 갈아주지 않고 보충만 해도 될 정도로 양이 줄어들었습니다. 가능성은 벌새가 나타나서 먹기 시작했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잡아 흔들어서 액체가 쏟아졌거나... 일텐데, 이 곳은 외진 모퉁이라 후자의 가능성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저 벌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몇 번 왔다갔다 하면서 경계심을 풀었는지, 이제는 수시로 날아와 밥을 먹습니다. 창가에 앉아서 잠시만 있으면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동안 나타나지 않은 것은 내가 wicked and mean해서가 아니라 올해 봄이 유난히 늦게 온 탓이려니 싶어서 내심 은근한 위안을 주는 놈입니다. 급식기 바로 옆인 창가에서 찍었는데도 화질이 흐릿한 것은, 창에 방충용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날 잡아서 스크린을 떼고 다시 한번 찍어 보려구요.

급식기 밑에는 작은 횃대(perch)가 달려 있습니다. 이 횃대에 올라 앉으면 부리가 꽃 모양 급식기 안에 잘 닿도록 되어 있습니다. 횃대는 제거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없애 버리면 우리가 흔히 아는 장면, 즉 날개를 빠르게 저으며 공중 정지한 채 꿀을 빠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횃대는 그냥 달아 두기로 했습니다. 가냘픈 날개로 1분에 수천 번이나 휘젓고 다니는 것도 피곤할 텐데, 밥 먹을 때조차 노동을 하면서 먹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죠. 걔들한테는 우리가 숟가락질 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습니까. 어쨌든 횃대가 있으니 항상 거기 올라 앉아서 밥을 먹습니다.

지금까지 단골로 찾아오는 놈은 한 마리, 아니면 두 마리입니다. 그게 아리송한 것은 각도와 햇빛에 따라 색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같은 놈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곳으로 밥을 먹으러 오는 놈이 생겼으니 가족 같은 손님인 셈이지요.


출현한 벌새의 정체

저 영상에 찍힌 벌새는 생긴 모양과 분포지로 보아 검은턱벌새(Black-chinned Hummingbird) 아니면 루비목벌새(Ruby-throated Hummingbird)의 암컷인 것 같습니다. 전자는 목덜미가 검고 후자는 붉은데, 이것은 둘 다 수컷의 특징이고 암컷은 그런 특이색이 없어서 모양이 비슷해집니다. 등짝에 녹색 빛이 도는 것을 보면 전자인 듯하고, 분포지를 고려하면 후자인 듯 합니다. 몸길이는 7, 8센티미터 정도입니다. 정말 작고 여리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모습입니다.

(검은턱벌새의 암컷)


(루비목벌새의 분포지. 녹색: 여름 서식지, 파란색: 겨울 서식지, 노란색: 이동 경로)


대부분의 벌새는 철새입니다. 저 가냘픈 날개로 어딜 그렇게 날아다니냐 싶은데, 보기와는 달리 대륙을 건너뛰는 엄청난 스케일의 소유자입니다. 북미에서 나타나는 벌새들은 대부분 겨울에는 멕시코를 거쳐 중미 지역으로 내려갑니다. 기러기 종류처럼 패를 지어 서로 격려하며 여행하는 것도 아니라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강단과 패기가 여러 모로 놀랍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벌새는 꽃 안의 꿀(nectar)을 빨아 먹습니다. 이것이 주식인데, 꿀만 먹어서는 다른 영양소를 섭취할 수가 없죠. 그래서 벌레도 먹습니다. 새끼를 낳을 때나 가을에 장거리 여행을 준비할 때 단백질을 집중적으로 섭취해서 몸을 키운다고 하는군요.

벌새가 공중에 정지해 있을 수 있는 것은 빠른 날갯짓 덕분입니다. 종류에 따라서 1초에 90번까지 날개를 저을 수 있습니다. 영어 이름의 허밍이라는 말은 빠른 날갯짓에서 나오는 붕붕거리는 소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또 모든 새는 앞으로만 날 수 있지만, 벌새는 뒤로도 날 수 있습니다.

격렬한 날갯짓을 지탱하기 위해 신체 구조도 그렇게 발달해 있습니다. 심장 박동은 분당 1,260회까지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상상도 되지 않는 숫자입니다. 이렇게 소모되는 에너지를 보충하고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서는 매일 자기 몸무게보다 많은 양의 꿀을 먹어야 하며, 이를 위해 꽃을 수백 개 찾아 다녀야 합니다. 그렇게 얻은 에너지는 다시 이렇게 꽃을 찾아 다니는 데 쓰이는 것이죠. 인생이란 참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새입니다. 작은 몸에 많은 영양분을 축적할 수 없기 때문에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합니다. 연구자들은 "벌새는 언제나 굶어 죽기 몇 시간 전의 상태로 산다"라고 합니다.

수명은 3~5년입니다. 10년까지 사는 종류도 있다고 하는데, 흔하지는 않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먹고 살아봐야 기껏 5년 평생이구나.


액체의 정체

급식기 안에 넣어서 벌새에게 먹이는 것은 설탕물입니다. 꽃의 꿀을 구성하는 넥타가 본질적으로 설탕물입니다. 전문가들은 설탕과 물을 1:4로 혼합한 용액을 먹이라고 조언합니다. 결정 형태로 되어 있는(granulated) 일반 설탕이어야 합니다. 콘스타치가 들어 있는 고운 설탕, 철분이 들어 있는 흑설탕 등은 안 됩니다. 벌새 급식용으로 파는 용액도 있는데, 이 용액의 색소가 벌새들에게 좋지 않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기본은 설탕물입니다.

물과 설탕을 비율에 맞게 혼합한 뒤, 한번 살짝 끓여 줍니다. 그래야 쉽게 변질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용액을 준비하는 일이 귀찮을 수도 있는데, 밥을 먹으러 찾아오는 새들을 생각하면 그것도 즐거움입니다.

저 새도 날이 추워지면 남쪽으로 내려 갈 겁니다. 언제까지 제가 주는 밥을 먹으며 머물러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젠가 먹이가 더이상 줄어들지 않으면 wicked and mean한 주인, 아니 날씨를 버리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났음을 알 수 있겠지요.

※ 이미지: 위키, 지도: 위키


[덧붙임] 사진 두 장(6월13일).





 

덧글

  • 크롬지붕 2011/06/02 13:47 # 답글

    이오공감에 참새포스팅 하신분에 이어서 훈훈한 포스팅 하셨네요. 제가 사는 곳에서도 아주 가끔 벌새를 보곤 하는데 볼때마다 참 저 작은 몸에서 날갯짓을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요. 또 여기서 유명한게 박쥐인데 근처에 박쥐들이 살수 있도록 지은 집이 있어서 저녁 어스름해지면 박쥐들이 곤충을 잡아먹기위해서 집에서 일제히 날아 나오는데 이게 또 참 장관입니다. 박쥐들이 해로운 모기 같은 곤충들을 많이 사냥하기때문에 그런 집을 일부러 지어서 박쥐들이 살수 있게끔 해준다고 하더군요.
  • deulpul 2011/06/03 12:07 #

    아, 그것도 정말 특이한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박쥐가 유익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어릴 때 들은 동화 탓이겠죠. 조류와 짐승들 간의 싸움에서 이리저리 붙는 박쥐의 간사함... 예쁘다고 보기는 어려운 외모... 이런 게 다 인간의 선입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배트맨도 별로 안 좋아해요, 하하.
  • 유 리 2011/06/03 15:53 # 답글

    제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살았던 동네에선 이 벌새를 자주 볼 수 있었어요. 2월 중순이 돼서 더워지기 시작하면 보이기 시작하곤 했죠. 꽃나무 주변을 날아다니면서 꿀을 먹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저렇게 횃대에 앉아서 날개를 움직이지 않고 있는 모습은 처음 봐요. 날개짓을 하고 있지 않으니 뭔가 전혀 다른 새 같네요. ㅎ
  • deulpul 2011/06/05 05:59 #

    2월 중순에 더워지기 시작한다고 하신 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 곳처럼 추운 곳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아서 신기하게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봄, 여름이 와도 큼직큼직하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드물어서, 벌새가 살기에는 별로 좋은 환경이 아닌 듯 싶습니다. 편안히(?) 앉아서 꿀을 빨고 있는 모습이, 말씀 듣고 보니 정말 좀 게으르고 건방지게 느껴지네요, 하하.
  • 2011/06/04 03:4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6/05 06:05 #

    그 새는 소리가 중후해서 매력적인 대표적인 새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의 추억 여러 장면에 깃들어 있는 새이기도 하죠. 저 카메라의 이쪽 편을 보셨다면 틀림없이 다른 생각을 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저 역시 날 잡아서 치우는 편이고, 그게 귀찮아서 되도록이면 어지르지 않는 편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렇게 한번씩 날 잡아 치우면 뿌듯하지 않습니까? 예술가가 자신이 완성한 창작물을 놓고 흡족해 하듯이 말이죠... 좀 오버같긴 하네요, 하하.
  • 2011/06/05 23:3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6/06 14:35 #

    아, 그래서 막혔던 것이군요. '블로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사형 선고 같은 메시지를 보면 기분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하하. 아 참, 저는 이곳 덧글에서 다른 분의 블로그를 바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아무리 귀찮아도 꼭 주소창에 쳐 넣어서 갑니다. 그래서 통계의 리퍼러 같은 데 잘 잡히지 않을 거에요. 벤 애플렉이 주연한 영화 <The Town>에서 은행 강도들이 범행 후에 창구 주변에 락스를 콸콸 쏟아 붓는 장면이 있죠. 염소산나트륨 신공을 잘 익혀 두십시오, 하하.
  • 2011/06/06 19:4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6/08 11:43 #

    그 인간은 오래 전에는 꽤 우호적으로 지켜 봤었는데, 어째 갈수록 정이 떨어지는군요. 물론 경(卿)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인간 이야기입니다. 경은 잠깐 둘러봤더니 그 인생 자체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매력적인 요소로 가득 찬 사람인데, 왜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의 인생을 책으로 읽지 않는다면 읽고 싶은 인생도 별로 없을 듯 싶네요. 저라면 아주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취향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 위의 영화는 꼭 챙겨 볼만한 것은 아니고, 시간 보내기용에서 한 발 나간 정도입니다. 독해 가능한 오타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 2011/06/06 19: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1/06/08 13:4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6/09 03:21 #

    책은 몰라도 영화로 만들면 꽤 좋은 작품이 될 듯 합니다. 책도 그렇네요. 팔릴 책만 만들고 광고가 판매를 좌우하는 출판 시장이 지적으로 풍부하고 건전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책을 찍어 내는 일은 분명한 비지니스입니다만... 인구가 열 배 늘면 기본 판매량도 열 배로 늘고, 따라서 좀더 다양한 책을 볼 수 있게 될까요. 어떤 잡지에서 출판사 담당자들에게, 팔리지는 않았으나 아쉽고 소중한 책을 골라 소개하도록 하던 기사 시리즈가 생각납니다.
  • 벌새 2011/07/29 11:58 # 삭제 답글

    그런데 벌새는 한국에서 파나요?
    판다면 가격은 얼마정도할까요?
  • deulpul 2011/07/30 08:26 #

    드시려고 하는 건 아니죠? 농담이고요... 한국에서도, 이곳에서도 벌새를 애완용으로 기른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길 잃은(?) 어린 벌새를 키워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이야기는 간혹 있지만요. 제가 견문이 짧아서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쟤들은 새 우리 안에서 잘 살 것 같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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