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좀비 낚시 1: CDC의 좀비 대비책 섞일雜 끓일湯 (Others)

얼마 전에 미국의 방역 기관인 질병통제센터(CDC)의 블로그에 '좀비 창궐 사태에 대처하는 법'이라는 포스팅이 게재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좀비가 들끓으며 인간을 위협하는 위급 사태가 벌어질 것에 대비해 적절한 준비를 갖추어 두라는 글이었는데, 질병 대처에 책임이 있는 정부 기관의 공식 사이트에서 좀비 사태를 현실적인 위협인 양 언급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글은 좀비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두어 단락으로 간단하게 언급한 뒤, "대중 문화에서 좀비가 성행하는 양상을 보면 좀비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을 듯하다. 이러한 생각이 확산되면서 '어떻게 좀비 사태에 대비해야 할까' 하는 궁금증도 늘어나고 있다"라고 운을 뗀다. 그 뒤에 서술되는 것은 '좀비 만연 사태'에 대비한 비상 대책들인데, 이것은 '전염병 만연 사태', 혹은 '재난 사태'에 대비한 비상 대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를테면 충분한 물과 식량, 의약품, 장비, 주요 문서를 갖추어 둔다든지, 가족이나 친지와 만날 비상 연락 장소를 정해 둔다든지, 비상 탈출 계획을 미리 세워 둔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기 어려운 좀비 사태뿐 아니라 실제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재난과 위험 사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대비책이다.

바로 이 점이 이 포스팅의 탁월함이다. CDC는 좀비라는 문화 아이콘(?)을 활용하여 시민들이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할 주요한 사항들을 홍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시 말해 CDC의 이 포스팅은 좀비 관련 포스팅이 아니라 응급 대비책 관련 포스팅인 것이다.

연합뉴스를 비롯한 한국의 일부 언론은 이를 기독교계의 종말론 유포 행각과 연결시켰지만, 이는 넌센스다. 아무도 거의 신경쓰지 않는 헛소리들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갖고 열심히 홍보해 주는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탁월한 정책 PR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것은 이 포스팅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되돌아 본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에피소딕한 사안에도 in-depth reporting을 통해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언론을 보면, 그저 보도 자료나 적어 내는 언론들이 얼마나 게으른지, 별다른 개연성도 없이 뜬금없는 사태와 자의적으로 연결시키는 언론이 얼마나 어이없는지 잘 알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좀비 아이디어는, 곧 시작될 허리케인 시즌에 대한 홍보 방안을 논의하는 CDC 공보팀의 회의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CDC 트위터에서 일본의 방사능 유출과 관련한 트윗을 올렸을 때, 누군가가 방사능 때문에 좀비 사태가 벌어지지 않겠냐고 되쏜 사실이 거론되었다. 공보팀의 재난 대책 담당자 데이빗 데이글은 좀비 아이디어를 갖고 CDC의 사전대책국 국장인 알리 S. 칸 박사를 찾아갔다. 데이글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국장들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라고 했겠지만, 칸 국장은 '좋아, 좀비 대책반을 만듭시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좀비 포스팅이 탄생했다.

그 효과는 엄청났다. CDC 블로그의 포스팅은 대개 하나당 1천 번 안팎의 조회를 받는데, 좀비 포스팅은 하루만에 수만 번의 조회수를 기록하다가 결국 서버를 다운시켰다. CDC는 급히 서버 용량을 늘렸으며, 조회수는 계속 늘어났다. 글은 트위터 등을 통해서 무한히 확산되었다. CDC의 트위터는 새로 5천 명 이상의 팔로워들을 끌어 들였다. 뿐만 아니라 각계의 전문가가 응급 대비 관련한 덧글들을 달아서 내용이 풍부해지기까지 했다. 언론들은 이러한 사실을 기사로 썼다. 좀비를 통해 갑자기 응급 대비 아젠다가 설정된 셈이다. 게다가 멀리 한국 언론에까지 알려지지 않았는가.

CDC의 공식 홈페이지에도 올라간 좀비 포스팅을 직접 쓴 알리 S. 칸 박사는 에볼라, 리프트 계곡열, 원숭이 수두, 프리온 질병 등을 다루는 전문가다. 이런 전문성이 적절하고도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잘 연결되어 나온 게 좀비 포스팅인 셈이다. 잘 모르긴 하지만,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채, 상관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허리를 곧추세운 자세로 뭔가를 열심히 받아적는 회의에서 이런 아이디어가 나오고 현실화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기껏해야 '허리케인 시즌 대비책'이라는 이름의 보도 자료나 한 장 나왔을 것이다. 아무도 돌아 보지 않는.


※ 이미지: CDC 블로그(본문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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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死海文書 2011/06/06 08:43 # 답글

    허... 이런 것이 있었을 줄이야. 좀비대책도 결국은 재난대책과 상통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그걸 실제로 적용한 건 처음이네요.

    이런 유익한 글은 한국어 번역판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안 되면 제가 직접 독해해야겠지만요. [...]
  • deulpul 2011/06/06 14:35 #

    길지 않은 글이라서 금방 보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찾아보니 코리아헬스로그 사이트에, 이글루스에서도 활동하시는 Charlie님이 원문의 주요 부분을 번역하신 내용이 포함된 기사가 있습니다: http://www.koreahealthlog.com/3384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재홍 2011/06/06 17:52 # 삭제 답글

    제 즐겨찾기에 별다섯개 폴더에 저장해뒀습니다. 완전 멋지네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deulpul 2011/06/08 11:45 #

    별 10개 기준으로 말씀하신 것이죠? 하하... 고맙습니다.
  • 2011/06/06 21:0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6/08 11:48 #

    뜬소문이 버젓이 기사가 되는 대표적인 장르지요. 그리고 나서 사과도 없고 반성도 없어요. 한국 언론의 값어치를 추락시키는 주요한 아이템입니다. 뜬금없이 등장하고 신속히 번져가는데다 잘 사라지지도 않는 양상이 정말 좀비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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