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무자격자 섞일雜 끓일湯 (Others)

공자님은 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하면 사무사(思無邪)라고 하였지만, 영화 삼백 편을 한 마디로 하라면 사랑사(事)라고 할 도리밖에 없을 듯하다. <해피엔드>에서 최민식이 헌책방에서 연애 소설을 고르면서 "애절하고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진짜 연애 소설이 재미나죠" 하니까, 책방 주인 주현이 "어이구, 까다롭기는. 사람 사는 인생살이가 다 그렇구 그런 것이지, 뭐!" 한다. 탐미주의자에게는 애절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사랑 이야기만 눈에 들어 오겠지만, 사람이 사랑하며 사는 그렇고 그런 인생살이들도 대개 영화 한 편쯤은 된다.

영화에 그려지는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 중에 가슴에 박혀 잊히지 않는 게 몇 있다.

안소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먼. 두 사람이 사랑한다는 게 믿기시는가. 배우 나이로 따져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 사랑도 <양들의 침묵>에서처럼 추상적이고 은유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옷 다 벗고 서로의 몸과 마음을 탐하는 정열적인 사랑을 한다.

사랑과 인생에 대한 세심한 관찰인 영화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에서다. 극중에서 60대 퇴직 교수이고 실제로도 60대인 홉킨스는 서른 네 살 먹은 여자와 사랑을 한다. 니콜 키드먼 역시 실제 나이 36세로, 극중 인물과 아주 흡사하다.




두 사람의 격정적인 사랑은 많은 물의를 일으키는데, 두 사람의 신분 차이에서 비롯되는 각종 소문이 그 중 하나고, 키드먼의 전 남편인 미치광이 에드 해리스가 해꼬지를 하러 쫓아다니는 것이 또 하나다.

이런저런 문제가 꼬여서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자, 홉킨스의 젊은 친구인 은둔 작가 게리 시니스가 그녀와 헤어지라고 강요하다시피 한다. 젊은 여자와의 섹스에 대한 탐닉에서 벗어나서 제발 정신을 차리라는 것. 사정 알 만한 친구로부터도 사랑을 이해 받지 못한 홉킨스는 불 같이 화를 낸다. 그 때 던지고 나간 한 마디가 잘 잊혀지지 않는다.

"그녀가 내 첫사랑은 아니야. 내 위대한 사랑도 아니지. 하지만 그녀는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라구.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나?" ("Granted, she’s not my first love. Granted, she’s not my great love. But she is sure as hell my last love. Doesn’t that count for something?")

마지막 사랑. 이보다 소중한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첫사랑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마지막 사랑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될 수도 있지만, 그조차 죽어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적절한 순간에 이른 사람들은 무엇이 마지막 사랑인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되는 듯싶다. 나의 사랑이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열렬히 매달리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홉킨스는 자신이 사랑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학교와 동료들과 그 자신의 인생이 그를 배반했다. 그는 늙고 힘없고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자신 앞에 나타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한 키드먼. 나는 그가 영화에서 그랬듯 사랑을 하다 사랑 때문에 죽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본다. 키드먼이 젊고 싱싱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일깨워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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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글루스 동네에서 본 글 중에 인상적인 게 있다. stylebox님이 쓴 '이쁜 여자 곁에는 꼭 주눅들게 하는 남자 있지 않나요'다.

근데 그러다가 보면 꼭 씨발 그런 여자 곁에는 진짜 잘난 남자 하나씩 있단 말이죠. 모처럼 친해져서 작업 좀 걸려고 하다가 보면 진짜 나와는 비교도 안되는 스펙의 간지남이 그녀 주변에 있어서, 스스로 생각해도 코웃음 나오고 '아 하마터면 병신짓 할 뻔했네' 하고 고개 푹 숙이고 우울해지게 만드는 그런 경우 있지 않나요? (전문을 다 봐야 이해가 잘 됨.)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 싶다.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없어지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지 못하게 마련인 듯하다. 스펙 좋은 '간지남'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사랑, 좋지만 나는 자격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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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상대가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적어도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사랑에 관습과 현실이 강제한 자격이 필요하다는 명백한 사실은 잘 몰랐다.

사랑이 갖는 보편성과 무조건성을 강조하기 위해 흔히 '사랑에는 OO이 없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라든가. 하지만 이런 무조건적 사랑은 사랑이란 말 자체가 그렇듯 일정한 환상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국경은 없을지 몰라도 자격은 필요하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의 현실이, 그 땅에서 강제되거나 인정되는 온갖 물적, 사회적, 관습적 조건이 나에게 자격을 강요한다, 사랑을 하는 데에.

사랑하는 마음은 허용되었으나 사랑은 허용되지 않은 사랑 무자격자들은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애절하고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다 현해탄에 몸을 던지는 연애 소설 같은 사랑이나 하여야 하는지. 김훈의 <화장> 주인공처럼 무의미한 독백과 같은 사랑이나 하여야 하는지.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사랑 무자격자로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렵다.

※ 이미지: <휴먼 스테인> 중에서.

 

덧글

  • 버드나무 2011/06/26 14:46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무자격자라기보다는, 세상이 자격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봐야겠네요.
  • deulpul 2011/06/28 08:45 #

    그렇죠. '-할 자격이 없다'라는 말에 담긴 지나치게 부정적인 어감을 덜어내고 싶었는데, 다른 좋은 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이, 혹은 상황이 자격을 주지 않는다고 하고 싶었습니다.
  • 자그니 2011/06/27 01:30 # 답글

    음...
  • deulpul 2011/06/28 08:45 #

    수많은 말이 담긴 한 글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근데 왠지 좀 무서워지는 듯... 하하.
  • 2011/06/27 03:2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6/28 08:45 #

    별 노래를 다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 공범자가 되는 일이 참 비정하기는 하지만, 저는 아주 행복한 일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끝이란 무엇이든 있게 마련이고, 어찌 보면 인생 자체가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나 30센티 아래를 기준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의 넋두리였습니다. 저 노래는 언젠가 노래방에서 한번 불러 봐야겠네요. 짧아서도 좋구요. 오타 나신 걸 '속살'로 읽어도 아주 잘 납득이 되네요... 하하.
  • deulpul 2011/06/28 10:57 #

    아, 첫 문장은 당연히 찬사입니다. 반갑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 2011/06/28 23:4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6/30 02:29 #

    그 즐거움이란 게 아주 쏠쏠하고 재미있죠.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즐거움. 게다가 '속살'이나 '면박' 사례에서처럼 실수로 나온 것이 충분한 설득력이 있거나 더 적절한 표현인 상황이 되면 금상첨화죠. 하지만 'OOO 대통령'에서 실수로 '통'자를 하나 빠뜨린 원고를 보고 편집국장이 달려와서 "옛날 같았으면 너하고 나는 남산 가서 반쯤 죽었다 나왔을 거다" 했다는 사례를 떠올려 보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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