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deulpul이 되었나 섞일雜 끓일湯 (Others)

블로그 화면 왼쪽의 '이 블로그의 글들' 리스트를 정리하다 보니, 어느 새 새 volume으로 넘겨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판을 넘기는 기념 포스팅인 셈.

일반 관객이 쓴 영화 감상 후기들을 보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만난다: "Don't waste your life on this trash!" 쓰레기 같은 영화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건데, 그냥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보다 훨씬 강하고 섬찟하기까지 하다. 줄줄이 늘어진 글 리스트를 보면서, 나는 이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deulpul이란 이름을 써 온 지도 꽤 됐다. 코흘리개 시절, 하이텔-천리안 시절부터 이 아이디를 써 왔다. 한글 발음대로 들풀인데, deulpul이 된 것은 당시 하이텔 아이디는 영문자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들풀, 혹은 deulpul이 되었나. 처음에 하이텔 가입을 할 때는 컴퓨터와 피씨 통신에 대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꼬꼬마였다. 아는 형이 와서 컴퓨터 설치와 하이텔 가입을 도와 주었다.

형: (띠디디디디디딕... 뚜- 뚜- 뚜-... 우릉우릉... 치이이이이이익...) 자, 연결되었다. 이제 가입 신청을 하면 된다. 그럼 바로 접속해 쓸 수 있거든.
나: 오오. 감사.
형: 그런데 아이디를 만들어 넣어야 해.
나: 그게 뭔데?
형: 피씨 통신에서 쓰는 이름. 그거로 접속해야 하고, 너가 뭐 써도 그게 이름이 되는겨.
나: 음... 그래? 이름이면 중요한 거네... 뭘로 하지?
형: ... 글쎄? 음... 들불! 이거 어떠냐. 멋있지? 들불! 뭔가 스펙타클하면서도 짜릿하고 도발적이면서도 화려하잖아. 들불! 들불!
나: ... 에... 뭐, 좋은데? 그냥 아무거나 해.
형: 그래! 알았어! 들불로 하는 거다! (타다닥... 타다닥...)

(잠시후)

형: 어? 큰일났다.
나: 왜?
형: 오타가 났어... deulbul 해야 하는데 deulpul 해 버렸다...
나: ......
형: 음... 그냥 들불 말고 들풀 해라. 그것도 뭐 멋있지 않냐.
나: ............

이렇게 해서 나는 들불이 되려다 들풀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들불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더라면 이름에 치였을 것 같다. 그런 이름으로는 서정적인 글쓰기는 하지 못할 것 같고, 항상 어디서나 불을 질러야 한다는 열혈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사고나 열심히 치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때 오타가 난 게 진심으로 다행스럽다.

들풀은 좀 여리고 맥없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여기에 내가 좋아하는 김수영의 시 '풀'의 이미지를 덧입히고 혼자 좋아해 왔다. 그러고 보니 딱이지 않은가. 오타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랄까.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시 '풀' 전문)

뜻과 발음은 모두 들풀이지만, 표기는 언제나 deulpul이었다. 내가 먼저 스스로를 '들풀'이라고 표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듯하다. 나의 온라인 정체성은 deulpul이라는 영문자 일곱 개에 각인되어 있다. 글자를 가만히 보면, 여린 뿌리를 내린 채 조심스럽게 자라 올라가려는 잡초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위로만 치오르기보다 옆으로 퍼지는 느낌도 좋다.

어쨌든 나의 정체성은 deulpul이라는 영문자에 시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들풀'이란 한글 호칭은 좀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실제로 인터넷에서 활동하시는 분 중에는 '들풀'이란 한글 아이디를 쓰시는 분이 적어도 두 분 이상 된다. 일회적인 대화명이 아니라, 나처럼 상당 기간 공들여 가꾸어 온 이름인 것으로 생각되는 분들이다. 아이디가 뒤섞이면 이 분들께 조금 미안하게 된다. 특히 "들풀 이 자식, 아직도 블로그 쓰나?" 같은 말들을 만나게 될 때 그렇다. 그러니, 욕하고 싶은 사람들은 특히 세심하게 영문 표기를 해 주시기 바란다.

다행히 deulpul이란 영문 아이디는 그리 흔하지 않다.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주로 내가 뜨고, 산채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뜨기도 한다. deulpul.com은 이런 식당 중 하나가 갖고 있던 URL이었는데(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젠가부터 available하게 되었으니 사라는 광고가 자꾸 오기 시작하자, 홈페이지가 중단된 게 아닌가, 사업이 안 되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deulpul.net을 이미 갖고 있기도 하고, 왠지 .com은 별로 내키지 않아서 이 웹주소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최근에 보니 이 주소는 거제도의 한 펜션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나는 deulpul이라는 심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이게 아호쯤 될 것이다. 함께 산 지 오래 되다 보니, 비록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익명 아이디일망정 이 이름이 부끄러울만한 짓은 하기 어렵게 된다. 또 하나의 자아랄까. 낭비든 생산이든, 내 인생의 일정한 부분을 이 이름에 떼어주며 살고 있다.

 

덧글

  • dhunter 2011/08/04 13:58 # 삭제 답글

    아이디를 기분 내키는대로 바꿔온 저로서는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군요. 개인적인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 deulpul 2011/08/04 15:11 #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dhunter님에게도 뭔가 깊은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dhunter 2011/08/05 10:47 # 삭제

    으허허. 그건 정말로 오해십니다.

    어떤 뜻으로 지었는지, 이제는 언제 처음 지었는지도 정말로 기억이 나질 않는 아이디입니다.
  • 2011/08/04 14:0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8/04 15:13 #

    아니 그렇게 노골적인... 하하. 그래서 자기 인생은 되도록 자기가 책임지고 살아야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름은 이쁘네요, 아마도 실명이시기도 할텐데...
  • 2011/08/04 14:2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8/04 15:20 #

    오, 놀랍네요. 그런 성이 있다니... 무의식적으로 글로벌 브랜드화를 염두에 두신 것이라는. 들불에는 방화범의 이미지도 좀 있죠? 적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내뿜는 firebat 같은 게 아니라, 등산로에서 담뱃불이 인화하여... 같은 좀 우울하고 대책 없는 이미지...
  • 2011/08/04 14: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8/04 15:22 #

    아, 오타 내신 적이 있으셨던가요? 혹시 들불로 만들어 버리신 건 아니었죠...? 하하.
  • deulpul 2011/08/04 16:46 #

    이런, 잘못 쓰신 걸 모르고 있었군요, 하하. 전 내용에 집중하느라 전혀 몰랐네요. 언젠가 유행하던 "하드버 대학 교수의들 연구에 따르면..." 하던 글이 생각나는 참입니다...
  • 2011/08/04 16:0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8/04 16:36 #

    고맙습니다. 하이텔 서비스 기간이 꽤 길었고, 하이텔을 하던 사람들의 연령대도 무척 넓었죠? (라고 강변...)
  • 2011/08/04 16:3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8/04 16:41 #

    아,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블로그에서 뵙질 못하니까 마치 먼 데로 이민을 가 버리신 것 같네요. 건강하게 잘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그 사이 큰 변화는 없으셨나 궁금하네요.
  • nomodem 2011/08/04 16:48 # 답글

    존경합니다.
  • deulpul 2011/08/04 17:05 #

    잉여력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는 넷계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 된 의문사항 중 하나죠... 어쨌든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
  • nomodem 2011/08/04 17:08 #

    저의 잉여력도 손오공에게 가면 원기옥이 된다는 것을 왜놈만화가 일찌기 알려주더군요. 겸손하십니다.
  • 2011/08/04 18:2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8/06 10:16 #

    고맙습니다. 비공개님도 아이디가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항상 귀가 축 늘어진 무언가로 기억되신다는...
  • InFeIM 2011/08/04 18:41 # 삭제 답글

    좋은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deulpul 2011/08/06 10:14 #

    고맙습니다.
  • 2011/08/04 23:2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8/06 10:20 #

    역시, 닉네임과 블로그 이름에 재미있는 뜻이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 블로그 이름에 대해 설명해 두신 걸 본 기억이 얼핏 나는데, 확실하지는 않네요. 마지막 말씀, 꼭 명심하겠습니다.
  • SIDH 2011/08/05 11:09 # 삭제 답글

    제 아이디도 원래는 '시대'라고 한글로 쓰고 읽는 아이디였죠.
    그 시대도 時代는 아니고, 제가 서울시립대를 나왔는데, 처음 인터넷에 글올릴 때 (학교 전산실이었음) 마무리에 '시대(시립대 줄임말)에서'라고 썼고 그 문구를 매번 글 올릴 때마다 반복하다가 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제 아이디가 되어버린;;
    나중엔 다른 의미로 중복되는 게 싫어서 사촌동생과 공모(?)하여 자음은 알파벳으로, 모음은 한글로 써서 SㅣDㅐ가 된거죠. 그러나 결국은 다 귀찮아서 그냥 SIDH로 쓰고 있다는...
    시대가 썼습니다.
  • deulpul 2011/08/06 10:27 #

    음... 그러고 보니 역시 첫경험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비유가 좀 이상하다면, 첫발이라고 할까요. 쓰시는 아이디도 그 구성이 아주 독창적이고, 조형미 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네요. 한번 보면 잘 안 잊혀지는 인상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 리디 2011/08/05 17:57 # 삭제 답글

    들풀이든 들불이든 오래도록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시구요. ^^
  • deulpul 2011/08/06 10:27 #

    헐 고맙습니다. 리디님도요.
  • 사시미 2011/08/08 15:21 # 삭제 답글

    의외로 저랑 비슷한 점도 있으셔서 (저는) 좋네요. .net에 대한 이상한 동경(?)이나 아이디에 애착을 가지시는 점이나...^^

    누군가의 작은 잉여력이 누군가에게 큰 가치로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 deulpul 2011/08/09 19:07 #

    아니, 그런 무서운 아이디와 제 헬렐레한 아이디가 비슷하단 말입니까! 하고 보니까, 아이디가 비슷하다는 말씀이 아니군요... 비슷한 점이 있으시다니, 저도 새삼 반갑습니다.
  • 2011/08/08 22:5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08/09 19:29 #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낯선 말이라 만드신 말인가 생각했더니, 그런 뜻이 있었군요. 석 달이라니... 어떻게 사십니까. 아이디 박탈당하게 생기셨습니다. 아, 말씀하신 그 분은 그런 사연이 있었나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만... 어떤 분들에게 세상은 좁고, 제게는 세상이 너무 넓어요.
  • 2011/08/09 19: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민노씨 2011/08/13 17:24 # 삭제 답글

    종종 처음 뵙는 분들께서 '민노씨'라는 필명에 대해 "민노당이랑 관계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요. 별 생각없이 지은 필명이라서 지금 다시 필명을 만든다면, '민노씨'라고 했을까 스스로에게 궁금해지네요. ㅎㅎ

    "또 하나의 자아랄까. 낭비든 생산이든, 내 인생의 일정한 부분을 이 이름에 떼어주며 살고 있다."

    이 마지막 문장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문장이네요. : )

    추.
    컴퓨터 사양은 비교적 쓸만한 사양인데도 크롬이 다운되는 일이 잦아서 주브라우저를 FF로 다시 바꾸려고 하는데, FF를 쓸 때면 이글루스에선 이상하게 댓글 에러(유효시간 초과 메시지)가 뜨네요..;;;
  • 민노씨 2011/08/13 17:24 # 삭제 답글

    추2.
    댓글 달기 위해 잠시 다시 크롬으로 접속. ㅎㅎ
  • joogunking 2011/08/23 18:45 # 삭제 답글

    저도 가입할때 한 10초정도 생각하고 만든 아이디를 10년 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든 단어라 검색하면 제 아이디만 뜨죠.^^.
    그때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보통명사로 했다면 중복 아이디가 엄청 생겼을 것 같네요.ㅠㅠ.
  • amber 2011/08/28 23:59 # 삭제 답글

    영어아이디를 읽어보려는 생각을 했었더라면
    이 블로그를 다시 찾느라 덜 고생을 했을텐에 말이죠.ㅎㅎ
    저는 그냥 알파벳을 조합해서 만들었으려니 하고 무심히 넘겻죠.
  • 2lix 2011/08/30 02:49 # 삭제 답글

    좋은 블로그
  • 까녀 2011/12/13 23:01 # 삭제 답글

    푸푸푸풋으로 심하게 웃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를 소개 받으면서 들풀, 환경 생태주의자? 식물에 관심이 있으신가? 자연의 약자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라는? 어쨋거나 글들은 하나같이 담백하고....다 보려면 몇 해가 걸릴듯해서 좋습니다.
    들풀이라고요......
    저도 그 비슷한 시기에 아이디를 만드는데.....초창기라 웬만한 아이디는 다 사용가능했습니다. 저는 songgot, bulkal, 뭐 이런 아이디를 만들어 한동안 사용했습니다. 제대로 꿰뚫어 보겠다는.....
    송씨냐? 불가리 패션이냐? 이런 대꾸만 들었습니다.

    들풀. 들불. 아.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은데..... 격정시대의 김학철선생님의 우직발랄엉뚱함과 겹쳐서 웃음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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