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매트리스 사이에 숨은 용의자 중매媒 몸體 (Media)

다음과 같은 사진이 있다.




사진 밑에는 다음과 같은 텍스트가 달려 있다:

래리 메이즈. 체포 현장, 인디애나 주 게리의 모텔 로얄 인. 이 방의 침대 밑에 숨어 있던 메이즈를 경찰이 검거하다. 강간, 강도, 불법 일탈 행위 등의 혐의로 80년형을 선고받고 그 중 18.5년을 복역. 2002년.

이 사진과 첨부 글을 보고 처음 가진 느낌은 매우 코믹하다는 것이었다. 용의자가 모텔에서 경찰에 검거되는 현장 사진인 것 같은데, 그 상황이 여간 우스꽝스럽지 않다. 경찰을 피해 숨는다는 게, 기껏해야 매트리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들어간 것이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바보짓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벌어질 만한 경우를 추정하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 용의자가 약물이나 알콜에 취해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다고 추정하든가, 아니면 '대책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흑인'이라는 편견을 작용시킨다든가.

그래도 이상한 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무엇보다, 지금 이 곳은 살인 현장처럼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용의자를 체포하는 동적이고 긴박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안정적인 구조와 분위기를 가진 사진이 나오기란 어렵지 않은가.

그렇다. 이 사진은 강도 강간 용의자 래리 메이즈가 체포되던 당시의 사진이 아니다. 장소는 같은 모텔의 같은 방이지만, 이 사진을 찍은 시점은 그 곳에서 검거된 지 20년이 지난 때다. 교도소에서 18년 반을 보낸 메이즈가 과거의 검거 현장을 다시 찾아간 것인데, 사진을 찍은 사람은 사진작가 태린 사이먼이다.

증거는 없고 피해자 진술만 있다

1980년 10월에 인디애나 주 해먼드의 한 주유소 카운터에 흑인 두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주유소 직원으로 일하던 백인 여성을 총으로 위협하며 돈을 요구했다. 범인들은 돈을 챙기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이 여성을 강제로 데리고 간 뒤 총으로 때려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고 강간했다. 죽이지 않고 내버리고 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신을 차린 피해자는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서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그 곳에서 강간 범죄의 증거를 채증(rape kit)하는 절차를 밟았다.

수사가 시작되었다. 목격자는 없었고 증거도 지문과 병원에서 채증한 생물학적 증거가 전부였다. 피해자의 진술이 사건의 유일한 단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피해자가 진술에서 묘사한 것과 비슷한 사람들을 소환하여 늘어세우고(lineup,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포스터 기억하실 것이다) 피해자가 지목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래리 메이즈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차례의 라인업에서 피해자는 용의자를 지목하지 못했다.

경찰은 다시 메이즈가 포함된 용의자들의 사진을 피해자에게 제시하고 고르도록 했다. 이 자리에서 피해자는 메이즈의 사진을 골라 내었다. 이렇게 메이즈는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현장에 남아 있던 지문들은 모두 메이즈의 것과 일치하지 않았다. 정액을 통한 조사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 못했다(DNA를 활용한 수사가 도입되기 이전이다). 하지만 범인 중 하나가 금니를 갖고 있었다고 피해자가 진술했고, 마침 메이즈가 금니를 하고 있다는 점 같은 정황 증거들이 메이즈를 범인으로 몰아갔다. 오로지 피해자의 진술이 메이즈를 구속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메이즈는 사건이 벌어진 지 2년 가량 지난 1982년 7월에 열린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형량은 80년이었다.

이 다음부터 벌어진 일은 2010년 영화 <컨빅션(Conviction)>과 아주 흡사하다. 이 영화도 실화에 기초하여 만들어졌지만, 영화 같은 부조리한 현실이 세상에 널려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래리 메이즈 케이스는 1996년에 The Innocence Project의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아시다시피 이 단체는 주로 DNA 수사 기법을 통해, 잘못 기소되어 수감중인 사람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석방시키는 유명한 단체다. 한 법학대학(뉴욕의 예시바 대학 법대) 교수들이 설립했으며, 현재도 이 법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조사 실무도 예비 변호사인 학생들이 담당하고 있다.

메이즈 사건을 담당한 학생들은 우선 16년 전의 증거물을 찾으려 애썼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병원에서 피해자로부터 채취한 정액 같은 생물학적 증거물이었다. 이들이 증거물에 대해 문의했을 때 법원이 보내온 대답은 증거물이 분실되었다는 것이었다. 한 인턴 학생이 이 사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며, 결국 법원 직원이 증거품 보관실을 다시 한번 이잡듯 찾아보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메이즈 사건에서 수집된 증거물이 먼지 자욱한 증거품 보관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컨빅션> 케이스와 아주 비슷한 장면이다.

2001년에 DNA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증거물이었던 rape kit에서 나온 DNA는 래리 메이즈의 것과 일치하지 않았다. 범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메이즈는 위 사진에 나온 바로 그 모텔 방에서 경찰에 검거된 이후 처음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형기로는 18년 6개월, 구속 기간을 포함하면 21년 만의 일이다. 진범은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다.

사진에 의해 드러나거나 오히려 감추어지는 진실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사진가 태린 사이먼은,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연속된 신원 확인 작업에 메이즈가 계속적으로 포함된 것이 피해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라인업과 사진 확인에서 같은 사람 모습이 계속 나타날 경우, 이 용의자의 이미지가 피해자 기억 속에 있는 실제 범인의 이미지를 대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건을 새로 맡게 된 검찰팀이 원래의 피해자인 백인 여성을 면담했을 때, 그녀는 "사진에서 범인을 골라내기 직전에, 경찰이 나에게 최면을 걸어서 래리 메이즈를 찍도록 만들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사진의 속성

이제 잠깐 이 사진을 찍은 사진가 태린 사이먼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 사진은 그녀의 사진 프로젝트인 'The Innocents'에 속한 사진들 중 하나이다. 사이먼은 경찰과 사법 당국의 잘못으로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을 억울하게 복역하다 마침내 무죄로 풀려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장소는 모두 범죄와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범행 현장, 검거 장소, 알리바이 장소 등이다.

이런 장소는 범죄와 관련해서는 엄중한 실체적 장소이지만,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허구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납치, 강간, 살해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고 18년을 살다 풀려난 찰스 페인은 범죄 장소인 아이다호 주의 한 강가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 사진을 찍기 전에는 이 곳에 와 본 적이 없다.

이런 사진 작업을 통해 태린 사이먼이 말하려고 하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 사진들에는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 풀려났다는 내러티브뿐 아니라, 현실의 허구가 함축되어 담겨 있다. 가장 엄밀해야 할 사법적 단죄와 처벌의 현실조차 그렇다. 이런 허구는 대개 오인(misindentification)에서 비롯되었는데, 메이즈의 경우에서 그렇듯 많은 경우 오인은 사진에서 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어 경찰 조사에서 활용되는 매체인 사진이 현실을 왜곡한 셈이다. 사이먼의 사진들은 이러한 역설을 잘 보여준다.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되어 있다:

사이먼은 이 사진들에서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사진의 특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모호성의 결과는 (개인에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고, 때로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나저나 만일 DNA 수사 기법이 발견/도입되지 않았거나, 억울한 죄수들의 누명을 벗기려는 이들의 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짓지 않은 죄 때문에 여전히 감옥에서 늙어 가거나 사형에 처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 중 많은 사람을 얽어맨 것은 증거가 아니라 피해자, 증인, 사법 당국의 편견들이었을 것이다.


※ 이미지: 태린 사이먼 홈페이지(본문에 링크)

 

덧글

  • dhunter 2011/10/01 07:59 # 삭제 답글

    물론 무죄를 증명해준 사람들에 대한 보답(?)의 의미도 있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체포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 돌아가서 재연하고 기념촬영(?) 이라니.

    래리 메이즈씨도 대단한 강심장이군요.;
  • deulpul 2011/10/01 10:23 #

    사진을 찍은 사진가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네요. 위의 사진가 태린 사이먼은 자신의 작업 중 80%는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문서를 조사하고 사람들과 접촉하고 만나 인터뷰하는 등의 일에 쓰인다고 합니다. 이 사진에도 그렇게 공들인 사전 작업이 담겨 있을 테고, 그 결과 메이즈가 기꺼이 20년 전의 모텔방 침대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좋은 사진 한 컷이 찍히는 순간은 수백 분의 1초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사진 한 장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위한 노력은 몇 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mooni 2011/10/01 12:10 # 삭제 답글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힘든 일을 할 수 있죠.
    그냥 그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deulpul 2011/10/01 17:24 #

    이 경우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적용되는 말이겠지요. 알아 주고 믿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없던 힘도 나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 인형사 2011/10/02 03:38 # 답글

    저런 사건이 한둘이 아니지요. 그 결과 미국 흑인 남성의 20%가 감옥에 있거나 전과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deulpul 2011/10/02 06:25 #

    The Innocence Project가 DNA 검사를 통해 지금까지 무죄로 밝혀낸 사람은 모두 273명이라고 합니다. 그 중 사형수가 17명이었고요. 모든 흑인 용의자에 인종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긴 어렵지만,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유죄가 확정되는 데에는 그런 요소도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오판 사건들의 경우 배심원 전원(혹은 다수)가 백인이라든가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 인형사 2011/10/02 08:21 #

    형사사건의 95%가 배심원까지 가보지 못하고 Plea bargain에 의해 결정나니 얼마나 많은 불의가 장막 뒤에서 행해졌는지 알 수가 없지요.

    수십년간의 소위 범죄와의 전쟁결과 산업국가 중 최고의 수감율을 자랑하고 있지요.

  • deulpul 2011/10/03 08:18 #

    plea bargain 역시 일장일단이 있는 제도지만, 공정한 사법 체계라는 점에서 문제가 많고 그래서 항상 논란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 <링컨 변호사(Lincoln Lawyer)>에서 나왔던 장면,

    변호사: 자, 검찰에서 이런 제안을 해 왔다. 잠깐 썩고 나오면 되는 거야. 아주 좋은 조건이다.
    의뢰인: 그런데 난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변호사: 하지만 모든 증거나 상황이 불리하잖아? 재판 가면 100% 중형이라고. 받는 게 나아.

    같은 것은 영화나 미드에서 숱하게 나오고 있고, 또한 현실이기도 하죠.
  • 인형사 2011/10/03 13:27 #

    Plea bargain에 대한 저의 지식은 다음에 근거하고있습니다.

    http://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plea/

    저의 판단으로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하는 원님재판에 다름이 없는 것 같더군요.
  • deulpul 2011/10/03 15:44 #

    풍부한 정보가 담긴 링크 고맙습니다. 시간 날 때 꼼꼼히 살펴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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