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일 위험할 때는 누가 날 섞일雜 끓일湯 (Others)

홀로 사시는 어머니가 가끔 농반진반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다. 본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다른 사람이 알 수가 없으리라는 게 걱정되신다는 거다. 그래서 주무실 때 현관 문의 자물쇠들 중 하나를 열어 놓으신단다. 혹시라도 밖에서 강제로 문을 열어야 하는 상황일 때 좀 쉬우라고.

한국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혼자 사는 노인들이 목걸이처럼 차고 있다가, 위급한 순간에 누르면 구조 회사에 직통으로 연결되는 응급 대비 서비스를 팔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이런 비용을 감당할 만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옵션이고, 그런 시스템이 아예 없는 곳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외로울 때는 누가 날 위로해 주지? 외로움은 강단(剛斷)으로 돌파할 수 있다. 내가 만일 위험한 상황일 때는 누가 날 구출해 주지? 여러분? 그러긴 쉽지 않다. 이건 노소 막론하고 몸과 마음을 기댈 사람 없이 혼자 사는 많은 이의 은근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5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가파르게 증가한 가구 형태는 홀로 사는 1인 가구이다. 올 7월에 나온 2010년 센서스 통계 보도에 따르면 1인 가구는 23.9%다. 네 집 중 한 집이 1인 가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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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27시간>은 실화를 영상으로 옮긴 작품으로, <트레인스포팅>과 <슬럼독 밀리어니어>를 감독한 대니 보일이 만들었다. 영화에서 주인공 애런 랄스턴(사고 당사자의 실명이기도 하다)은 주말에 홀로 유타 주의 캐년에 하이킹을 갔다가 바위에 팔이 끼어 꼼짝달싹 못하는 사고를 당한다.

팔을 빼고는 크게 다친 곳이 없지만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대로 있다가는 어떤 형태로든 죽을 것이다. 오가는 사람 없는 광막한 사막 골짜기의 좁은 틈바구니에 갖힌 그를 누가 구출해 줄 것인가. 그가 여기에 하이킹을 왔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기억한다면, 그나마 구출될 가능성이 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절망적인 현실을 깨닫게 된다. 혼자 사는 그는 자신이 어디로 하이킹을 가는지, 그 목적지를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그는 떠나기 전날, 여행 안내서의 지도를 복사하며 사무실의 동료와 건성으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동료: 어디로 갈 건데?
애런: 아직 몰라. 아마 유타? 아니면 딴 데 어디.
동료: 잘 다녀 와.
애런: 응, 언제나 그렇지.

하지만 애런은 지도를 복사할 정도로 이미 행선지를 정해두고 있는 터였다. 만일 애런이 동료에게 지도라도 잠깐 보여 주었더라면, 그가 구출될 가능성은 조금 커졌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자신이 있는 사람은 흔히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닷새 동안 꼼짝 못하고 갇혀 있던 애런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하여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구출된 것은 아니다. 혼자 나가서 혼자 조난 당하고, 탈출도 혼자 힘으로 한다. 그러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엄청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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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의 데이빗 라보(67)가 처한 현실도 영화와 비슷했다. 은퇴한 케이블 회사 직원인 그는 지난 9월23일, 홀로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계곡으로 하이킹을 갔다. 돌아오는 산길은 일찌감치 어두워졌다. 심한 커브길을 도는 도중, 마주 오던 차에서 강한 빛이 쏟아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시각을 잃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그의 차는 도로를 벗어나 60미터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차는 요동치며 한참을 떨어지다 암석 바닥에 처박혔으며, 라보는 의식을 잃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해가 계곡 사이로 떠오르고 있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팔과 갈비뼈가 부러지고 어깨도 탈구된 상태였다. 그 상태로는 수십 미터 절벽을 기어오를 수 없었다. 우리 생각으로 하면, 기어서라도 무작정 계곡을 따라 가면 인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자연 환경의 스케일이 다른 미국에서는 조난 중 헤메다 오히려 죽는 일이 드물지 않다.

더 절망적인 일이 있었다. 추락해서 다 부서진 라보의 토요타 코롤라 바로 옆에 먼저 와서 부서져 있는 차가 있었으며, 이 회색 캠리 안에는 놀랍게도 한 사람이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라보는 이 계곡에서 엿새를 버텼다. 벌레와 나뭇잎을 씹어 먹고 시냇물을 마셨다. 밤에는 차에 들어가서 체육관용 타월을 덮고 눈을 붙였다. 낮에는 밖에 나가 절벽 위를 향해 소리쳤다. 가끔씩 차가 오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수십 미터 아래에서 외치는 소리가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동차에 전달되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그는 갈수록 탈진했고 구출될 희망은 점점 사라졌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데이빗 라보가 유타의 애런 랄스턴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라보에게는 항상 연락을 취하는 가족이 있었다는 점이다.

라보 역시 혼자 살고 있었지만, 그는 장성한 자녀들과 빈번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주말 동안 아버지에게 전화가 되지 않았으나, 자녀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가 주말이면 늘 어딘가로 짧은 여행을 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요일이 될 때까지 연락이 없자, 이들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내었다. 경찰은 신고를 처리하는 데 며칠이 걸린다고 말했다. 라보의 자녀들은 그렇게 편하게 기다릴 수 없었다.

아들 션은 즉시 누이들과 그 남편들을 비롯한 친척을 소집하여 아버지를 찾는 수색 작업에 돌입했다. 아버지의 신용카드 회사에 연락하여 마지막으로 쓴 곳을 점검하고, 휴대 전화 회사에는 마지막 통화한 곳을 문의했다. 아버지의 의사와도 연락을 취해 혹시 긴급 연락을 받았는지 알아보았고, 아버지가 잘 다니던 체육관도 점검했다.

라보의 가족은 목요일에, 라보가 마지막으로 휴대 전화를 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갔었는지 목적지가 확인되었다. 그 목적지로 이르는 길은 두 개였다. 가족들은 그 중 가능성이 더 높은 길을 선택해 수색에 나섰다. 7, 8명이 자동차 세 대에 나누어 타고 산길을 서행하며, 위험스러운 지점마다 내려서 절벽 아래를 점검했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 가족 수색대는 한 지점에 이르렀다. 경고 표지판도 없는 급커브 지역이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는 아들 션의 귀에 누군가 나즈막하게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분명히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절벽 가까이 다가선 그는 아득한 아래로 깡통처럼 찌그러진 아버지의 파란 색 차를 볼 수 있었다.

라보는 이렇게 구출되었다.

경찰 조사 결과, 옆의 회색 자동차는 라보가 추락하기 두 주 전에 비슷한 경로로 절벽으로 추락한 자동차로 파악되었다. 차 안에서 썩어가던 운전자는 88세의 멜빈 겔펀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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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에서 조난을 당한 애런 랄스턴은 하이킹을 떠나는 바로 그 날 새벽에 누이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배낭을 챙기느라 바빴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누이의 목소리는 그저 자동응답기에 녹음되었을 뿐이다. 그녀는 "애런, 또 나야"라고 말한다. '또'라는 한 단어가 의미심장하다. 누이의 전화는 "엄마에게 전화 좀 해. 너를 걱정하신단 말야"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애런은 사고로 고립되어 있는 동안에, 얼마 전에 받았던 어머니의 전화도 떠올린다. 엄마는 "거기 있니? 없어? 전화 좀 해라. 사랑한다" 하고 자동응답기에 대고 말했었다. 애런은 그 때도 옆에 있었지만 이것저것 하느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래 두 이미지 중 위의 것은 구출되어 병원에 누워 있는 라보와 그를 구출한 가족들이고, 아래는 조난을 벗어난 뒤 재활 운동을 하는 애런의 눈 앞에 등장한 가상의 가족과 친구들 모습이다. 이미지에서 라보는 가족 속에 묻혀서 그들과 동화되어 있고, 애런은 상대편에 서서 가족과 친지를 바라본다. 그들은 애런을 따뜻하게 맞아 주는 모습이지만, 애런과 그들 사이에는 공간적 거리가 있다.





나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데이빗 라보나 애런 랄스턴의 개인적인 상황이나 성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과 영화에서 사용한 공간 구조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운명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를 보여드리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대비는 물론 인간의 심리를 3차원 공간으로 재해석한 영화의 탁월한 공간 구성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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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27시간>은 다음과 같은 자막과 함께 끝난다:

"애런은 3년 뒤 아내 제시카를 만났다. 2010년 2월에는 아들 레오가 태어났다. 그는 등산과 계곡 여행을 여전히 계속한다. 이제 그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적은 쪽지를 항상 남겨 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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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당하여 구출될 희망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려고 애를 쓴다. 애런은 갖고 간 비디오 카메라에 개인의 인적 상황과 사고 경위, 가족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녹화해 담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추락한 라보는? 희망을 잃고 죽음을 예감했을 때, 그는 부서진 자기 자동차의 트렁크 먼지 위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사랑한다, 아이들아. 옆 차에 죽어 있는 사람은 내 탓이 아니란다. 아빠가."

라보가 아들에게 구출되지 않았다면 이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을 것이다. 비장한 장면인데도, 웃음이 난다.


※ 영화 포스터: 위키, 애런 랄스턴 실제 이미지: 1440, 데이빗 라보의 추락 현장 및 그와 가족 사진: 허핑턴포스트, 애런의 가족과 친구들: 영화 이미지 캡쳐.

 

덧글

  • GT 2011/10/06 01:37 # 삭제 답글

    제가 자본주의의 앞잡이라던가 GM의 개라는 오해를 받아도 슬픈 일이지만...

    GM에 OnStar라는 텔레메틱스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 시스템의 주요 기능중 하나가 "사고 발생시 중앙센터로 연결" 이라는 기능입니다.

    다이하드 4에서 쓰레기통으로 범퍼를 후려치고 연결된 중앙센터에 빌어서 (...) 시동을 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기자가 시승중에 과격한 주행을 했더니 중앙센터에서 연락이 오곤 했었다는데요...

    ... 한국에서는 아무리 험한 협곡이라고 해도 저런 일은 일어나기 비교적 어렵습니다만, 미국이라면 저런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백만대 이상 팔리는거겠지요. 한국에서도 같은 시스템을 팔고는 있습니다만 끔찍할 정도로(...) 팔리질 않습니다.
  • deulpul 2011/10/06 02:34 #

    아, 그런 시스템이 있었군요. 말씀 듣고 찾아보니 꽤 활성화되어 있고, 올 7월부터는 OEM뿐만 아니라 리어뷰 미러에 장착되는 형태의 추가형 시스템도 판매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5백만 명 이상의 서비스 가입자를 갖고 있다는군요. 정보의 집적과 프라이버시 보호 부분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것 같지만, 유사시에 대비한 비상 대응책으로서는 아주 효과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고가 벌어진 뒤 온스타 같은 시스템 덕분으로 큰 화를 면한 사례도 이미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본문에 쓴 것과 같은 극적인 스토리가 나오지 않았을 테니 보도가 안 되었을 뿐이었겠지요. 아니, 그런데 맨 앞에 쓰신 것은 웬 사족입니까, 하하. 이노베이션이 나오는 것도 바로 거긴데요...
  • Ha-1 2011/10/06 12:06 # 답글

    가카를 욕하면 국정원에서 달려오...

    개인 정보 침해가 이슈화가 되는 시대에 고독의 위험
  • deulpul 2011/10/06 12:46 #

    오오 국가가 보증하는 한국형 텔레메틱스 시스템... 은 농담이고요, 정말 개인 정보가 씹다 버린 껌처럼 취급되는 시대에는 제발 좀 고독하게 살게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 2011/10/06 13:4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10/07 01:56 #

    네, 주로 실용주의적 목적에서 형성되고 관리되는 이른바 인맥과는 달리, 1차 집단에 해당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심리적 안전망 같은 역할을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속감이라는 게 어찌 보면 인간의 원초적 욕구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잘못 나가면 우리가 남이가로 전락...
  • 민노씨 2011/10/09 02:26 # 삭제 답글

    흥미롭고 깊이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재료에 대한 꼼꼼한 조사와 분석도 탁월하지만, 그 안에서 끌어내는 들풀님만의 이야기에 더욱 감탄하게 됩니다. 이 글 읽고 어떤 글이 자연스레 연상됐는데요. 오래전 들풀님께서 쓰신 <두 얼굴의 테레사 수녀> ( http://deulpul.net/1673840 )죠. : ) 제가 관련글을 쓰기도 했더군요. 들풀님 덕분에 까먹고 있었던 제 글도 읽고, 또 들풀님의 글도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네요.

    말미에 소개하신 <127>의 그 장면을 한참 바라보니, 애런의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시선)은 타원형의 완만한 원을 구성하면서 애런을 바라보지만, 애런은 그 타원의 텅 빈 가운데를 바라볼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들풀님의 멋진 글 덕분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추.
    1. 며칠 전엔 윤호씨(블로거이자 유저스토리랩 대표)께서 들풀님 블로그를 최근에야 접하셨는지(!?), '어떤 블로그를 접하고(물론 들풀님 블로그) 나도 블로그를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취지로 트윗을 날리셨는데, 그 트윗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습니다. ㅎㅎ

    2. 제가 내일부터 박래군 선생님(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권운동가시죠)의 '천리길' 프로젝트를 동행취재할 예정입니다. 제주 강정마을이 첫번째 목적지죠. 인권센터 만들기 후원을 위한 목적도 겸한 프로젝트인데, 원래는 미디어오늘 이정환 기자께서 동행하기로 했다가 피치못할 사정이 생겨 제가 대타로 가게됐네요. 박래군 선생님께서 전국방방곳곳 대한민국의 모순과 비합리가 응축된 공간들을 찾아가 그 곳에서 그 모순에 저항하고, 싸우는 사람들과 대담하는 형식인데, 저는 그 대담을 취재하고 정리하는 역할이죠. 아직 특별히 형식을 고민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제 욕심으론 그 대담 취재와 별도로 제 체험을 글로 쓰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정환씨는 물론이고, 들풀님께서 동행취재한다면 참 멋진 글이 나올텐데..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이번 동행취재에 대해선 아거님을 비롯한 인주찾기 벗들께도 종종 조언을 구할 생각인데, 들풀님께서도 짬이 허락하시면 조언을 들려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물론 제가 게을러서 조언을 부탁드릴 짬을 제가 못낼 수도 있겠지만요... ㅡ.ㅡ; 더불어 며칠만 할지 길게 할지도 모르겠구요.. 암튼 그래서 말인데요. 가끔 제가 조언을 구할 수 있도록 이메일을 좀 알려주실 수 없을는지요? 온라인상으론 이메일을 공개하지 않으신 듯 해서요. 제 이메일은 skymap21@gmail.com 입니다.
  • deulpul 2011/10/10 12:08 #

    옛날 글을 일깨워주신 덕분에 잠깐 옛추억(?)에 잠길 수 있었습니다. 저 테레사 수녀 표지는 저로서는 아주 인상적이어서, 당시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할 때 PPT 슬라이드로 집어 넣기도 했었습니다.

    "까먹고 있었던 제 글"이라는 말씀은, 제가 늘 갖고 있는 두 가지 생각을 상기하게 합니다. 하나는 뭘 쓸 때, 비슷한 글을 전에 이미 쓴 것 같다는 블로깅적 기시감(?)에서 오는 두려움, 또 하나는 우연히 옛날 글을 보면서 '이게 정말 내가 쓴 게 맞는가'하는 (주로 부정적인) 놀라움인데요... 저처럼 쓸데없이 양산형 글을 쓰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병통이지요.

    간혹 민노씨가 이 블로그로 링크를 해 두시면 방문자 수가 일시적으로 폭증하는 현상을 볼 수 있어서 '민노씨 효과'가 무섭구나 하는 경험을 생생하게 합니다. 윤호님과 같은 분들이 인연이 되어 이 산간오지를 찾아 오시는 것은 민노씨를 비롯한 많은 분이 링크나 트위터 등으로 소개를 해 주시는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리길 프로젝트'는 말씀만 들어도 기대가 되고, 함께 하신다는 점이 참 부럽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작업 생각을 늘 하고 있고, 제가 죽기 전에 언젠가 한번 실행해 볼 기회가 꼭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늘 새기고 있는 말 중에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1986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이 한 말,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기억이다. 홀로코스트의 마지막 생존자는 언젠가 사라지게 마련이며, 그러면 역사는 바뀌게 된다. 그러나 목격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 역시 목격자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가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역사의 산 증인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바쁜데, 그런 점에서 계획하고 계시는 프로젝트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성과를 거두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혹시 미력하게나마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이메일은 이 곳 아이디(deulpul)에 지메일입니다.
  • 민노씨 2011/10/11 04:39 # 삭제 답글

    역시 들풀님이십니다. : )
    지금 강정마을 어느 숙소(바다와 섬..이란 이름을 가진) 로비에서 답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틀동안 정신없이 이동하고, 또 보고듣느라 정작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네요.
    원래는 하루에 하나 이상의 글을 써야 하는데 말이죠.
    실은 글 셋을 쓰긴 했습니다만, 천릿길팀(저는 지금껏 천리길이라고 알았는데, '천릿길'이더군요. ㅡ.ㅡ; ) 자체의 내부 편집회의(ㅎㅎ)를 통해 검토해보니 글 자체도 너무 무겁고, 또 취지도 명확하지 않다는 결론(ㅡ.ㅡ;;;)에 이르러서, 저 개인적으론 제가 쓴 글이 개똥이든 황금똥이든 간에 나만 좋으면 장땡이라는 신조로 살았지만, 저 스스로도 개똥인 것 같아 글을 새로 써야 하나 고민중입니다. 한국시각으로 지금 4시 30분쯤인데 글은 안써지고, 이런저런 잡념만 떠오르네요. 그동안 글을 평균 이상은 쓴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근거없는 오만이었나 싶습니다.

    엘리 위젤은 아주 어릴 적, 지금은 제목도 내용도 기억도 나지 않는 '소설'로 접한 적 있는데요. 들풀님 같은 탁월한 목격자 덕분에 다시 목격되는군요. : ) 인용도 때론 고도의 편집행위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들풀님의 인용을 염치 없이 재인용하는 게 솔직히 아주 민망합니다만, 천릿길 글을 다시 쓴다면, 들풀님께서 떠올려주신 엘리 위젤의 그 문장들을 재인용하고 싶습니다. 물론 넉넉하게 이해해주리라 기대하며... 종종 메일로 조언 구할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 deulpul 2011/10/13 09:56 #

    네, 물론입니다. 원래 제 것도 아닌데요. 저도 지가 좋아 쓰는 글은 잘 나오는데, 시켜서 쓰는 글은 잘 밀어지지가 않습니다. 스타일의 차이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부담감 팍팍 갖고 애면글면하며 써 놓은 게 나중에 보면 더 괜찮은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동하고 취재하면서 매일 하나씩 써 내신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상당히 무거운 임무가 아닐까 싶네요. 힘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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