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에나떼 속을 지나는 사슴 중매媒 몸體 (Media)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남자들만 우글대는 곳에서 보냈다. 고등학교 때 동아리 일 때문에 다른 학교를 찾아가야 할 일이 종종 있었다. 이것은 동아리에서 섭외 일을 담당한 학생의 임무이자 특권이었다. 특권이기도 한 것은, 일을 빙자해서 여학교를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 팀에 속하게 되었다.

다른 학교를, 더구나 여학교를 무작정 마구 찾아가면 안 된다. 일 때문에 방문함을 입증하는 이른바 공문(公文)이 필요하다. 그래야 여학생을 꼬시러 왔다는 오해를 피할 수 있다. 공문은 우리 동아리의 지도를 맡고 있는 선생님 명의로 작성되는데, 그 직인이 찍혀야 한다.

하지만 그 직인은 우리가 보관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일일이 찍기가 귀찮으니까 너희들이 필요할 때 알아서 쓰라고 맡겨 주셨다. 따라서, 우리가 방문하고 싶은 학교 리스트를 만들어서 이에 맞게 공문을 직접 만들고 선생님의 직인을 찍는다고 해도 공문서 위조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오호 쾌재라. 하지만 우리는 양심껏 썼다. 여학교를 너무 찾아다니면 소문이 나서 값이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선배한테 교육 받았다).

여학교를 찾아가서 비슷한 성격의 동아리 학생들을 만나려면 몇 개의 관문을 지나야 한다. 첫 번째는 수위실을 돌파하는 것이다. 공문을 보이면 수위 아저씨들은 대개 아래위로 한번 훑어보고 전화를 걸어 보고 통과시켜 주신다. 하지만 까다로운 분들도 있다. 이 분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방문 목적이 뭔지, 얼마나 있다 가는지 등을 마치 취조하듯 꼬치꼬치 캐묻는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명색 섭외팀이 아닌가.

한 아저씨는 내키지 않으신 듯 우리를 들여 보내면서 이렇게 일갈했다. "헛물 켜지 마, 자식들아. 다 너희 형수님 될 사람들이야."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우리 동년배 여학생들은 대개 나중에 우리 형수님들이 되어 있을 거였다. 하지만 요즘처럼 동갑이나 연하 커플이 많아지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지.

수위실을 통과하면 이보다 더 어려운 2차 관문이 남아 있다. 기집애(죄송)들의 야유다. 우리가 찾아가는 시간은 주로 점심 시간이나 일과가 끝난 직후이기 때문에, 얘들이 지들 맘대로 놀 수 있는 시간이다. 솜털 막 나기 시작하는 애송이 고딩이라도 남자는 남자인지, 교정을 가로질러 가면 어떻게들 알고 창문에 붙어서 별별 야유를 다 보낸다. 1대1로 마주 앉으면 찍소리도 못할 것들이 우르르 모여 흰소리들을 하는데, 그 수위가 짓궂은 남학생들 저리 가라다. 이거 상당히 곤혹스럽다. 여학교 운동장은 진짜 넓다.

거꾸로, 여학교에서 방문을 올 때도 있다. 이 경우는 수위실로부터 연락을 받고 에스코트를 나간다. 당연히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야유, 농담, 휘파람... 이번엔 남녀 역할이 바뀌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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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보기만 해도 정말 안쓰럽다.

한 젊은 여성이 거리에서 빈둥대는 남성들 사이를 지나간다. 남학교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남성만 모여 있는지. 열 다섯 놈(죄송)이 있는데, 그 중 하나만 빼고 나머지가 모두 이 여성을 쳐다본다. 절반은 마치 이방인을 바라보듯 딱딱한 눈길이고, 나머지 절반은 야유나 휘파람 분위기다. 여성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외면하고 걷고 있다.



이 사진은 1951년 8월21일에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한 거리에서 찍힌 것이다. 사진의 주인공인 여성은 미국인 징크스 앨런이다. 당시 23세였던 그녀는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뒤, 자유로운 생활을 찾아 이탈리아로 건너와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여류 사진가인 루스 오킨(Orkin)이다. 그녀 역시 미국인이다. 이탈리아로 사진 작업을 하러 왔던 오킨은 동료 미국인인 앨런을 만나 잠시 친구가 된다. 둘 다 이방인이었고 둘 다 여성이었으며, 둘 다 홀로였다. 오킨은 앨런과 만난 다음날 오전, 그녀가 이탈리아 도시의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을 찍었다. 위의 사진은 그 중 하나이며 가장 유명한 것이기도 하다. 뒤에 이 사진에는 '이탈리아의 미국녀(American Girl in Italy)'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사진은 1951년에 만들어 진 뒤, 오랫동안 큰 주목을 받지 않고 잊혀지다시피 했다. 사진이 다시 세상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여성주의의 확산 덕분이었다. 이 사진은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력한 여성이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이 되었다. 대학 기숙사 방 곳곳에 이 사진이 포스터가 되어 걸렸다. (이 포스터는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사진은 피억압 여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맥락으로 해석되어 부활했지만, 사진 속 여성의 현실은 사실 그렇게 고달픈 것은 아니었다. 사진의 주인공 앨런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여성 해방의 맥락으로 해석되어 인기를 끄는 일을 낯설어 했다고 한다. 올 8월에 잡지 <스미소니언>과 가진 인터뷰에서, 앨런은 자신이 유럽에 있는 동안 시달림을 받아 불쾌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또 사진 속의 표정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자신이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베아트리체처럼 고귀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남성들이 집적대는 상황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이탈리아에서 젊은 시절의 잠깐을 보낸 앨런(나중에 이름이 니날리 크레이그로 바뀌었다)의 일생은 유복했다. 그녀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광고회사에서 일했으며, 베네치아의 한 백작과 결혼하여 백작부인이 되었고, 그와 이혼한 뒤 이번에는 캐나다의 철강회사 사장과 결혼했다. 평생을 유복하게 살아 온 그녀는 핍박 받는 여성의 처지는 잘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하고 유복하게 살아온 노인으로서, 젊을 때 이탈리아에서 한 경험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이 사진이 이렇게 절묘하게 찍힌 것은 절반쯤 연출된 덕분이기도 하다. 사진가 오킨은 앨런이 이 거리를 걷는 동안 사진을 찍어 본 뒤, 그림이 잘 나올 듯 해서 한 번 더 같은 곳을 걷도록 시켰다. 이 사진은 이렇게 해서 두 번째로 찍을 때 잡힌 장면이다. 남성들이 왜 일제히 앨런을 주목하고 있는지가 납득이 된다. 사진을 보면서 당연히 드는 또다른 의문, 즉 사진가도 여성인데 왜 사진을 찍는 여성을 쳐다보는 남성은 아무도 없나 하는 의문에도 대답이 있다. 오킨은 스쿠터에 앉아 있는 남성을 통해, 거리의 누구도 자신의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해 두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사진 속 장면은 순수한 진실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사진이 찍히는 것을 잘 아는 남성들은 과장된 몸짓을 보였을 수 있고, 가운데의 앨런은 마치 배우가 연기를 하는 듯한 기분으로 찍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사진은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오킨이 <라이프>를 비롯한 보도 매체에 사진을 싣던 포토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논란은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많은 사진가가 이 사진을 '연출된 사진'으로 보고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남성 중심의 사회나 유럽의 배타적 국수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으로 해석되는 측면을 고려하면 이러한 연출은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사진은 그것이 촬영되던 당시의 상황과는 다른 맥락으로 해석되고 상징화되면서 유명해졌다. 소설이 독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소설가가 결정할 수 없듯이, 사진이 어떻게 해석될지를 사진가가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은 누구의 것인가. 찍는 사람의 것인가, 찍히는 사람의 것인가, 아니면 이를 해석하는 사람의 것인가. 사진에 숙명적으로 따르게 마련인 의문을 잘 보여주는 사진이랄 수 있겠다.

※ 이미지: Ruth Orkin Photo Archive

[덧붙임] (2012년 5월1일) 세부 사진 추가

 

덧글

  • 2011/10/17 21: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10/18 04:31 #

    아니 아저씨는 너무했네요, 하하. 오빠라고 했으면 손목을 잡고 체육관에 데려다 주었을 것을... 중고 6년을 비슷한 격리 생활을 한 사람들이 많아서, 고교 문을 나서면 대학이든 학원이든 낯선 사람들이 존재하는 새 세상에서 재사회화 과정을 거치느라 고생들 했습니다. 오해도 많이 하고... 사회에 대한 인식과 이성에 대한 인식이 동시에 밀물처럼 밀어닥쳐서 버거워하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 겨우 적응될 만하면 다시 군대...
  • 라피에사쥬 2011/10/18 21:57 # 답글

    체 게바라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 유명한 명언이 실제론 그가 남겼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음에도 그의 신념과 철학을 상징하는 문구로 끝도 없이 재생산되는 현상이 떠오르는 군요. 이제는 설령 진실을 알아도 체가 역사에 남긴 족적을 살펴볼 때 그 명언을 한번쯤은 떠올리게 되니 인물도, 사건도 그 특성이 외부에 어떤 영향을 남기고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쉽사리 알 수 없는것 같습니다.
  • deulpul 2011/10/20 07:19 #

    그런 셈이지요. 특히 사진의 경우는 드러난 그대로의 메시지와 그 안에 담겨서 보는 사람이 해석과 작용하는 메시지가 동시에 들어 있는 이른바 '사진의 역설'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은 사진을 놓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여지가 생기는 모양입니다.
  • MCtheMad 2011/10/19 03:32 # 답글

    왠지 요즘 감성으론 남성의 불쌍함이 보이는 듯도 하네요
  • deulpul 2011/10/20 07:21 #

    상당히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사실 막사 옆을 지나는 여인네를 보면서 휘파람을 부는 군인들은, 여인이 지나가고 나면 모두 스스로 불쌍해지지요...
  • 2011/10/20 21:0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1/10/21 07:06 #

    '군복 + 심리'와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도 관계하지만, 그보다는 '군복 = 행동'과 같은 기계적 매커니즘에 좀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뻘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빨간 구두 = 춤'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 남승일 2012/05/02 01:40 # 삭제 답글

    오늘 어떤가게에서 이 사진을 보고 갑자기 끌려서 웹검색을 하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뒷애기가 있었군요. 하지만 전 그 순간에 그 느낌이 이렇게 남아있는 이사진이 너무 끌립니다.^^
  • deulpul 2012/05/02 03:03 #

    네, 사진 자체가 매우 매력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요. 저도 작게 프린트하여 책상 앞에 붙여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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