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있으면 길도 있어야 한다 때時 일事 (Issues)

미국에서 올해 들어 재정 긴축을 명분으로 하여 공공 노조의 단체협상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은 여러 주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작년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이 약진한 결과로 벌어지는 일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로 공화당이 주 정부와 주 의회를 장악한 곳에서, 노조에 불리한 이른바 노조 파괴 법안을 제정하는 형태로 벌어진다. 공화당 소속 주지사가 밀어붙이면 공화당 다수인 주 의회에서는 통과되게 마련이므로 법안 통과는 기정사실에 가깝다.

이러한 기정사실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변수는 주권자인 시민이다.

그리고 미국 주권자인 미국 시민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지금 위스콘신에서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주지사를 갈아치우기 위한 소환 운동이 벌어지는 중이다. 그에 앞서, 오하이오에서는 주지사가 밀어붙여 통과한 문제의 법안에 대한 주민투표를 요구하여, 11월8일에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주민투표에서 오하이오 주민들은 이 법안을 뒤집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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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 방송 폭스뉴스 진행자 출신인 존 케이식(John Kasich) 오하이오 주지사는 작년 11월 선거를 앞두고 유세할 때부터 노조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다. 특히 교사 노조 등 공공 부문 노조에 대해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주지사에 취임한 뒤 그는 공화당 상원의원들과 협의하여 공공 노동자들의 파업권과 단체협상권을 제한하는 입법안을 만들었다. 법안에는 Senate Bill 5(SB5)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하이오의 공공 노동자 40여 만 명이 이 법안의 영향을 받게 될 처지였다.

올해(2011년) 3월2일에 이 법안은 야당과 주민의 반대 속에 상원을 17 대 16으로 통과했다. 공화당은 주 상원 의석 33석 중 23석을 갖고 있었지만, 공화당 의원 여섯 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법안은 한 표 차이로 상원을 통과하고, 3월30일에는 53 대 44로 주 하원을 통과했다. 케이식 주지사는 바로 다음날 법안에 서명하여 법안을 확정시켰다.

SB5가 입안되고 의회에서 통과되는 동안 오하이오 주민들이 벌인 치열한 반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SB5는 공화당과 티 파티가 주도하는 가운데 법안으로 최종 통과되어 버린 것이다.

오하이오 노동자와 주민들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법안을 주민투표에 회부하는 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하이오에서 이미 통과된 법안을 주민투표에 붙이려면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1) 우선 주민투표 절차를 개시하기 위해서는 주민의 예비 서명이 필요한데, 이에 필요한 서명 수는 1,000명이다. 2) 예비 서명이 이루어지면 법안이 통과된 날로부터 90일 동안 일정한 수의 정식 서명을 받아야 한다. SB5의 경우 231,149명의 서명이 있어야 주민투표가 성립할 수 있었다. 이 숫자는 전해 주지사 선거 때 투표에 참여한 사람의 6%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오하이오 주민의 SB5 폐지 운동(즉 주민투표 회부 운동)은 주지사의 사인을 통해 법안이 생명력을 갖게 된 바로 그 시점부터 즉시 시작되었다. 주지사가 법안을 통과시킨 바로 다음날, 필요한 서명의 세 배인 3,000명의 서명이 모아져 주 정부에 제출됐다. 주민투표 절차가 개시됐다. 남은 일은 석 달 동안 23만 명의 서명을 받는 것이었다.

주민투표 회부를 위한 서명 운동은 한 시민단체(We Are Ohio)를 중심으로 하여, 노조와 사회 단체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오하이오 전역에서 줄기차게 지속되었다. 서명 기간의 절반 정도가 지난 5월20일 경, 필요 서명 수에 근접한 21만 명분의 서명이 확보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서명 검사에서 무효로 판정될 수를 고려하면 실제 서명은 훨씬 더 많아야 했다. 실제 서명 21만, 혹은 23만은 주민투표를 무산시키는 숫자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서명 운동은 가속이 붙었다. 운동원들은 헌신적으로 거리에 나섰고, SB5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서명했다.

주민투표 추진측은 서명 마감일을 하루 앞둔 6월29일에 주 정부에 최종 서명부를 제출했다. 모두 1,298,301명의 서명이 담긴 명부였다. 필요 서명수인 23만명보다 무려 1백만 명이나 많은 사람이 서명한 셈이었다. 오하이오 사상 이렇게 열렬한 지지를 받은 주민투표 운동은 일찌기 없었다.

서명에 대한 주 정부의 확인 절차가 시작되었다. 각 카운티에서 표본 추출하여 조사한 결과, 70.5%인 915,456명분의 서명이 유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주민투표는 확정되었다.

이러한 험난한 과정을 통해 11월8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SB5는 주민의 심판대에 올랐다. 그리고 투표에 참여한 오하이오 주민 중 61.3%가 반대표를 던졌다. 반대자 수는 2,145,042명이었다. 공화당 주지사와 의회가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통과시킨 이른바 공공노조 파괴법은 주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즉시 무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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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이 밀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미 FTA를 놓고 분노하거나 허탈해 하는 국민을 보면서, 오하이오와 위스콘신을 생각한다. 두 곳 모두 주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법안을 일부 정치세력이 억지로 밀어붙이다 좌절하거나 역풍을 맞고 있는 사례다. 이슈는 다르지만 그 갈등의 얼개에서 한국의 지금 상황과 비슷한 점이 있다. 동시에, 주권자인 주민(국민)에게 주어진 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쉽지 않을 수 없다. 뜻만으론 안 된다. 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없다.

미국의 두 곳 주민에게는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비록 그 길이 험하고 힘들지라도 다수의 뜻과 힘을 모으면 이를 당장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정당한 길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닥치고 다음 선거까지 기다려' 같은 하나마나한 소리나 하며 하품하고 있지 않아도 된다.

왜 하나마나한 소린가? 법안 통과되어 시행되면 일단 게임 끝난다. 미디어 악법 기억나시는가? 국민의 절대 다수가 반대한 법안, 날치기로 통과한 법안, 그거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가. 4대강, 그건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가. 법안과 정책에 반대한다면, 자생성을 갖지 못하도록 초기에 틀어막아야 하는 것이다. 날치기 국면은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목적인 날치기 된 법안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날치기파의 반대쪽 정파에게만 정치적 과실을 안겨주는 어이없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아슬아슬한 이벤트다.

위스콘신과 오하이오는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주권자인 주민 선에서 끝낼 수 있는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하이오는 주지사를 소환하여 목을 날려 버리는 제도가 없다. 이 주는 소환 투표 제도를 채택하고 있지만, 주지사 같은 주 공직자나 연방 의원은 소환 대상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대신, 주민들이 법안을 제출하거나 정부와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부결시킬 수 있는 주민입법 및 주민투표 제도가 있다.

반대로 위스콘신에는 주민투표를 통해 이미 통과된 법안을 무효화시키는 제도가 없다. 하지만 대신, 주민이 반대하는 법안을 밀어붙이고 통과시키는 주지사나 주 의원들을 소환하여 추방할 수 있는 주민소환 제도가 있다.

이렇게 어떠한 형태로든 주민이 직접 정책에 참여하고 뜻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이런 길을 갔거나 가고 있다.

한국은 이런 길이 모두 막혀 있다. 한국은 국가 차원의 정책에 대해 국민의 뜻을 묻는 국민투표 제도가 있지만, 이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통령뿐이다. 또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회의원조차 소환할 수 있는 제도가 없으며, 오로지 선출직 지방 의원과 공직자만 소환할 수 있을 뿐이다.

존 F. 케네디는 1962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평화로운 혁명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자들은 폭력 혁명이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다." 어디 혁명 뿐이겠는가. 국민의 뜻이 평화롭게 소화되어 정책에 반영되는 길이 틀어막힌 곳에서 국민에게 주어진 길은 좌절하거나, 거리에 나가 좌절하면서 싸우거나, 싸우다가 좌절하는 것뿐이다. 반대자들의 좌절 아니면 희생만을 강요하는 정치 구조란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음 선거가 비교적 근접해 있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이 선거로, 기왕에 통과된 조약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선되면 뒤집겠다는 선언이라도 받고 나서 지지해야 할까.

 

덧글

  • BigTrain 2011/11/24 09:27 # 답글

    한국으로 치면 도지사인 주지사와 조례급인 주입법안과 대통령/국제조약은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 칠칠이 2011/11/24 09:50 # 삭제

    본문글은 국민의 직접참정이 불가능한 시스템에 대한 불만인거지, 조례 개정 시스템을 바꾸자는 것은 아닙니다.
  • BigTrain 2011/11/24 09:51 #

    미국에 국민들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통하지 않고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법률을 날려버리는 제도가 있나요? 있다면 해당 제도를 예로 들어야 할 것이고, 아니면 윗 글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과 위스콘신/오하이오주가 동렬인가요?
  • BigTrain 2011/11/24 09:53 #

    그리고, 다 아시겠지만 도 차원에서의 주민소환 제도는 한국에도 있습니다. 시도도 몇 번 됐었고요.
  • deulpul 2011/11/24 10:38 #

    당연히 그런 점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 겁니다. 한국이란 나라와 미국의 각 주가 동등한 위상으로 대응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한국의 도 단위와 미국의 각 주가 동등한 위상으로 대응되지는 않는 합중국(united states)의 특수성이 있다는 것은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경우 각 주 주민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법률들은 연방법보다 각 주법이라는 점도 고려해야겠지요. 연방에서 정한 정책들도 각 주에서 뒤집어 적용할 수 있고요. 이런 특수성 때문에 미국에는 전체(연방) 차원의 소환이나 국민투표 제도가 애초에 없습니다. 님의 논리를 이해한다고 해도, 한국에서 국회의원에 대한 소환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소환 제도의 접근과 운영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어떤 정치 단위에서 최후의 정치 과정으로서 그 주체들의 직접 참여가 보장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 구상나무 2011/11/25 17:09 # 삭제 답글

    처음 와서 글들을 찬찬히 살펴 봤는데, 좋은 정보와 소식 많이 전해주시네요. 객관적 시각을 전해주시는 듯해서 많이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합니다.
    우리나라도 실질적인 정치 참여의 길을 다양한 경로로 만들어야겠는데, 지금의 야당 정치인들은 미국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이런 정치제도에 대해서 국민에게 설명하고 설득할 의지는 별로 없는 듯합니다. 안타깝네요.
  • deulpul 2011/11/26 00:01 #

    저 역시, 오하이오에서 벌어진 일은, 미국의 일개 주의 일이긴 하지만 최근의 세계 흐름과 관련하여 그 의미나 시사점이 적지 않은데 보도가 되고 알려지지 않아서 좀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
  • 김인환 2019/08/01 17:40 # 삭제 답글

    좋은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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