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거슬러 섞일雜 끓일湯 (Others)

두어 주 전에, 겨울 치고는 날이 좋아서 오랜만에 자전거를 끌고 나가 보았다.

올 겨울은 이상하다. 이곳에 사는 동안 흰 눈에 덮이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본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올해가 그렇다. 한 해의 마지막, 꽉 찬 숫자에서 추출되는 추상적인 계절감과 눈 앞에 펼쳐진 시각적인 계절감이 도통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쯤의 시점에서 이것들은 거의 언제나 일치하여 왔으므로, 올해는 아주 예외적이고 그래서 낯설다.

나무에 잎이 다 떨어질 때쯤, 올해 안에 자전거 타고 교외를 돌 일은 더이상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 겨울이 이상한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겨울은 겨울. 나름 감고 두르고 챙긴다고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얼어죽는 줄 알았다.

포근해도 섣달이다. 포근하다는 것은 동지 섣달의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날씨 일반, 이를테면 연평균 기온의 기준으로 그렇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눈에선 눈물이 줄줄, 코에선 콧물이 줄줄 흘렀다. 입에서까지 뭔가 흐르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즐겨 다니는 길은 한번 들어서면 죽어라 가야 한다. 풀코스를 돌아올 것인지, 대충 적당히 맛만 볼 수 있는 짧은 길을 돌아올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길을 잡기 전에 얼른 결정해야 한다. 사는 게 다 그렇다.

만만하게 봤던 난동(暖冬)의 엄혹함 때문에, 늘 다니던 코스는 일찌감치 버리고 처음 가 보는 짧은 길로 들어가 봤다. 아는 길은 중간에 포기하기가 어렵다. 모르는 길은 포기해도 마음이 좀 편하다.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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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길을 되돌아 올 때는 훨씬 수월했다. 바람을 안고 왔다가 지고 가는 모양이었다. 페달을 밟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힘든 것은 기온이라기보다 바람이었다. 자전거를 타 본 사람이라면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잘 알 것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는 경사에 아주 예민하다. 조금만 각이 달라져도 다리에 걸리는 부하가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경사는 시각적으로 인지되므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또 같은 길을 반복해 다니면 힘든 곳과 편한 곳의 가름이 생기고 이에 익숙하게 된다.

하지만 바람은 아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또 항상적인 것도 아니어서, 언제나 있기도 하고 언제나 없기도 하다. 경사가 예측 가능한 변수라면, 바람은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이고, 따라서 실제로 발생했을 때 그 충격이, 다시 말해 페달 밟기의 체감 어려움이 훨씬 큰 듯하다. 뿐만 아니라, 부하량 그 자체만으로 보더라도 바람은 경사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정면에서 불어오는 시속 40km의 바람은 5%의 경사와 맞먹는다든가(구체적인 수치는 아니다).

올 때 눈물콧물 흘리던 길이, 돌아갈 때는 늦가을의 고즈녁한 들판길 같다. 바람을 안거나 지고 다니다 보면, 바람이 세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을 얼마나 크게 바꿔 놓는지도 경험하게 된다. 등에 지고 나아갈 때, 바람의 존재는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꽤 거센 바람이라도 그렇다. 세상은 고요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곳으로 인식된다. 하릴없이 서서 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는 길 옆 나무들의 가지는 여전히 흔들리는데, 이런 모습이 아주 낯설게 느껴진다. 바람을 타고 가는 나는 바람을 느낄 수 없고, 바람에 흔들리는 주변이 낯설게 보인다.

하지만 바람을 안고 나아갈 때는 일단 귀에서부터 무지하게 시끄럽다. 헬멧에 뚫린 구멍 사이로, 또 귓가로 스쳐가는 바람 소리가 채석장 착암기 소리에 비길 만하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부하 때문에 길을 나아가기가 몇 배 어렵다. 이럴 때, 세상은 시끄럽고 험난하고 고난스러운 곳으로 인식된다. 길도 같고 그 길을 가는 사람도 같은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주위의 기류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달라 보인다. 이 차이는 극명해서, 길을 돌려 올 때 어리둥절하게 되는 일도 있다.

바람을 등지고만 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긴 쉽지 않다. 바람을 등지고만 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기도 쉽지 않다.

(...)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나는 어느 새 혼자가 되었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한때 내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낯선 사람들
나는 고향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나는 갈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
세상엔 너무 많은 길이 있어
나는 달리기 위해 살았고 살기 위해 달렸지
돈이나 빚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어

몇 달 동안 쉬지않고 총알처럼 달리기만 했어
못마땅한 규칙은 모조리 어기곤 했지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피신처를 찾아 헤매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어

바람을 피하여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어딘가
나는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피신처를 찾게 되었어

이제 그런 떠돌이 시절은 지나갔다네
이제는 생각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끝내야 할 것, 매달려야 할 것
무엇을 챙기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하지만) 바람을 거슬러
나는 여전히 바람을 거슬러 달리네
나는 이제 늙었지만
여전히 바람을 거슬러 달리네
이제 늙었지만
여전히 바람을 거슬러 달린다네
바람을 거슬러
바람을 거슬러


(밥 시거, 'Against the Wind' 일부)


강직하거나 혹은 괴팍한 노인네다. 사람들이 늙은 그를 무엇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평가하든, 바람에 훼절하지 않는 괴팍하면서도 의연한 결기가 미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이 깊은 이맘 때, 나는 이제 챙기는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절기인 동지(冬至)를 늘 마음에 꼽게 된다. 내게 동지는, 늘 변함없이 희망을 들고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동지(同志) 같은 것이다. 겨울이 언젠가 끝나리라는 것을, 겨울(冬)이 가장 깊고 성한 지점에 이르렀을(至) 때에 되새기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얼음 조각을 켜켜에 머금은 겨울의 찬바람을 강직하게 거스르며 버텨서서, 그 위력의 덧없음을 죽장 내리꽂듯 선언하는 믿음직한 동지 같은 동지. 그래서 동지가 지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제부터 해는 다시 길어진다. 지금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앞으로는 빛이 점점 자랄 일만 남았다. 적어도 6개월 동안은.

가끔 들러주시는 분들에게 새해 평화와 안녕이 함께 하기를.

 

덧글

  • 2011/12/31 19:52 # 삭제 답글

    들풀님도 새해엔 더 행복하세요~! ^-^
  • mooyoung 2012/01/01 18:24 # 삭제 답글

    새해 평화와 행운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 2012/01/01 23: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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