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콘신 1백만 서명 미국美 나라國 (USA)

미국에는 스스로 이사를 할 때 필요한 트럭을 빌릴 수 있는 트럭 렌탈 회사들이 있다. U-Haul, Penske, Budget Truck Rental 같은 회사들인데, 대표격은 역시 유홀이다. 렌탈 트럭은 일반 운전 면허증만 있으면 (그리고 물론 돈만 내면) 얼마든지 빌릴 수 있다. 트럭 대부분은 짐칸이 열려 있지 않고 냉동차처럼 폐쇄된 형태라서, 날씨에 상관없이 안전하게 짐을 나를 수 있다. 유홀(you haul, 당신이 나르슈!)이라는 이름처럼, 짐은 스스로 실어 날라야 한다.

이런 트럭들은 이삿짐뿐 아니라 크거나 많은 짐을 옮길 때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이를테면 지난 1월17일에 위스콘신의 주청사 인근 한 건물에 등장한 유홀 트럭 한 대도 이런 용도로 차용된 차였다. 보통의 유홀 트럭 옆은 이 회사를 광고하는 그림과 문구가 붙어 있다. 그러나 이 트럭에는 "WE DID IT"이라는 큰 글자가 이러한 광고글을 덮고 있었다. 무엇을 해냈다는 말인가. 이 트럭에는 주지사 스캇 워커를 추방하기 위해 위스콘신 주민들이 두 달 동안 벌인 소환 요구 서명부가 실려 있었다.

트럭을 가득 채운 서명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무려 1백만 명이었다. 부주지사와 공화당 소속 주 의원 네 명에 대한 소환 서명까지 합치면 연인원 190만 명분의 서명이었다. We did it, 해내도 아주 야무지게 해냈다.




이 날은 60일에 걸친 소환 요구 서명 기간이 끝나는 날이었다. 주지사 소환 선거를 성립시키는 법정 서명 수는 54만이었다(직전 주지사 선거 때 투표한 사람 수의 25%). 워커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과, 1년 가까이 별러 온 반대자들의 결의 수준으로 보아 이 숫자는 충분히 달성될 것으로 일찌감치 예견되었다. 그러나 소환 선거에 필요한 수의 두 배에 이르는 엄청난 결과를 달성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서명 운동을 주도한 이들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숫자였다.

이러한 역사적 성과를 일구어 낸 주역은 북풍한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 구석구석에서 줄기차게 서명 운동을 이어 온 자원봉사자들이다. 서명부를 실은 트럭이 주 행정책임위원회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형광색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은 서로 손을 잡고, 명부가 전달될 3층 사무실까지 줄을 늘어 섰다. 이들이 환호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서명부 상자들은 하나씩 사무실로 운반되었다. 주 전역의 풀뿌리 민심을 담은 소중한 문건에 잘 어울리는 대접이었다. 뒤에 선 지지 시민들은 "thank you, thank you"를 연발하며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서명부 상자를 나른 사람도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위스콘신의 72개 카운티에서 온 자원봉사자 72명이, 자신의 출신 카운티 이름을 붙인 명찰을 단 채, 상자를 하나씩 들고 날랐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행위였다. 워커를 비롯한 소환 반대자들은, 주지사 소환 운동이 야당성이 강한 주도 매디슨이나 대도시 밀워키 등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폄하하곤 했다. 72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이러한 선전이 거짓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상자 행렬의 맨 앞에는 줄리 아줌마가 섰다. 11월에 바로 이 사무실에 소환 운동 청원서를 낸 그녀는 두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 묵직한 상자를 들고서였다. 이렇게 운반된 서명 상자는 소환 선거를 관장하는 행정책임위원회 사무실의 한쪽 벽에 다섯 층으로 가지런히 쌓였다.






서명부 제출 행사는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진행되었지만, 다분히 상징적인 것이기도 했다. 실제 서명부는 행사 이전에 이 위원회에 미리 운반되어 안전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일부 공화당원들이 서명부를 훼손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동토에서 어렵사리 모은 서명부가 훼손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행정책임위원회 당국자가 기자회견을 할 때 경찰국장도 배석했으며,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서명부가 보관되고 점검이 수행되는 곳에 실시간 웹캠까지 달아 공개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소환 요구 서명

주지사 소환을 요구한 서명자 1백만. 이것은 신기록이었다. 숫자로 보면, 지난 선거에서 투표한 유권자의 46%가 서명에 참여한 셈이다. 놀라운 열정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소환 때 서명한 사람은 23.4%였으며,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 1921년에 노스 다코다에서 주지사 소환이 벌어질 때의 서명율은 31.7%였다. 작년에 비슷한 이슈를 놓고 법안 무효화 투표를 벌인 오하이오 주의 서명율은 32%였다. 어떤 수치와 비교해도 위스콘신의 1백만 서명은 새로운 기록이다.

주민들의 소환 서명부는 행정책임위원회에서 검사를 하게 되며, 소환 요구를 당한 측, 즉 주지사측도 검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서명 자격이 없거나 중복된 서명을 가려내게 된다. 일단 서명부가 제출되면, 검사를 통해 부적격 서명을 삭제함으로써 전체 서명자의 수를 줄이는 것이 소환 선거를 성립시키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공화당과 티 파티 관련 조직은 서명부에서 부적격 서명을 가려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서명부에 착오나 중복이 있다 하더라도, 필요한 수의 두 배에 가까운 서명이 담긴 서명부에서 절반 정도를 잘라내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번 소환 선거를 무산시키려면 서명부 숫자의 46%를 잘라내야 한다.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소환 선거 때에 검사를 통해 무효화된 서명 수는 전체의 18%에 지나지 않았다. 주지사 소환 선거는 기정 사실이 된 셈이다.

원래 서명부 검사는 제출일로부터 31일 안에 하게 되어 있지만, 엄청나게 많은 분량 때문에 지역 판사는 따로 한 달을 더 쓰도록 허용했다. 이에 따라 실제 선거는 4월 이후에나 시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민주당 쪽에서는 워커와 맞붙을 대표 선수를 선발해야 한다. (위스콘신 소환 선거는 현직에 대한 찬반 투표는 생략되고, 현 공직자와 반대 후보가 경합하는 선거 방식으로 치러진다.) 민주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므로, 어쩔 수 없이 예비 선거(primary)를 거쳐야 한다. 일찌감치 단일 후보를 정해 예비 선거 없이 나가면 내부 경선에 소모될 돈을 절약할 수 있고 아군끼리 치고박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지만, 예비 선거에도 장점은 있다. 선거 이슈(즉 주지사 소환 이슈)를 계속 부각할 수 있고, 막강한 재정 자원을 가진 주지사의 공격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

주지사 워커는 소환 서명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한편으로는 값비싼 홍보 방송을 연이어 내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신경쓰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겠다고 다짐해 왔다. 그런 그도 이제는 소환 운동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1백만 서명부가 제출된 뒤 워커는 "정부 지출을 통제하고 예산 균형을 맞추며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는 저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며, 이에 대해 위스콘신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선거에서 보자는 말이다.

열정과 조직, 온-오프 라인의 유기적 연결

두 달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에 1백만 명의 서명을 받아 소환 선거를 기정사실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물론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한 노동 섹터를 공격한 주지사에 대한 분노가 주동력이었고, 반 주지사 정서를 곳곳에서 서명으로 승화시킨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이 이를 일구어 낸 산파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적인 접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지사 소환 운동은 작년 이맘 때 주지사의 느닷없는 예산법안 발표로 여론이 폭발할 때부터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민주당과 더불어 이번 소환 운동을 주도한 위스콘신연합은 당시 시위 현장에서 워커의 소환에 찬성하는 주민들을 차곡차곡 모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위가 느슨해지자 인터넷 서명 같은 방식으로 작업이 계속되었다.

이런 꾸준한 작업의 결과, 11월15일에 소환 서명 운동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위스콘신연합의 데이터베이스에 수집된 소환 찬성 주민은 20만 명에 이르렀다. 필요 서명 수의 3분의 1 이상을 이미 안고 시작한 셈이었다. 이 중에서 지역 활동가와 자원봉사자 3만 명이 조직되었다. 권력에 대항하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무기, 열정과 조직이 모두 잘 갖추어진 싸움이었던 것이다. 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한 저항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현실적인 정치력으로 전화한 점도 중요하다.

거리에서 풍찬노숙하는 시위와 계산기를 두드리는 선거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시위라면 정부쯤은 들었다 놔야 할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고, 선거라면 정치꾼들의 연례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모두 비정상인 시스템 때문에 갖게 되는 인식이다. 이상적인 시스템은 거리의 뜻이 모여 제도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는 오로지 한풀이의 장소가 되고, 온라인은 파장 없는 그들만의 리그에 그치며, 정치권은 거리에 무관심한 채 권력만을 탐하기에 바쁜 곳에서는 시민의 좌절과 저항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불의하거나 무능한 지도자가 주어진 임기를 믿고 전횡을 할 때, 시민의 저항으로 국가나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정상화할 수 있는 경로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곳에서 벌어지는 양상은 대체로 이와 같다. 아무려나, 민주주의에서 민의(民意)를 빼면 뭐 남는 것도 없지 않은가.


※ 이미지: UPI.com, timesunion.com

 

덧글

  • dhunter 2012/01/27 09:22 # 삭제 답글

    글과 전혀 상관 없습니다만... 허츠나 에이비스에서는 상업용 카고밴을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이런 차는 특수 업체가 따로 있었군요.

    본문도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 뉴욕에서 2012/02/02 06:34 # 삭제 답글

    늘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운동을 볼 때마다 저는 부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리도 힘을 합치는 일에 약한지...한국에서도 이런 운동으로 얼마든지 나라를 수익모델로 보는 사람을 끌어내릴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 가끔오는독자 2012/02/04 22:56 # 삭제 답글

    본문에 나온 "거리는 오로지 한풀이의 장소가 되고, 온라인은 파장 없는 그들만의 리그에 그치며, 정치권은 거리에 무관심한 채 권력만을 탐하기에 바쁜 곳"이라는 묘사에서 한 글자도 빼거나 보탤 게 없어 보입니다. 특히 중간 대목이 더욱 쓰라리고요.
  • 2012/02/08 09:2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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