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면서도 진보적인 미국 도시? 미국美 나라國 (USA)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사는 곳에 자부심을 갖는다. '곳'이란 작게는 동네일 수도 있고 크게는 나라일 수도 있다. 인지 부조화를 피하려는 심리일 수도 있고 교육 받은 효과일 수도 있지만, 어느 곳이나 좀 살다 보면 정도 들고 익숙해져서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낯선 곳에 가면 편한 것도 낯설어서 불편하고, 따라서 도로시처럼 "There's no place like home!" 하게 된다. 외국 사는 한국인들이 한국을 '즐거운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올해 겨울은 따뜻했네. 아직 다 안 끝났기 때문에 입방정을 떨다 부정 탈까 좀 조심스럽지만, 여하튼 지금까지는 그렇다. 온도도 그렇고, 무엇보다 눈이 예전에 비해 적게 오고 있다. 지금도 문만 열면 보이는 것은 대부분 흰색이지만, 그래도 다른 해에 비해 늦게 왔고 적게 왔다. 이 정도면 양반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 사는 한 사람은 올 겨울 초의 난동(暖冬)을 겪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야, 겨울이라도 그다지 춥지 않고 눈이 없으니 이렇게 좋구나. 따뜻한 남쪽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이참에 남쪽으로 이사를 확 가버릴까? 하지만 이렇게 진보적이고 살기 편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을 텐데... 남쪽에도 정치적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그래서 그는 지역 신문에 편지를 보내, 미국의 따뜻한 남쪽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신문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요약).


세 도시 정도를 추천할 수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애슨스,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더램, 텍사스 주의 오스틴입니다. 세 곳 모두 따뜻한 도시이며, 각종 선거에서 진보적으로 투표한 이력을 가진 곳들입니다. 또 진보적인 기풍의 대학이 있고 음악적 자원이 풍부하며 대안 매체(신문)가 존재한다는 점도 당신이 사는 도시와 비슷합니다.

문제는, 이들 지역에서는 그러한 분위기가 딱 그 도시 경계선까지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현재 사는 도시는 고속도로를 타고 나가면 주변에 또다른 진보적인 대도시가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주 전체가 진보적 기풍을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진보적 정치인이 18년이나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고, 레즈비언인 여성 연방 하원의원이 다시 상원의원으로 무난히 당선되리라 예상되는 판이니까요.

이에 비해 애슨스, 더램, 오스틴은 모두 빨간 주(공화당 지지 지역)의 한 가운데 존재하는 작은 파란 섬(민주당 지지 지역) 같은 도시들입니다. 예를 들면, 오스틴은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도시들로 손꼽히는 러벅, 플레이노, 알링턴, 애벌린 등과 같은 주에 속해 있죠(아래 참조). 애슨스가 있는 조지아 주는 허먼 케인이나 뉴트 깅리치(모두 공화당 소속 대선 주자)에게 정치적 후원을 하는 곳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더램에서는 노인들이 극단적 보수주의자인 고(故)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을 칭찬하는 소리를 흔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우익 테러리스트인 에릭 루돌프가 반낙태-반동성애를 부르짖으며 폭탄 테러를 벌인 뒤 숨어든 곳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편지글로 볼 때, 당신이 날씨가 춥다고 이런 보수적인 지역으로 이사를 할 것 같지는 않네요. 나의 제안은 이렇습니다: 그냥 사시는 곳에 사시고, 난로를 하나 장만하세요.


참고로,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진보적인 도시들은 아래 표와 같다(Bay Area Center for Voting Research, pdf 자료). 인구 10만 이상의 미국 도시 237개를 대상으로 하여, 2004년 미국 대선 결과를 지표로 하여 분석했다. 단일 선거를 지표로 썼기 때문에 장기적인 추세로 보긴 어렵지만, 지역 분위기는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 명시된 가장 보수적인 도시 순위에 따르면, 윗글에서 편집자가 거론한 텍사스 도시들의 보수성은 다음과 같다: 러벅(2위), 애벌린(3위), 플레이노(5위), 알링턴(14위).




사람이 사는 데 기후 환경도 중요하지만 정치 환경도 중요한 것 같다. 지역 신문을 읽으면 열만 받거나, 밥집 술집에서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인간들만 만나게 된다면, 지역을 뜨는 편이 낫겠다고 하겠다. 미국 남부와 보수성을 동치화하는 것은 편견일 수도 있고, 더구나 보수적인 사람들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새나 사람이나 비슷한 색의 깃털을 가진 이들끼리 살아야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싶다. 위의 편지를 쓴 사람이나 이에 답해준 신문 편집자 같은 사람은, 그런 정신 건강을 위해 덜덜 떠는 육체적 고통(에다 소금기를 덮어쓴 자동차)을 감수하는 편을 선택하며 살고 있다고 할까.

[덧붙임]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물론 인간 생활의 기초 조건들(이를테면 일자리)이 갖춰진 상태에서의 옵션이라고 하겠다.

도시의 진보성/보수성을 따지는 지표는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개인의 그것을 측정하는 기준도 그다지 정교하지는 않다. 미국의 사회과학 조사에서 흔히 적용되는 이데올로기 변수는 개인의 보고(self report)나 투표 행태로 측정한다. 전자는 이를테면 "당신은 얼마나 보수적/진보적입니까? '매우 보수적'에서 '매우 진보적'까지의 7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오"하고 묻고, 후자는 이를테면 "당신은 지난 OO선거에서 누구/어떤 당을 지지하였습니까?" 하고 묻는다. 개인 이데올로기 측정을 정교화하려는 노력이 있지만, 대체로 이 같은 기준이 널리 적용된다. 세분한다고 해도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이데올로기' 변수들로 나누는 정도다.

이것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두 진보적(progressive)인가라는 질문을 제쳐 놓더라도, 정치가 양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조이고, 두 당이 비교적 일관된 이데올로기 방향성을 갖고 있는 미국에만 잘 적용되는 지표일 것이다. 2005년 퓨 리서치 센터 자료에 근거한 이 표를 보면, 두 정당에 대한 지지와 좌파/우파 가름이 매우 잘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다.

개인보다 훨씬 복잡하게 마련인 한 도시의 정치적 경향성은 더욱 따지기가 어려울 것이다. 위 연구에서는 간단히 이전 대통령 선거에서 거주자들이 보인 투표 경향으로 이를 분석했다. 역시, 미국적 상황에 그럭저럭 맞는 지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경우 문제점은 1) 작은 도시일수록 그 동질성 때문에 이데올로기 특성이 강조되어 나타난다는 점, 2) 후보 특성에 따라 결과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이를테면 흑인이나 여성 후보가 등장했을 때의 지지 경향, 혹은 후보자의 출신 지역의 선거 행태를 오로지 진보/보수로 회귀하기는 어렵다), 3) 도시 고유의 정치적 분위기를 측정하는 지표라기보다 단일 시점에서의 경향성을 알아보는 지표의 의미가 강하다는 점 정도가 되겠다.

위 표에서는 진보적 도시 중 많은 도시가 대도시들인데, 이는 미국적 여촌야도, 혹은 보촌진도, 혹은 공촌민도(共村民都)의 전통과도 관계가 있을 듯싶다. 같은 대도시들이라도 남부 대도시들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것을 놓고, 남부의 보수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아래 댓글에서 Desac님이 말씀하신 학력과 정치 성향 관계는? 위의 자료에는 맨 뒤에 진보/보수 도시 주민의 인구학적 특성이 나와 있는데, 여기에는 학력 데이터도 있다. 각 도시의 대졸자 비율을 (인구수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 평균해 보면, 보수 도시 평균은 21.2%, 진보 도시 평균은 23.6%로 진보 도시가 약간 높게 나왔지만, 통계적으로 의미는 없었다. 따라서 이 데이터에서 고학력=진보의 결과는 발견되지 않는다. 보수 도시들에 비해 고졸 미만의 저학력자도 많고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도 많은 진보 도시들의 학력적 양분화 현상은 대도시라는 특성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진보적인 도시들이 모두 범죄율이 높은 도시라는 지적을 트위터에서 보았는데, 이것도 대도시의 특성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즉 도시 규모(인구), 이데올로기, 범죄율 등의 변수 중에서, 이데올로기→범죄율, 혹은 범죄율→이데올로기의 인과 관계는 성립하지 않고, 둘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다면 도시 규모(인구) 변수가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조정 변수(moderator variable)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진보적이면서도 범죄율이 낮고 안전한 도시를 찾자면 위의 도시들 중에서 되도록 소도시를 찾으면 되겠다. 위 신문 편집자가 '따뜻한 진보적 도시'로 꼽은 애슨스, 더램, 오스틴의 인구는 각각 116,714명, 228,330명, 790,390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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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esac 2012/01/31 09:21 # 삭제 답글

    미국에서는 학력과 정치성향의 관계는 어떨까요? 도시명으로 보면 얼핏 우리나라처럼 "고학력=진보' '저학력=보수'로 나뉠 것도 같은데요.
  • dhunter 2012/01/31 10:24 # 삭제 답글

    좌빨 넘버원이 디트로이트인게 여러모로 의미심장한데요...

    UAW의 존재와 관련이 있을까요?
  • u2 2012/01/31 17:37 # 삭제

    dhunter/
    liberal이, 어떻게 좌빨과 연관되나요?
    그것도 미국의 사례에서.
  • dhunter 2012/02/01 21:23 # 삭제

    음.;
    리버럴이 무슨 뜻인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농 삼아서 그렇게 불렀는데 미국 정치지형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것 같다고 생각하시면 죄송합니다.
  • 커피파티 2012/02/01 06:57 # 삭제 답글

    St. Louis가 탑25에 꼈는데 매디슨이 안낀게 흥미롭군요.. 버팔로가 있는걸봐선 인구제한이 있는거 같지도 않은데.... 매디슨도 도시경계만 벗어나면 남부 어디 만만치 않죠.. u2/미국도 꼴통들은 리버랄을 사회주의/공산주의자로 공격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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